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의 침범이 시작된 건 베란다였다.

그래. 결국 '함께'가 중요하다.


금방 이겨낼 줄 알았던 공황장애가 계속됐다. 상사는 그런 날 보고 “계속 그렇게 있을 거야? 그정도 가지고 이러면, 이쪽 일 계속 못 해”라고 했다. 나는 매일 술을 마셨다. 빨리 스위치를 꺼버리는 게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날도 퇴근하고 집 밑에 있는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집어 먹을 안주와 술을 사 들고 집으로 올라갔다. ‘빨리 술 마시고 취한 채 잠들어야지.’하고 생각하다 집 앞에 도착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찰나, 문이 먼저 열렸다.


“쮸리 왔어?”하며 남자친구가 열어준 문 너머로 보글보글 끓는 국이 보였다.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불꽃이 튀겼다.


나는 화를 냈다.


“내가 오지 말랬잖아!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잖아! 왜 또 멋대로 오는데!!”


만난 지 1년 된 남자친구는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은 나를 가장 먼저 알아챘다. 매일 퇴근하고 혼자 술 마시다 취해 잠드는 날이 늘어나니 당연하지. 남자친구는 처음엔 조심스러워하며 내가 스스로 일어나길 기다려줬다. 하지만 처음으로 술에 취한 채 전화해 힘들다며 엉엉 운 뒤로는 남자친구는 나를 돌보기 시작했다.


소설 작가가 되겠다며 일을 그만뒀던 남자친구는 내가 출근해 있는 동안 온 집안을 뒤집어놨다.


베란다에 쌓여있던 쓰레기들은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싹 사라져있었고 음식 찌꺼기가 눌어붙은 그릇들은 제 색깔을 찾고 가지런히 찬장에 정리되어 있었다.


집안이 깔끔해지면 내 마음은 두 배로 뒤집어졌다. 만난 지 1년만에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나를 계속 보여주는 건 힘든 일이었다. 남자친구가 이런 나를 계속 좋아해 줄지, 어디까지 받아들여 줄지 의심과 걱정부터 들었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무작정 집을 찾을 때마다 화부터 냈다.


남자친구는 당황한 기색 없이 내 손에 들린 가방과 술을 받아 들고 가만히 내 등을 토닥였다. 등에 닿는 손길에 잔뜩 돋아있던 가시가 가라앉았다. 신발을 벗고 들어와 보니 식탁엔 계란후라이, 스팸, 김, 김치로 소박한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얼른 옷부터 갈아입고 와. 밥 같이 먹자.”


남자친구는 밥 먹는 내내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힘든 일은 없었는지, 점심은 잘 챙겨 먹었는지, 기분은 어땠는지,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물어봤다. 어제 전화로 물어봤으면서 또 처음인 것 마냥 물어본다.


난 별로 달라진 것 없는 내 일상을 늘어놨다. 남자친구는 “그랬구나. 그래서?” 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남자친구는 그때 내가 유일하게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장 가까운, 내 편인 사람에게 짜증부터 냈던 게 후회 됐다. 내일이면 또 짜증 내겠지만 지금의 후회는 진심이었다. 남자친구는 설거지까지 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남자친구의 침범이 시작된 건 베란다였다. 베란다에는 우리집 강아지, 고양이 화장실이 있었다. 공황장애가 찾아온 뒤로 난 애들이 배변하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로만 겨우 치웠다. 베란다 바닥에 말라 붙은 강아지 오줌을 닦는 일과 고양이 모래 전체 갈이를 미루고 미루다 보니 베란다 근처로만 가도 지린내가 진동했다. 그마저도 적응해 버려서 슬슬 냄새가 느껴지지 않으려던 때, 퇴근하고 집에 오니 지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


베란다로 가보니 깨끗하게 물청소가 되어 있었다. 강아지, 고양이 화장실도 얼마나 벅벅 닦았는지 찌든 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수치스러웠다. 10년을 같이 산 강아지, 고양이도 돌보지 못하는 나라니. 난 자책하기도 전에 화부터 치밀어 올랐다. 남자친구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다음은 거실이었다. 냉장고 안엔 언제 넣어놨는지 기억도 안 나는 반찬들이 썩은 채 들어있었고 거실 바닥엔 라면 봉지, 다 마신 물병,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식탁 위에도 쓰레기들이 나뒹굴긴 마찬가지였다. 쓰레기가 없던 곳은 고양이, 강아지 밥그릇 주변뿐이었다. 평소처럼 안주와 술을 사 들고 집에 와보니 거실이 멀끔했다. 쓰레기는 온데간데 없고 번뜩번뜩 닦인 깨끗한 식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반찬 가게에서 사온 새 반찬과 유통기한이 넉넉하게 남은 계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커피 우유가 있었다. 또 침범당했다. 이번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바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집 건들지 말랬잖아. 언젠간 내가 혼자 하겠다고 했는데 왜 자꾸 건드는데! 난 싫다고! 내버려두라고!!!”


