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 온 지 벌써 5일째 아침이다.
필리핀에 온 지 벌써 5일째 아침이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데, 마음은 아직도 첫째 날 공항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몸은 여기까지 왔는데, 감정은 아직 이동 중인 느낌이다.
아이들의 반응도 참 다르다.
첫째는 어떻게든 적응하려 애쓰는 얼굴이고, 둘째는 “내가 왜 여기 있지?”라는 질문을 마음속에서 계속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셋째는 이유도 없이 그냥 이곳이 좋은 모양이다.
아직은 큰 문제도 없고, 아이들을 달래느라 진이 빠질 만큼의 상황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지금의 이 평온함이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공항으로 가는 길, 아이들은 유난히 설레 보였다. 우리는 늘 그렇듯 한참 일찍 도착했다.
낯선 공항에서 저녁을 먹을 곳을 찾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그 사이 발권장에는 긴 줄이 생겨 있었다. CCC 단기선교팀도 보였고, 영동군에서 온 어린아이들 어학연수팀도 있었다.
필리핀 사람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공항 안에서부터 이미 ‘우리가 가려는 곳의 사람들’과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각자의 사연들’이 뒤섞여 있는 느낌이었다.
발권을 하는데 직원이 내 이름을 보더니 미들네임에 한 글자가 들어가 있다고 했다.
나는 분명 넣은 적이 없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경우 수정은 안 되지만, 제가 도와드릴게요.”라는 말에 당황스러움보다 먼저 고마움이 나왔다.
긴 기다림 끝에 받은 티켓에는 내가 원하던 앞자리가 적혀 있었다.
나는 비행기를 탈 때 늘 앞자리를 선호한다. 이륙할 때 비행기가 살짝 비스듬히 올라갈 때, 맨 뒤에서 그 각도를 보면 괜히 겁이 난다. 조금이라도 덜 기울어 보이는 자리, 그게 나에게는 꽤 중요한 안심 포인트다.
이제 발권 이야기는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티켓을 받자마자 공항 직원이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가방에 배터리가 들어 있습니다.” 순간 고개가 갸웃해졌다. 나는 넣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검색대로 불려갔고, 앞사람의 확인이 길어져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내 차례가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가방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것이다.
나는 분명 새 번호로 바꾼 적이 없고 늘 쓰던 0000으로 설정해 두었는데 말이다.
다행히 자물쇠가 약해서, 살짝 벌어진 틈으로 보안요원들이 힘껏 열어 주셨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물건은 다름 아닌 필리핀 정전에 대비해 넣어둔 무선 랜턴 두 개였다.
기내 반입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대로 들고 들어갈 수 있었다.
걸릴 건 다 걸린 느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일이 결국은 순조롭게 정리되는 느낌도 함께 있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필리핀에 들어오기 전 반드시 해야 하는 이트래블(eTravel) 인증이었다.
출국 72시간 전부터 가능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공항에서 하면 되겠지 하고 있다가 바뀐 시스템을 제대로 몰라 발권 때부터 휴대폰을 붙잡고 씨름했다. 결국 기내 탑승 직전에야 간신히 마무리를 지었다.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필리핀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나만 완료했고, 아이들 것과 남편 것은 마지막 단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 순간에는 정말 “아, 내가 또…”라는 웃음 섞인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다음번에 올 때는 지금보다 훨씬 수월할 거라는 것도.
돌이켜보면 이 첫째 날은 크게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날은 아니다.
다만 낯선 곳으로 이동하는 가족의 마음이 여러 겹으로 드러난 날이었다.
설레는 아이가 있었고, 의문을 품은 아이가 있었고, 그저 좋은 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변수를 몸으로 통과하며 “그래도 괜찮아”를 계속 선택했던 내가 있었다.
아직은 시작이다. 이 기록이 언젠가 다시 읽혔을 때, “그때 우리가 잘 버티고 있었구나”라고 말해 줄 첫 페이지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 아침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