[트라우마 상담기록] 13회기

나쁜 사람을 좋아해야만 했던 이유

by 정인

-머리를 잘랐군요.



씩 웃은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머리카락 끝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이 좋았다.



-네. 동생 결혼식 끝난 바로 다음날 잘랐어요. 동생이 결혼식 때까지 머리를 기르라고 해서 진작 자르고 싶은 것을 반년쯤 참고 있었단 말이죠?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짧게 자른 제 머리를 보다니 엄청 안타까워하셨어요. 젊은 여자애가... 하시면서요.



세상이 망한 것 같은 표정으로 반쯤 비명을 지른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머리를 다 할 거라고 큰소리를 쳤죠. 이 머리도... 오랫동안 하고 싶어 하던 머리였어요.


-기분이 어때요? 시원하지 않아요?


-네. 머리도 가볍고, 너무 편하고,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니까 좋아요.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수 십 년간 선생님 머리스타일의 변천사를 보여주셨다. 선생님 머리는 아주 길었다가도 아주 짧아지고, 똑 떨어지는 머리였다가도 구불거리기도 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머리도 처음 했을 때는 다들 놀랐었어요. 이런 머리스타일이 당시에 흔치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몇 년 전에 처음 이 머리를 했을 때는 지금보다 더 짧았을 때거든요. 사람들은 각 연령대마다 어느 특정 모습을 요구해요. 나이 든 여자에게는 적당히 짧은 머리에 파마머리를 생각하죠. 저는 거기에서 벗어나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껴요. 이게 제게 잘 어울리는 머리라 생각하거든요.


-저도요. 제약에서 벗어나니까 자유롭더라고요. 더군다나 이번에는 처음으로 미용실에 제가 원하는 머리스타일 사진을 들고 갔어요. 항상 그냥 알아서 잘라주세요,라고 했었는데 제가 원하는 걸 조목조목 말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어요. 미용사 선생님도 제 요구를 듣더니 이렇게 저렇게 해보자고 같이 고민해 주셨어요. 해보니 참 별게 아닌데 그전에는 왜 그랬나 몰라요. 거절당하는 게 무서웠을까요?


-이제 원하는 걸 요구할 수 있게 됐군요. 좋은 변화예요. 미용사 선생님들은 "알아서 잘라달라는" 것보다 본인 요구를 명확히 아는 손님을 더 좋아하신다는 영상을 전에 본 적 있어요. 그리고 거절당하면 뭐 어때요.


-그렇죠. 거절당해도 세상은 안 무너지죠. 그래서 처음으로 제가 원하는 것을 말하고, 어느 정도 수용하고, 제가 원하는 머리를 했어요. 그래서 무척 기분이 좋아요.



뜨거운 히비스커스 차가 담긴 머그컵을 양손으로 잡으며 말을 이었다.



-아, 며칠 전에 병원을 다녀왔어요. 지금 그 병원에 다닌 지 거의 1년이 되었더라고요. 사실 진료실에 들어가서 가족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어요. 당장 제 상태만을 이야기했죠. 대체로 괜찮거나, 우울하거나 둘 중에 하나였지만요. 진료실에 길게 들어가 있는 게 민폐 같기도 해서 그동안 말을 안 꺼냈는데, 이번엔 처음으로 길게 말씀드렸어요. 전에 소개해주신 상담소 잘 다니고 있고,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그동안은 많은 것을 내 탓으로 여겼는데 이제는 어머니가 성인으로써 본인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좀 더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런 거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도 좋지만, 정인 씨를 먼저 생각하는 것도 좋죠. 처음으로 진료실에 들어가서 조금 오래 앉아있었군요?


-아뇨. 그 말을 다 하는데도 5분도 안 걸렸어요... 막상 말하면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건데 그동안 왜 이렇게 망설여졌나 모르겠어요.



세상 어려워도 막상 하면 별 거 아닌 일들이 아직도 내게는 많다. 서른에도 그렇다.



-제가 괜찮아졌다는 말을 들으시더니 지금 제가 복용하고 있는 약을 하나씩 끊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의사 선생님이 권해보시니까 일단은 해보려고요. 뭐, 단약이 안 되면 다시 먹어도 되니까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완치를 목표로 하시는 게 무척 부담스러워요. 약을 아예 끊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봐요.


-그 선생님이 아무에게나 그렇게 권유하시진 않을 거예요. 저도 내담자를 그 병원에 종종 의뢰할 때가 있는데, 전에 본인이 상태가 좋아졌다고 단약 하고 싶어 하는 환자에게도 쉽게 약을 끊자고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약물을 쓰시는 것에 무척 조심스러우신 편이에요. 그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정인 씨가 정말 약을 끊어도 될 것 같아서였을 거예요.



그러려나. 정말 끊어도 되려나 이제.



-저번에 상담을 마치고는 어땠어요?


-저번에 연애얘기를 했었죠...?


-정확히는, 정인 씨가 비언어적 표현과 언어적 표현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에게 경계심을 느끼는 일에 대한 것이었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인 씨의 "위험을 경계하는 부분"이 아주 합리적인 이유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아, 그랬었지. 박수를 짝 쳤다.