날이 선 채 마구 쏘아붙이던 내가 제풀에 지쳐 잠시 잠잠해지자, 남자친구가 입을 뗐다.


“쮸리… 난 쮸리가 집에서만이라도 마음이 편안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한 거야.”


덤덤하게 말하는 남자친구 목소리에 나에 대한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난 없는 자존심을 끌어올려다가 남자친구 앞에 내세웠다.


“나도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좀 건들지 마.”


짧은 통화를 마치고 거실을 둘러봤다. 얼마 만에 보는 거실 바닥인지… 손으로 바닥을 쓸어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튀어 나왔다. 남자친구가 어떤 마음으로 이 암흑 같은 집을 치웠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내가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었겠지?


그날도 여느 때처럼 집에 돌아와 옷을 아무 데나 던져놓고 식탁에 앉았다. 어렸을 때 보던 TV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술을 마셨다. 남자친구가 정리해 줬던 식탁은 다시 어수선해졌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정신없이 취해버린 나는 씻지도 않고 침대로 가 기절하듯 누웠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출근길에 누가 뒤에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차로 박아줬으면’ 하는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그 순간 낯선 촉감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불을 켜보니 고양이 털이 잔뜩 박혀있던 베개 커버가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깔개도 이불도 다 바뀌어 있었다. ‘아.. 또 침범이야..’ 하지만 따져들 힘은 없었다. 술은 노곤하게 취했고 바뀐 베개 촉감이 나쁘지도 않았다. 불 끄고 그대로 누워 뚱뚱한 고양이 지니를 만지며 골골거리는 소리를 기분 좋게 듣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여러 번의 침범으로 부족했는지 남자친구는 내 집에 아예 들어와 살겠다고 했다. ‘혼자가 좋아, 내 시간과 내 공간을 침범받는 게 싫어’라고 온갖 이유를 들며 거절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사한 나를 따라와 내 집 5분 거리에 자취방을 잡았던 사람이다. 쉽게 포기할 리가 없었다. 남자친구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나 글 쓰려고 일도 그만뒀잖아. 이 돈으론 갈 수 있는 곳이 없어. 게다가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면, 네로는 다시 마당 고양이가 되어야 하는걸?”


네로는 남자친구 부모님 집 마당에서 자유롭게 살던 대장 고양이었다. 나이가 들며 네로는 지독한 병에 걸렸고 자신의 영역을 어린 고양이들에게 내주고선 몸을 숨겼다. 남자친구는 아픈 네로를 자취방으로 데려와 없는 돈을 끌어 모아 동물병원에 데려 다니며 살려냈다.


난 집으로 데려온 고양이는 절대 밖으로 보내선 안 된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다. 고단한 길 생활에 금방 죽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기껏 살려낸 네로를 다시 마당에 내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네로를 다시 마당으로 보낼 순 없어.”


남자친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맞아. 나도 네로를 마당으로 보내기 싫어. 쮸리의 일상을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러니까 같이 살자”


남자친구와 전화를 끝낸 후 집을 둘러봤다. 큰 방이고 작은 방이고 남자친구가 소설 쓸 때 쓰던 노트북조차 들여둘 자리가 없었다. 뭐 지가 들어온다고 했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남자친구는 내가 없는 집을 당당하게 드나들며 집 구조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더니 다음 주에 짐을 옮겨야 하니까 자신이 살기로 한 내 옷 방을 이번 주 안에 정리하겠다고 통보했다. 일하랴, 아무렇지 않은 척하랴 모든 힘이 다 빠진 채 퇴근하는데 그런 내게 옷을 정리할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막막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남자친구가 옷방 구석에 옷을 몰아놓고 가구 방향을 옮기고 있었다. 옷정리를 할 생각에 집에서마저 숨이 턱 막혀버렸다. 하지만 이미 남자친구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해버려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난 옆에 앉아 옷을 흔들어 먼지를 털어내고 거울을 보며 하나하나 몸에 대봤다. 유행이 지났지만 내 눈에 아직 예쁜 옷들도 있었고 엉망이 된 생활에 살이 10kg 가까이 쪄버려 더 이상 맞지 않는 옷들도 있었다. ‘살을 다시 빼고 입으면 괜찮지 않을까?’ 하며 아쉬워하던 나를 봤는지 남자친구는 “과감히 버려! 나중에 사면 되지!” 하며 소리 쳤다. 그래. 다시 사면 되지. 난 입을 옷들만 남기고 나머진 커다란 봉투에 거침없이 담았다.


