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안녕한, 가』 중에서

by 세잎

여름에는 그늘 아래에서 맞는 바람을 사랑한다.

주어진 계절을 오롯이 느끼려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콧등과 인중에 맺히는 땀을 스윽 닦아내고 다시 눈을 감는다.

이따금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멈췄다 하며 애간장을 태운다.


- 『안녕한, 가』 중에서



며칠 전에 핸드폰 진동이 울리면서 "안전 안내 문자"가 왔어.

현재 폭염특보 발효 중. 태양 볕, 고온 다습한 곳에 오래 머무를 경우 위험하니 물은 자주 마시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장시간 야외활동은 자제해 주세요.


30도가 넘는 온도로 폭염인 날씨였던 거야. 그냥 서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고 어디라도 빨리 실내를 들어가야 할 것만 같은 날씨였지. 기분 탓인지, 내리쬐는 태양의 강한 햇빛 때문인지 괜스레 눈살이 찌푸려졌어.

양산도 없이 나와서 급하게 손으로 머리 위의 햇빛을 가리면서 공원을 지나가는데 굉장히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어. 짜증 낼 기운조차 없을 뜨거운 날씨였는데 그 날씨에 공원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거야.


무슨 일인가 봤더니 공원 한가운데 커다란 분수대에서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분수 물줄기를 맞으며 놀고 있었던 거야. 오늘 하루 내가 마주칠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짜증만 가득할 것 같은 날씨였는데 그때 그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폭염특보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인 듯했어.


기쁨의 소리를 지르며 분수 물줄기를 맞으며 노는 아이들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거 같았지.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뭐가 대수인가. 내가 즐기면 그만이지. 오히려 좋아!'


그 어린아이들은 뜨거운 여름날이 주는 불쾌함과 불편함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여름날을 만끽하고 있었던 듯했어. 그 아이들을 보면서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계절을 만끽하던 때가 언제였나 생각해 보게 됐지.





가끔은 분수대에서 만난 아이들처럼 순수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즐길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살다 보면 참 많은 날들, 참 많은 순간에 얼굴이 찌푸려지고 짜증이 치솟을 수 있잖아.


가령 여름날의 폭염특보처럼 말이야.


엄마는 네가 만나게 될 수많은 여름날들을 기꺼이 즐기면서 지나갔으면 좋겠어. 아니, 즐기진 못하더라도 그냥 땀 한번 스윽 닦아내는 여유라도 있길 바라. 물론 짜증이 나겠지, 불쾌하겠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이 너의 불쾌지수를 높여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더운 날씨 덕분에 엄마는 얼음 가득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그토록 맛있는 건지 비로소 알게 됐단다. 그전에 커피는 그저 쓰디쓴 한약 같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우리가 물리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계절, 날씨, 혹은 상황이라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보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말해보는 거야.

오히려 좋아.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생각지 못한 여름날의 분수, 여름날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상황이 너에게 주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어도 뭐 어때. 땀 한번 스윽 닦아내면 그만이지 뭐.




『안녕한, 가』 저자가 말한 "있는 그대로"라는 말 앞에는 "오롯이 느끼려면."이라는 말이 있어. '오롯이'. 또 다른 말로 '온전하게'라고도 하지.


뜨거운 여름도 뜨거운 여름 그 자체로, 추운 겨울도 추운 겨울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바라보고 느껴봐. 네가 만나게 될 무수히 많은 반길 수 없는 변수들과 상황들도 그냥 그 자체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온전히 바라봐보렴.

그럼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거처럼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 할지라도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온전히 느끼며 바라보지 못했다면 지나쳤을 그런 바람 말이야.




이 책에 이런 구절도 있었는데 한번 읽어보렴.

지나가다 발길을 멈추게 되는 장면이 있다. 별것 아니지만 마음을 뺏기는 순간.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과 그늘 아래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나뭇가지가 살랑거리는 풍경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엄마가 한창 임용고시 공부 때문에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 적이 있었어. 도서관 문 여는 시간에 들어가서 문 닫는 시간에 나왔었지. 불확실한 미래, 할 수 있는 건 공부뿐이던 그때는 즐길 낙도, 쉬어갈 여유도 없었단다.


그날도 그저 다른 날들과 똑같은 하루였어. 하루종일 공부만 하던 날이었지. 저녁식사를 하고 밀려오는 졸음과 사투를 벌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잠시 밖을 나와 도서관 주변 공원을 걸었어. 그런데 그때, 살랑이던 바람과 어스름한 저녁 공기가 너무 시원하고 좋은 거야. 잠을 깨워주는 것 이상으로 하루의 피로를 싹 잊게 만들 만큼 내 기분까지 좋아지게 만들었어.


정말 별거 아닌 건데, 단지 도서관 문을 열자마자 코끝을 스쳐 지나가던 바람일 뿐이었는데, 한참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바람, 그날의 저녁 공기를 잊을 수 없단다.


KakaoTalk_20231016_222918676.png 잠을 이기기 위해 잠시 도서관 밖을 나와 산책하던 나




잠깐 멈춰서 네가 서있는 그곳의 날씨를, 그곳의 온도를, 그곳의 공기를 그냥 느껴봐 보렴. 그러면 생각지 못하게 너의 기분을 좋아지게 할 무언가를, 어떠한 순간을 만날 수도 있단다. 그것이 너를 비추는 가로등의 불빛이 될 수도,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될 수도, 지나가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될 수도 있겠지. 어느 것 하나든 그 무언가가 너의 기분을 따스하게 풀어줄 거야.


뜨거운 여름날, 어린아이들이 우연히 마주친 분수대 위의 시원한 물줄기처럼 말이야.


alessandro-fazari-86jG5-md9N0-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alessandro faz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