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쟁자
어렸을 때 세 형제가 우글우글 몰려다니며 떠들고 있으면 아버지가 와서 당장 흩어지라고 소리 지르셨다.
-너희는 경쟁자야! 서로 경쟁해야지, 사이좋게 지내고 쓸데없이 얘기하면서 낄낄대고나 있고! 당장 모두 각자 방으로 돌아가!!
어머니는 형제끼리 우애가 좋아야 한다,라고 하셨지만, 부모님 두 분의 가르침은 반대될 때가 종종 있었다. 십몇 년 뒤, 일생일대의 아주 오래되고 큰 프로젝트였던 자식들의 대학입시가 모조리 실패하고 나서 아버지는 가족 저녁 외식을 하며 자식을 여섯, 일곱 명쯤 낳았어야 했다고 분통을 터뜨리셨다. 그랬으면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경쟁해서 한 명쯤은 의대 갔을 텐데 세 명으로는 다들 배가 불러 터져 헝그리정신이 없어서 그게 잘 안 됐다고 하셨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애를 일곱 명쯤 낳아야 했을 당사자인 어머니는 묵묵히 식사하셨다.
2) 방문
아버지는 집안의 많은 것들을 통제하려 드셨는데, 그 방법의 하나는 방문을 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감사하게도 자식 한 명당 방 하나를 쓸 수 있게 해 주셨으나 그 방의 방문은 과외나 수업이 있지 않고서야 닫을 수 없었다. 방문을 닫으면 감시할 수 없고,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잠시라도 있으면 엉뚱한 짓을 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성인이 될 때까지는 옷을 갈아입을 때조차 방문을 닫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제각각 방을 가지고 있었으나, 숨을 곳 없는 광장에 덩그러니 서 있는 기분이었다.
3) 오천만 원
초등학생 때, 5개월 정도 미국에 다녀왔었다. 이천만 원쯤 들은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돈이니, 이십 년 전 기준으로 보면 더 큰돈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그랬겠지만, 아버지는 귀국 날부터 이천만 원이라고 불렀다. "이천만 원 밥 먹어!!!"라는 식으로. 나는 그 말이 너무 싫었다. 아까우면 보내지나 말지. 돌아와서 저런 소리 들을 줄 알았으면 가지 말걸. 놀랍게도 일주일 후, 아빠는 그간 계산을 누락시켰다는 듯 천만 원을 증액시켜 내 별명은 삼천만 원이 됐고, 금액은 눈덩이처럼 한 달쯤 지나자 오천만 원이 되었다. 어렸던 나는 생각했다.
-인플레이션이 미쳤네.
4) 최선
초등학교 고학년 때, 학원을 많이 다니고 있었다. 학교 다녀와서 수학문제를 풀던 중 저녁 먹으라는 어머니의 부름에 식탁에 앉았다. 내 맞은편에는 막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가 앉아계셨다. 숙제 잘했냐고 어머니가 물으셔서 어린 나는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 응!! 최선을 다해서 풀었어!!
하지만 내 말에 갑자기 아버지의 분노가 폭발했다.
- 야!!!!! 네가 네가 뭔데 최선을 다했다고 얘기해!!!!!!!
날벼락같은 고함에 내 눈이 휘둥그레 커지고 설거지를 하던 어머니가 달려왔다. 당신 왜 그래, 하며 어머니는 아버지를 뜯어말리셨지만 아버지는 되려 목소리를 더 키우시면서 씩씩대셨다.
- 아니, 쟤가 최선을 다했다잖아!!! 웃긴 소리 하고 있어! 지깟게!
최선을 다 해서 문제를 풀었다는 것이 대체 무엇이 잘못인 건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그저 당황스럽게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으나, 그 문장의 어딘가가 아버지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예상치 못하는 지점에서 화를 내셨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고학년 때 유행하는 [잔소리]라는 노래를 저녁식사 때 틀었더니, "내가 잔소리한다고 일부러 틀었냐"면서 노발대발하셨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나와 동생은 잠자코 서로의 눈을 맞추다가 노래를 껐다
5) 달리는 기차와 노는 개미들
어느 날, 집에 큰 화이트보드가 생겼다. 수학문제를 풀고 설명하라는 취지를 위한 것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화이트보드에 본인만의 명언을 적기 시작했다. 수많은 말들을 칠판에 가득 적으셨지만, 지금 기억나는 건 두 개 정도이다. 하루는 긴 기차를 그려놓고, 나와 동생들을 앞에 앉히셨다. 그리고 설명하셨다.
- 이 기차는 열심히 달리고 있다. 이 기차의 엔진은 나고, 너희와 엄마는 열심히 달리는 내 위에 올라탄 무임승차자다.
또 다른 날은, 보드에 개미굴을 그려놓으셨다.
- 개미들 중 일하는 개미의 수는 정해져 있고 노는 개미의 수도 정해져 있다. 나는 열심히 일하는 개미이고 너희는 탱자탱자 노는 개미다.
파란색 보드마카로 그려진 개미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저렇게 그린 그림과 써놓으신 본인만의 그림과 글귀들은 지워지지 않은 채 아주 오랫동안 칠판에 적혀있었다. 나는 종종 아주 깊고 깊은 개미굴 속으로 빙글빙글 빨려 들어가며 생각했다.
