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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 Jun 0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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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서평 『잡담의 인문학』

우리는 수고가 많았다. 


‘인문학’ 열기가 들불처럼 번진 후 도처의 독자들이 허기로 쓰러졌다. 지적인 작가 군단이 진단서를 작성했고 출판사는 숨 가쁘게 처방전을 발행했다. 서점 곳곳에 치료제가 보급되었으나 증후군을 호소하는 독자군단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상세 불명의 지적 허기를 충당하기 위해 넓고 얕은 지식 원정에 나선 독자들의 행방은 비밀에 부쳐졌다. 극소수의 독자만이 미궁에서 탈출하였지만 과다증식한 인문학적 지식이 우식증을 낳았다. 스스로 씹고 음미할 수 있는 능력을 떨어트린 것이다. 어찌되었건 ‘인문학에의 강요’는 현대의 교양 있는 한국인에게 들이닥친 시장의 요청이었다.


수고는 지대했지만 작용력은 미미했다.


재빠르게 지식을 습득하여 지식인의 대열에 합류하려 했다가 많은 이가 백기를 들었다. 문턱은 낮아졌지만 진입로가 길었다. 주름 한번 잡아보려 했다가 마음잡고 공부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갑자 칩을 주문했는데 흙 감자가 나온 셈이다. 감자를 씻고 다듬어 구워야 한다면, 구태여 감자 칩을 사먹는 보람이 없다. 쉽고 빠르게 허기를 채울 만한 대안 중에 추천할 만한 것은 별로 없다.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대개 너무 비싸거나 부실하다. 턱없이 방대하거나 유치할 정도로 실속 없는 양단의 인문학 입문서 앞에서 독자는 갈팡질팡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할 일이 많다. 고작 이것 말고도…


인문학을 몰라도 삶은 지속된다. 알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나누는 것으로도 대화는 가능하다. 지식인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고작 인문학 말고도 할 일은 많다. 제안서를 작성하고 세금을 납부하고 카드대금을 메워야 한다. 회사의 방침을 이해하는 것(understand)을 겸해 두각을 드러내야 한다(outstand). 뜬구름 잡느라 열차를 놓칠 순 없다. 주택 청약 경쟁에서 우선권을 부여받는 것이 똑똑한 사람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일보다 우선 중요하다. 당신은 제 자리에서 열심을 다하고 있다. 문제는 언제까지나 제자리라는 것이다. 


단지 삶을 유지하는 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활력 넘치고 범상한 삶의 큰 문제는 활력의 대부분이 생계 기반에 투자된다는 것이다. 쏟아 붓는데도 가난을 면치 못한다. 출근길. 생명으로 넘실대는 지하철 안에서 숨이 막힌다. 명백한 의사로 눈부시게 회의한다. 달뜨지도 냉담하지도 않도록 사회생활 전반의 균형을 유지한다. 얼지도 끓지도 않는 뜨뜻미지근함 속에서 균은 가장 잘 번식한다. 이면의 비의를 파고들면 피곤해진다. 

알게 되면 앓게 되는 질병도 있다지 않나. 넘어갔던 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침묵했던 대상에게 발언하게 될지도 모른다. 위험하다. 그런데도 때로 앓고 싶다. “왜”가 없는 일상에서 탈주하고 싶다. 이제 갓 육하원칙을 배우기 시작한 초등생처럼 기본에서 위안을 느끼고 싶다. 원칙에 어긋난 기인들의 일화에서 한번쯤 기염을 품어보고 싶다. 그런데도 원론에서 시작할 여력은 없다. 고상한 잡담거리 없이도 삶은 열심히 제자리걸음 중이다.


제자리걸음에서 누르는 시프트키.


첨탑에 오르기 위하여 지상에서 시작하는 나선형 계단을 밟아야 한다면 아무래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잡담의 인문학>은 원론을 제거하고 결론부터 조망하는 상아탑이다. 물렁한 의견을 몸집 큰 식견으로 변환하는 시프트키이다. 이 시프트키 하나로 하루아침에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건 물론 아니다. 단지 스쳐가는 몇 마디 대화 안에서 들통 나지 않을 만큼 유식해 보이기에 충분할 따름이다. 고작 있어 보이기 위해 퇴근 후 갖는 달콤한 휴식이나 벼르고 벼른 주말 나들이를 반납하지 않아도 된다. 사소한 사치를 포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인문학적 달변을 구사할 수 있다. 물론 부작용은 따른다. 날로 체내에 축적되는 지식을 배출하기 어렵다는 점, 결론에서 출발하였는데 원론에 도달해버린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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