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음악이 떠나가버렸다
저녁 연습을 위해 시설로 모인 날, 아이들 사이에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오고 가며 짧은 인사만 나눴던 시설 야간 교사였다. 워낙 시설 분위기가 음악 중심이어서 그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어떻게 가까워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야간 교사와 난 어느 순간 가장 가까운 음악 친구가 되어 있었다.
난 꽃게잡이 어선의 딸이었고 야간 교사는 염소농장의 아들이었다. 우린 서로를 꽃게와 염소라고 부르며 밤낮 없이 음악 얘기를 나눴다. 염소는 음악을 전공한 건 아니었지만 열정이 남달랐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마추어 음악 모임에 나가고 무대에도 올랐다.
난 일을 하면서도 음악을 함께 하는 그의 일상이 부러웠다. 나도 제자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지만, 염소의 무대와 내가 서는 무대는 달랐다. 우리에겐 ‘자의’에서 차이가 있었다. 염소는 자신의 의지로 시작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고, 난 시설 선생님의 의지로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막 사회 초년생이 된 제자들은 물론 갓 취직한 나도 주머니 사정이 팍팍했다. 우리는 지자체 청년단체지원사업으로 운영비를 마련했다. 사업에 선정되기 위한 면접, 회계, 사업 보고서 작성부터 운영에 필요한 서류 작업까지 모든 일은 내가 도맡아야 했다. 제자들과 함께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어서 좋기도 했지만, 때론 막중한 책임감이 날 짓눌렀다. 내가 음악을 하러 온 건지, 서류를 하러 온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난 시간이 갈수록 오롯이 음악을 즐기고 싶단 마음이 깊어졌다.
염소와 나는 마침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집 가는 지하철에서 염소가 자신이 만든 노래라며 기타 연주를 들려줬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피아노로 치는 음들이 떠올랐다. 염소에게 자지 말고 기다리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염소의 기타 연주에 맞춰 피아노를 쳤다. 꽤 괜찮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녹음해 염소에게 보내니 온갖 호들갑과 함께 “진짜 괜찮잖아? 내 음악이 이렇게 멋있어져도 되는 거야?”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깊은 곳에서 ‘이렇게 음악하는 거 너무 재밌는데?’라는 마음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직장인 된 뒤 모처럼 느낀 감정이었다.
염소와 난 새벽까지 ‘영감님이 오셨다’며 마구 떠오르는 영감을 나눴다. 함께 만든 음악에 맞춰 말도 안 되는 가사를 붙이기도 했다. 우리는 밤새 깔깔거리며 곡을 만들었다. 염소가 스케치한 가사를 기타 반주에 맞춰 흥얼거리며 녹음한 걸 보내면, 난 그와 어울리게 피아노 반주를 만들어 녹음해 보내는 식이었다. 장난처럼 주고 받던 영감의 조각들은 어느샌가 노래가 되어있었다. 제목은 ‘게장을 주세요’. 게 알러지가 심한 염소농장 아들이 부모님께 염소 고기 말고 게장이 먹고 싶다고 말하는, 어이없지만 상큼한 노래였다.
우리의 노래가 완성될 무렵 염소는 같이 자취 하고 있는 동생을 소개했다. 동생도 작곡을 하는 뮤지션이었다. 염소가 보낸 사진 속에서 동생은 바지 위로 새빨간 속옷이 올라와 있었다. 이 동생에게 팬티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곧이어 염소와 같이 음악활동 하던 또 다른 동생도 합류했다. 이 친구는 음미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소가 음흉해서 지어준 별명이었다. 우리의 별명은 심상치 않았지만 의도는 순수했기에 ‘선량한 변태들’이란 이름으로 팀을 결성했다.
선량한 변태들은 늦은 밤이면 염소네 반지하 자취방에 모여들곤 했다. 방범창 밖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발끝을 보면서 우린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는 영감으로 이어졌다. 커플들의 발걸음을 보고 사랑 노래를 썼고 퇴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보곤 직장인을 위로하는 노래를 썼다. 멤버들과 함께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을 노래로 만들며 내 일상도 의미 있는 하루들로 채워졌다.
브라스 밴드와 선량한 변태들의 멤버들은 서너 살 남짓 차이 나는 또래였다. 나를 구심점으로 두 팀은 자연스럽게 섞였다. 시설 근처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고, 서로의 공연도 보러 가며 친해졌다. 그러다가 청년 문화를 선도한다는 뜻인 ‘선도부’란 이름으로 두 밴드가 힘을 합쳤다. 선도부는 직접 기획한 청년 축제부터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까지 안 서는 무대가 없었다.
선도부를 하던 시절은 평생 해왔던 클래식 음악에서 가장 벗어난 순간이었다. 홀로 골방에 박히는 시간도 없었고 무대에서 혼자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도 없었다. 틀도 형식도 없이 활동하던 선도부는 나에게 음악적 자유를 줬다. 우린 아무렇지 않았던 일상에서 의미를 찾아 기타로, 노래로, 악기로 음악을 덧붙였고 세상에 내보였다. 우리가 만든 노래를 꺼낼 수록 사람들은 열광했다.
난 내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 편이다. 가족에게도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도 마음 깊이 숨겨놓은 내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 않는다. 그런데 클래식을 치다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마음을 사람들 앞에서 숨김 없이 꺼내놓을 수 있었다. 신나게 들떠 있을 땐 화려한 곡을, 사람들 앞에서 뽐내고 싶은 날이면 어려운 곡을, 울적한 마음이 나를 지배할 땐 무겁고 우울한 곡을 쳤다. 클래식 피아노는 내 마음에 이런 저런 마음이 고여있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하지만 클래식을 내려놓은 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온갖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갔다.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는 나, 슬픔이 차올라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나, 어두운 벽만 바라보고 있는 나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약간은 과장해서 웃는 듯 들떠있는 상태를 유지했다. 그게 최선이었다.
그런 와중에 제자들과, 친구들과 함께한 음악은 클래식 피아노를 그만둔 뒤 생긴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줬다. 새로운 음악에 해방과 자유를 느꼈고, 음악을 아예 안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안도감도 안겨주었다. 그 해방과 자유와 안도감은 클래식을 향한 내 그리움을 잠시 눌러준 고마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모든 게 끝나버렸다. 코로나19는 전 세계를 휩쓸었고 우리는 연습도 공연도 할 수 없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며 제자들과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내가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음악도 멀리 떠나버렸다. 이제 나는 즐거우면 즐겁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K-직장인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