아. 나를 대체 왜 낳았을까. 나는 왜 태어난 걸까. 왜 태어나서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
6) 웃지 마
원래도 집이 자유로운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성적에 예민해지신 아버지는 더 통제적으로 구셨다. 예를 들면 샤워하는 시간과 횟수라든지, 사소하게는 표정까지 통제하셨다. 아버지랑 있을 때는 웃을 일도 별로 없었지만, 무심코 다른 가족들이랑 이야기하다가 웃기라도 하면 “웃지 말라고! 병신 같은 게, 공부도 못하는 게 뭐가 좋다고 실실 웃고 다니냐”라고 호통을 치셨다. 어쩌다가 학교를 데려다주시는 날에도 내가 차에서 내리기 전이면 “학교에서도 항상 웃지 말라”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집에만 들어가면 표정이 없어졌다. 웃으면 웃는 대로 시비가 걸리고, 무표정이면 무표정인 대로 표정이 안 좋다고 반항하려 드냐며 화를 내셔서 차라리 표정이 없는 것을 택했다.
7) 흉터
발소리와 인기척에 예민한 편이다. 지금도 그렇다. 당시 모든 감각들은 그 두 가지를 포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래야지, 불시에 뒤에서 주먹이 날아들어도 몸을 웅크릴 수 있었다. 독수리가 하늘에서 맴도는 들판 한가운데 던져진 토끼처럼,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리면 등골이 쭈뼛하면서 온몸의 털이 일어서고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팔로 머리를 감싼다. 나뿐만 아니라 내 형제들 모두에게 흉터같이 남은 그날들의 흔적들이다.
8) 공격
아버지는 아주 오랫동안 부인과 자식들이 편을 먹고 자신을 공격한다고 화를 내셨다. 어머니한테 네가 자식들이랑 나랑 사이를 이간질해서 자식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냐고 소리를 지르셨다. 아무도 아버지를 공격하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어서 공격받는다고 느끼셨던 것 같다. 하지만 어머니는 철저히 아버지의 편이셨다. 어머니는 가장의 무게를 지고 있는 아버지의 고충을 이해하시면서, 그 돈을 들였는데 성과가 나오지 않으니까 당연히 속상한 거라고 아버지의 폭력 사유를 자식들에게 설명하며 합리화하셨다.
9) 뭐라고요
하지만 그런 말이 위로가 될 리는 없었다. 하루는, 수화기를 붙들고 엉엉 울었다. 아버지 때문에 힘들다,라는,라는 내 말에 어머니는 "그래도 네 아버지는 널 성폭행하지는 않잖아"라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뒤에 친절하게 "부모한테 성폭행당하는 애들도 세상에 많아."라고 덧붙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 문장에 나는 망연자실하게 무너졌다.
10) 아귀찜
대학교 2학년 방학의 어느 날, 아버지는 아귀찜을 사주겠다고 나와 어머니를 데리고 식당에 갔다. 딱히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아버지 기분을 맞춰주라고 부단히 찌르는 옆구리가 아파 집을 나섰다.
- 너희가 좋은 대학을 못 가서 조상님한테 부끄럽다.
- 난해줄 만큼 해줬으니 알아서 살아라.
- 난 너희 목표가 지방대인지 몰라서 공부 못한다고 때린 거다.
- 나랑 살면서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다.
식사하는 내 아버지는 일장 연설을 하셨다. 당장 수저를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아 아귀찜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밥을 먹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가족 간의 어떠한 식사 자리도 싫었다. 부모님을 제외한 가족 중 아무도 외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식당에 가는 동안 차 안에서는 도망갈 곳 없는 자식들을 향한 언어폭력이 빗발쳤고, 비싼 고기가 구워지고 있는 불판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도 아버지와 함께라면 전쟁터에 아무런 무기 없이 던져진 기분이었다. 불판에 고기 대신 내가 올라간 기분이었다. 그 언어폭력들을 피할 곳도, 대응할 수 있는 수단도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우선순위에는 가족끼리의 단합이 가장 위에 있어서 원하던 원치않던 식사 자리에 무조건 참석했다.
- 우리는 가족이니까 같이 밥을 먹어야 해!
그렇게 주말마다 식사 자리가 어떻게든 마련되었고, 그 시간에 학원을 간다는 핑계로 식사를 빠질 수 있으면 외려 다행이었다. 아귀찜을 먹으러 간 그날도 그냥 그런 평범한 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는 말도 언제나 했던 말들이었고 그즈음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많이 정리를 한 상태라서 심리적으로 크게 타격은 없었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머니가 이런 자리에 계속 부르는 게 너무 지겨웠다. 이러한 관계도 가족이라는 형태로 묶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신기했었다.
11) 애교
이후에 어머니는 내게 아버지가 '아버지 어깨를 안마하며 사근사근하게 애교를 부리는 딸'의 모습을 드라마에서 보더니 "내 자식은 왜 저러지 않을까."라며 서운함을 표했다고 전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얼어붙었다. 소름이 끼쳤다. 할 말이 없어서 침묵하다가 결국 나온 말은 "그래서, 어쩌라고?"였다. 자식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하지 말라고 십여 년간 수없이 강조하셨으면서 왜 자식에게는 감정노동을 기대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