며칠 동안 옷을 담다 보니 옷방 바닥이 훤히 드러났다. 거실 바닥을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됐을 때처럼 마음이 이상했다. 이상해진 마음을 안고 고개를 돌려보니 신디사이저 피아노 위에 있는 마지막 옷더미가 눈에 보였다. ‘저 옷들을 치우면 피아노가 나타나겠지. 옷 정리를 다 하면 피아노를 잠시 쳐볼까?’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얼른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나를 배신한 피아노가 뭐가 좋다고 다시 쳐? 쳐다도 안 볼 거야’


피아노 위에 있던 옷더미를 정리한 뒤, 구석에서 안 쓰던 담요를 찾아 피아노를 덮어 가려버렸다.




옷방이 깔끔하게 정리된 후 남자친구는 옷 몇 벌, 노트북, 책상, 단출한 짐을 들고 이사 왔다. 남자친구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내 일상을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난 평소처럼 편의점 안주와 술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술 빨리 마시고 잔뜩 취한 채 잠 들어야지’ 하던 각오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무너졌다. 문을 여는 순간 갓 지은 밥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신발을 벗으며 안을 들여다보니 식탁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돼지고기 김치찜과 김이 놓여있었다.


“내 새꾸, 오늘도 힘들었지? 얼른 옷만 갈아입고 와. 밥 먹자.”


난 맛있는 저녁 냄새에 굳게 잠겨있던 마음의 빗장이 풀린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 괜히 툴툴거렸다.


“나 퇴근하면 혼자 있게 냅두라니까. 난 술 마실 거라고”


남자친구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쮸리가 좋아하는 돼지김치찜에다 술을 마시면 더 맛있겠지요~”


남자친구의 맑은 모습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옷을 얼른 갈아입고 나와 남자친구가 해준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마셨다. 도란도란 얘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있었다. 이야기하느라 술도 많이 못 마셔 취하지도 않았는데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대충 씻고 침대에 눕자 남자친구가 따라 들어와 옆에 누웠다. 그리고 가만히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애정 어린 손길에 난 모처럼 편안해진 마음으로 깊이 잠들었다.


내 집은 ‘우리 집’이 되었고, 남자친구는 어느새 나의 집사람이 되었다.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는 이유로 집사람이라고 부른 건 아니었다. 내가 남자친구를 집사람이라고 부른 이유는 내가 밖에서 치열하게 버텨내며 하루를 보내다 집으로 돌아오면, 진심을 다해 나를 보듬어주고 챙겨주고 토닥여줬기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집에서만큼은 편안하게, 사람답게 지낼 수 있도록 내 곁을 지켜줬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오랜만에 술을 사지 않고 집에 올라갔다. 집사람은 내 발자국 소리에 먼저 문을 열어 날 반겼고 식탁엔 역시 맛있는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벗어놓은 옷을 정리하려고 집사람 방에 들어가니 책상 옆으로 신디사이저 피아노가 꺼내져 있었다. 건반 사이사이 내려앉아 있던 먼지도 보이지 않았다. 피아노가 반갑기도 하면서 내 허락 없이 피아노를 꺼낸 집사람에게 짜증부터 났다.


“이건 왜 꺼냈어? 일부러 구석에 박아둔 건데.”


집사람의 입 밖으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쮸리가 지난번에 술 먹다가 말했잖아. 피아노 치고 싶다고. 그래서 꺼내둔 거야. 기억 안 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일 술에 취해 있었으니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내가 피아노를 치고 싶어 했다고?’


기억을 더듬느라 눈알을 굴리는 내게 집사람이 말을 이었다.


“쮸리 피아노 되게 치고 싶어 했어. 울기까지 했는걸? 그리고 내 생각에 쮸리가 지금처럼 매일 같이 술 마시는 것보단 피아노 치는 게 건강에 좀 더 나을 것 같기도 했어. 쮸리 정신과 약도 매일 먹고 있잖아. 근데 약이랑 술을 같이 먹는 게 속상했어. 우리 쮸리 건강 상하면 안 되잖아.”


