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하이커의 지방 지도 VOL.4 <세화>

제주 세화, 낭만이 아닌 '취향'을 팝니다

by 히치하이커

3년 전부터 시작한 스노쿨링은 제가 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을 조금 바꿔놓았습니다. 이번 여름휴가 역시 오직 투명한 바다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었습니다.

지도 위에서 제가 찍은 목적지는 제주 동쪽 끝자락, 구좌읍 하도리 앞바다의 '토끼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저를 강렬하게 끌어당긴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부둣가에서 제 수영 실력으로 20~30분 정도면 섬까지 직접 헤엄쳐 건너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수영으로 바다를 건너 미지의 섬에 발을 딛는다.'
<토끼섬>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쿵쾅거리는 이 도전 하나를 위해, 저는 망설임 없이 하도리에 숙소를 잡고 일주일간의 휴가를 시작했습니다.

물안경을 끼고 숨을 고르며 도착한 토끼섬의 바다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맑은 물과 다채로운 어종, 현무암 사이를 유유히 헤엄치는 기분은 최고였습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물속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물놀이를 마치고 허기를 달래거나 가벼운 산책을 하기 위해, 저는 숙소에서 가까운 옆 마을 세화리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곳, 세화리는 참 묘한 곳이었습니다.


물론 읍내 도로변에는 익숙한 프랜차이즈 간판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마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거대 자본의 획일화된 브랜드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빈틈을 메우며 사람들을 골목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진짜 주인공은, 작지만 단단한 내공을 가진 '로컬의 히든 챔피언'들이었습니다.

<무슈부부커피스탠드 오리진>

바다 뷰가 멋진 대형 카페를 흉내 내는 대신 묵직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위스키처럼 음미하게 만드는 커피 스탠드가 발길을 잡았고, 공장에서 찍어낸 흔한 감귤 초콜릿 대신 직접 로스팅한 카카오로 깊은 풍미를 만들어내는 카카오 전문점이 골목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식당 역시 투박하더라도 자신만의 레시피로 요리하는 '고유의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제주에 이주해 온 지 어느덧 28년 차가 된 도민입니다.

강산이 세 번 가까이 변하는 동안 제주의 수많은 변화를 지켜봤습니다. 육지 사람들이 갖는 제주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나 낭만 같은 건 제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후죽순 생겨났다 사라지는 핫플레이스들을 보며 '관광지가 다 그렇지' 하는 냉소적인 시선이 먼저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화는 달랐습니다. 28년 차 도민인 제 눈에도 이곳의 활기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보여주기식 겉치레가 아니라, 주민들이 진짜 삶의 터전으로서 마을을 아끼고 가꾸어 나가는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는 마을의 랜드마크인 '질그랭이 거점센터'가 서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번듯한 요즘 건물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곳은 방치되었던 옛 마을 예식장을 주민 477명이 십시일반 출자하여 리모델링한 '마을 협동조합'의 결정체였습니다. 외부 자본에 기대지 않고, 주민들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1층에는 여행자 센터를, 위층에는 워케이션 오피스와 카페를 꾸려 연간 8만 명이 찾는 명소를 일궈낸 것입니다.


이러한 주민들의 뚝심은 최근 놀라운 결과로 증명되었습니다. 세화마을협동조합이 유엔(UN) 해비타트가 공동 주최하는 '2025 아시아 도시경관상' 본상을 수상했기 때문입니다. 수상작의 이름은 '숨비, 바다가 숨 쉬는 곳'. 혐오 시설이었던 오폐수처리장을 공원으로 바꾸고, 낡은 예식장을 핫플레이스로 바꾼 그들의 안목이 아시아 전체가 주목하는 모델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을의 저력은 제가 방문했던 '제2회 모모해변가요제 & 세화야시장'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축제장은 거대하거나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너무 크지 않은 그 공간감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낮에 골목에서 만났던 그 '히든 챔피언' 상점들이 이곳에 모두 나와 부스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제2회 모모해변가요제 & 세화야시장

과거 마케팅 대행사 인턴 시절, 행사를 기획하며 잘 아는 지인의 가게를 섭외하려다 거절당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어쩌다 하는 일회성 행사에 참여하면 식당의 이미지만 소모되고, 무엇보다 평소 단골 장사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세화는 달랐습니다. 자신만의 철학으로 가게를 운영하던 그 사장님들이 기꺼이 야시장 부스로 나온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참가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내 가게'보다 '우리 마을'의 축제가 더 중요하다는 공동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진심은 가격표에서도 드러났습니다. 관광지 축제라면 으레 걱정하게 되는 바가지요금은 이곳에선 남의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야시장의 한 빵집 부스에서 가격을 보니 3,500원으로 보입니다. 저는 당연히 카나페 하나에 3,500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은 웃으며 카나페 두 개를 담아주셨습니다. 수북하게 담아준 떡볶이 역시 단돈 5천 원이었습니다.

3500원의 까나페

정직하고 착한 가격에 퀄리티 높은 음식을 내놓는 상인들, 그리고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즐거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민들의 모습에서 저는 오랜만에 박제된 행사가 아닌 살아있는 지역 축제의 펄떡거리는 생명력을 느꼈습니다.


이곳은 방문객에게 억지스러운 친절이나 과도한 호객을 하지 않습니다. '질그랭이(지긋이)'라는 제주 방언처럼, 그저 묵묵히 자신의 공간을 가꾸고 자신의 취향을 알아봐 주는 손님들과 조용히 눈을 맞춥니다.

세화의 로컬 브랜딩은 바로 이들, '히든 챔피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자본의 논리로 똑같이 복제된 거리가 아니라, 각자의 색깔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만든 다양성의 생태계. 투박한 농촌 마을이라는 캔버스 위에, 개성 있는 소상공인들과 깨어있는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씩 그려낸 그림이 모여 세화라는 거대한 갤러리를 완성한 셈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28년 차 도민에게조차 세화는 더할 나위 없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토끼섬의 물길을 찾아왔듯, 누군가는 이곳 상인들이 만들어낸 맛길을, 또 누군가는 멋길을 찾아옵니다.


일주일간의 휴가가 끝나갈 무렵, 저는 이 조용한 마을을 지탱하는 진짜 힘을 실감했습니다. 대규모 자본이나 거창한 슬로건 없이도, 자신만의 업(業)을 지키는 상인들과 주민들의 뚝심이 마을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낭만은 보편적이지만, 취향은 구체적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취향을 지켜가는 사람들이야말로 로컬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진짜 주인공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바다를 건너 육지의 끝, 혹은 세상의 시작으로 향합니다. 우리에겐 그저 '공항'으로만 기억되는 섬, 인천 영종도입니다. 비행기 소리에 묻혀 우리가 미처 듣지 못했던 영종도의 진짜 얼굴을 찾아 떠납니다.


히치하이커 드림

작가의 이전글히치하이커의 지방 지도 VOL.3 <봉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