-아, 맞아요. 선생님, 제가 그런 게 있어요. 다른 사람 변호해 주는 거... 전에는 전 남자 친구를 떠올릴 때 "애는 착했어."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라고 생각했는데, 저번주에 상담 끝나고 집 가는 길에 다시 되짚어 보니 정말 미친놈인 거예요. 신기하게, 갑자기 그렇게 인식이 바뀌었어요. 제가 원래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끊임없이 장점을 찾으면서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거든요. 정말 좋은 점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빈 쌀독 바닥을 긁는 것처럼 어떻게든 찾아내요. 사람은 원래 다 장단점이 있잖아요... 나쁘기만 한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어요... 그냥 제가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믿고 싶은 것일 수도 있지만... 모르겠네요.


-헤어지자고 했다고 한밤중에 집 앞에 찾아오고, 손목을 잡고 끌고 가려고 하는 사람이었잖아요. 정인 씨와 가족들이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이상한 사람이 맞아요. 하지만 정인 씨 안에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닐 거야."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군요? 만약에 정인 씨가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무래도 제가 불편하겠죠. 저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아예 상대를 안 해요. 정확하게 말하면 아예 상대를 투명인간 취급해 버려요. 말을 걸어도 못 들은 척하고, 의도적으로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죠.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고 상대방을 상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제가 사회성이 없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사실 마음도 안 좋아요...


-왜 마음이 안 좋을까요?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게... 아빠가 하던 행동이거든요.


-그렇군요. 정인 씨는 아빠처럼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면 어떻다고 느껴요?


-제가 닮고 싶지 않은 모습이기 때문에 제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자괴감을 느낄 거예요...



선생님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숨 고를 시간을 주셨다.



-지금까지 대화를 살짝 정리해 볼까요? 정인 씨는 나쁜 사람과 거리를 두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어요. 한편으로는 닮고 싶지 않은 사람과 닮는다는 자괴감을 피하려 그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좋은 점을 찾으려 노력하는 면도 있고요.


-네.


-혹시 예전에 싫어하는 사람의 장점을 찾으면서까지 노력해야 했던 순간이 있었을까요?


-음... 그야, 학교 다닐 때는 같이 다니는 친구가 싫어도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 친구의 단점보다 장점을 더 보려 노력했을 때가 있죠.


-그럼 다시 한번 물어볼게요. 나쁜 사람을 좋아해야만 했던 순간이 있을까요?


-그야...



답은 정해져 있다.



-부모님이잖아요.


-그렇죠. 어린아이는 부모가 나쁜 사람이더라도 떠날 수 없으니까요. 아무 이유 없이 부모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면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없어 엄청나게 괴롭기 때문에 스스로를 탓하게 돼요. 내가 잘하면 부모님이 화를 안 낼 거야,라는 식으로요.


-원래 부모님들이 다 그러지 않나요. 너 잘되라고 때리는 거라고요.


-엄청난 가스라이팅이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아는 부모님이 나쁜 사람이라고 인식하더라도, 부모 곁에 머물기 위해 스스로를 속여요. 사실은 부모님은 좋은 사람이야. 내가 못해서 화를 내는 거지. 아이는 생존을 위해 부모를 좋아해야 할 이유를 어떻게든 찾는답니다.


-... 생각지도 못했어요. 나쁜 사람의 좋은 점을 찾아내려는 노력들이 그런 식으로 지금껏 반복된 거군요.


-부모님을 좋아해야만 하는 아이에게, 이제 정인 씨가 어른이라는 걸 말해주세요. 어른이 된 정인 씨는 부모님을 좋아하지 않아도 생존에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요. 그걸 안 순간 우리의 방어기제는, 아주 신기하게도 성장을 하게 될 거예요.



선생님의 말씀을 수 번 곱씹었다. 다른 사람을 꼭 좋아하지 않아도 돼. 네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저 사람이 진짜 나쁜 사람일 수도 있어. 나쁜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돼. 꼭 좋은 점을 찾을 필요도 없어. 저 사람이 없어도 넌 잘만 살 거거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얼굴을 들었다.



-네.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



다음번 상담 주제는 "손절하는 나"로 정해졌다. 선생님은 내 인간관계도를 도화지 위에 그려보자고 하셨다.

상담을 거의 마치고, 문을 나서기 전에야 뒤늦게 부끄러움이 확 몰려왔다.



-선생님. 요새 제가 상담소 들어오자마자 자랑을 되게 많이 하죠.



실제로 요즘에는 상담소 문을 밀면서부터 선생님이 인사를 하실 틈도 없이 "이번 주도 잘 지냈어요!"부터 시작한다.



-좀 우스울 수도 있는데, 상담소 올 때마다 100점짜리 시험지를 자랑하는 기분이에요. 그냥 살면서 무심코 느껴지는 달라졌다는 감각이 무척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서...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상담소에 들어설 때마다 8살짜리 아이로 돌아간 기분이다. 의기양양하게 잔뜩 들뜬 채로 초인종을 누른다. 신발을 벗으면서 이번 주도 이렇게 잘 살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열심히 했다고 칭찬받고 싶다.



- 그렇게 말해주시는 것도 제게 큰 보람과 기쁨이 된답니다. 정인 씨의 변화는 100점짜리 시험지에 비할 바가 아니죠. 그보다 훨씬 크고 대단한 거예요.


-그래요?


-그럼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 건 정인 씨가 잘 살기 위한 거잖아요. 열심히 노력해서 이뤄낸 변화잖아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데 상담자로서 당연히 기쁘지 않겠어요. 그래도, 나중에 언젠가는, 우리가 막힌 벽 앞에 있다고 느낄 때가 있을 수도 있어요. 쉽지 않고, 막막할 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막혀있는 곳이 맞는 길일 때도 있답니다. 그런 순간이 와도 우린 잘 갈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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