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간 필리핀여행-2>

졸리비, 팍상한 그리고 숙

by 유경진 Cindy

비행기에서 잠 한숨 자지 못한 두 모녀의 상태는 아침부터 매우 심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날은 이제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 시점이 시작된 하루였다.

필리핀 시각으로 새벽 5시쯤 도착했고, 아이들이 함께 있어서인지 이미그레이션 줄은 생각보다 오래 서지 않고 바로 통과할 수 있었다. 다만 한쪽으로 빠져 이트래블 처리를 다시 하고, 짐을 찾으러 이동했다.

가방 두 개는 금방 나왔지만 나머지 가방들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결국 마지막 화물에서야 모두 나왔다.

그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삼남매는 여전히 ‘함께 있음’이 어색했고, 서로에게 예민해져 있었다.

첫째가 둘째와 셋째를 챙겨주면 좋겠다는 마음과 달리, 첫째 역시 이미 한계에 가까운 상태였다.

둘째는 이유를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서운함이 쌓여 있는 모습이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면 팍상한으로 데려다줄 꾸야를 만나야 했다. 유심이 없어 전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친구가가 미리 연락을 해주기로 했는데, 공항 바로 앞에서 YOU KYOUNGJIN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서 계셔서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친구가 한 번 더 확인 차 연락을 해주었고, 차는 현대 봉고였다. 내부는 매우 깔끔했고 좌석도 푹신해서 잠을 자기에도 좋은 차량이었다.

에어컨도 시원했고, 꾸야의 운전 솜씨는 좋았지만 다소 와일드해서 중간중간 놀라긴 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안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첫 코스는 졸리비였다. 배도 고팠지만 무엇보다 화장실이 급했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려 도착한 졸리비에서 첫째의 표정이 묘하게 복잡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졸리비에 흥미진진해 하다가도, 몇 달 뒤에는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직원들의 영어 발음이 유독 귀에 들어와서인지 “엄마, 나도 나중에 저렇게 영어 하게 돼?” 하고 묻는다. 모두가 너무 피곤한 상태라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고, 주문한 음식을 받아 다시 차에 올랐다. 가는 내내 아이들은 졸음에 취해 있었고, 졸리비는 거의 손도 대지 못했다.

약 1시간 40분을 달려 팍상한에 도착했다. 도착해서야 그제서야 졸리비를 먹고 출발했다.

사람은 거의 없었고, 입구에는 한국어로 큼지막하게 ‘팍상한’이라고 적힌 간판이 눈에 띄었다.

나 역시 거의 15년 만에 다시 온 곳이었다. 그때는 불편하고 힘들었던 기억만 남아 있었고, 무섭다는 이유로 이곳의 자연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같은 장소임에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둘째는 무섭다며 도착하자마자 거절했다. 잠에 취해 무엇이든 하기 싫은 상태였기에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 결국 막내와 아빠, 그리고 나와 첫째 한 팀이 되어 출발했다. 작은 배에 오르는 순간 문득 든 생각은 “아… 잘못 왔다”였다.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 배가 너무 무서웠던 기억. 물이 깊은 곳에는 옆으로 축대를 쌓아 두었는데, 자연보다는 인위적인 느낌이 강해 보기에 썩 좋지 않았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범람을 막기 위한 구조물이라고는 하지만, 콘크리트로 쌓아 올린 공간 사이로 들어가니 마치 댐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흙과 돌, 물이 뒤섞인 자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자연과 완전히 어우러지지 않는 느낌에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출발한 첫 인상은 참 묘했다. 그렇게 소리 지르며 무섭다고 외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배에 적응했고 비로소 자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첫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가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이 뱃사공들의 수고나 그들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이 대자연이라고 말했다.

아바타, 모아나, 겨울왕국 같은 대작 영화들을 떠올리며 이런 자연이 실제로 존재하기에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거라고, 첫째가 살아가며 어떤 발상을 할 때 이곳의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이 문득 떠오르길 바란다고 전했다. “엄마는 이 자연이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믿어?”라는 질문에 나는 “그럼, 사랑아. 엄마는 이 자연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해”라고 답했다.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의문을 품고 있지만, 사랑이는 늘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아이였다.


총 소요 시간은 두 시간이었고, 가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중간에 우리는 결국 또 ‘호구’가 되었다.

뱃사공들이 배고프다며 아침 식사를 사달라고 했고, 금액은 800페소였다. 믿도 끝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들의 삶이 이렇다면, 이건 존중이 아니라 그냥 속아주는 거라고 마음속으로 정리했다.

대신 다음에 다시는 오지 말아야 할 곳으로 리스트에 올리면 되는 거다. 손님들이 오셔도 절대 모시고 가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과 함께. 비용도 생각보다 많이 들어 두 번은 못 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는 한식으로 푸짐하게 차려주셨고, 깔끔하게 잘 먹었다.


그리고 첫 번째 콘도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우리의 생명줄인 식수를 샀는데, SM 하이퍼마켓 바로 옆이라 위치는 참 좋았다. 숙소에 도착해 보니 생각보다 많이 낡았고, 다소 더러워 실망이 컸다.

샴푸도 없고 헤어드라이기도 없어 난감했지만, 애초에 큰 기대를 했던 것도 아니었고 가격을 생각하면 그만한 곳이었기에 이 또한 감사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첫째는 실망이 큰 눈치였고, 아이들은 그냥 2층 침대 하나로 모두 녹아내린 상태가 되었다.


저녁에는 친구를 우리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했다. 친구아들 생일이기도 했고, 너무 보고 싶었지만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첫째는 결국 방에 들어가 잠을 잤고,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무사히 도착했고, 무사히 여행했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이 정도면 베스트한 여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감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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