처음이었다. 우울과 공황장애가 찾아온 뒤, 내가 술을 매일 마시든, 잔뜩 취해 꼬장을 부리든 아무 말 없던 집사람이었다. 진심 어린 걱정에 술을 줄여봐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근데 내가 피아노를 치고 싶어 했다고? 울기까지 했다고? 생각을 곱씹어 보다 술과 함께 흘려보냈던 기억 속에 잔뜩 취해 울면서 피아노를 치는 내가 떠올랐다.


‘아... 나 피아노 치고 싶어했구나...’


난 곧바로 신디사이저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에 손을 올려보았다. 날 위로해 주지 못한다며, 배신자라며 피아노를 향해 소리쳤던 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엉망이 된 내 손가락을 탓하기보단 피아노를 탓 하는 게 그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살기 위해서 했던 유일한 발버둥이었다는 걸.


피아노 앞에 앉은 나에게 집사람이 피아노를 쳐보라고 전원을 켜줬다. 좋아하던 베토벤 소나타 악보를 펼쳤다. 엉망진창인 손가락이 들키지 않을 법한 곡을 골라서 연주했다. 하지만 피아노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고 손가락은 여전히 멍청한 손놀림을 이어갔다. 건반은 휴지 한 장보다 가벼웠고, 감동을 줬던 내장 음원 소리는 싸구려 같아 듣기도 싫었다. 난 전원을 끄고 담요로 피아노를 다시 가려버렸다.




키우던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줄줄이 아프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병원비 몇백만 원이 카드값으로 쌓였다. 난 카드값을 감당하기 어려워,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당근에 팔아대기 시작했다. 신디사이저 피아노도 팔아버렸다. 피아노를 팔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더 이상 미련 가질 것도 없었다. 난 매일 같이 마시던 술을 끊고 강아지와 고양이들을 돌봤다.


아프던 강아지와 고양이들 중 몇은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몇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나의 우울과 공황장애가 회복될 틈도 없이 펫로스로 마음이 연이어 무너졌다. 아픈 강아지와 고양이를 돌보느라 잠시 마시지 않던 술도 이때부터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1년쯤 지났을 무렵, 여느 때처럼 술을 마시고 있는 나에게, 집사람이 말을 툭 던졌다.


“쮸리, 집에서 거리가 좀 있긴 한데, 동네에 피아노 연습실이 있더라?”


집사람의 말을 듣고 무덤덤하게 스마트폰으로 연습실을 찾아봤다. 찾는 시늉만 하면, 술 마시면서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이트 속 연습실 사진은 어렸을 때 다니던 피아노 학원과 비슷했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었다.


다음 날, 편의점에서 술을 고르던 중 집사람이 말했던 동네 피아노 연습실이 떠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술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을 텐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그냥 한 번 가볼까?’하는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난 술을 내려놓고 곧바로 피아노 연습실을 예약했다. 집에서 악보를 챙겨 달려간 연습실엔 사진에서처럼 좁은 피아노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두 시간뿐이었지만 그 골방이, 조율도 안 된 그 피아노가 너무 좋았다. 마치 피아노만 치던 어린 기억 속으로 뛰어 들어간 것 같았다. 손끝에 무게가 느껴지는 나무 건반이 닿을 때마다 그토록 막히던 숨이 쉬어졌고, 엉망이 된 손가락마저 그 순간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커다랗게 구멍 나 있던 내 마음이 채워지는 게 느껴졌다. 손끝을 따라 한 음 한 음 흐르는 멜로디에 마음이 벅차올랐고, 엉망이 된 손가락이 부분 연습으로 다시 생명을 찾고 움직이게 되니 나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마저 생겼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사람에게 피아노 치는 게 얼마나 재밌었는지, 얼마나 마음이 뭉클했는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집사람은 내 이야기를 다 듣고선 ‘잘했어. 내일 또 가자’며 등을 토닥여줬다.


하지만 피아노를 잠깐 치며 느꼈던,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는 부푼 기대는 하루도 되지 않아 사라졌다. 다음 날이 되자 난 그저 하루를 무사히 버텨내기 바빴다. 난 월세도 내야 했고 남은 고양이들도 지켜야 했다. “계속 이러면 이쪽 일 오래 못 해”라는 상사의 말에 쫓기듯 일을 그만두게 될까 봐 난 억지로 밝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어설픈 연기를 해댔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선 낮에 들었던 말들을 곱씹었다. 내 의지가 이니었다. 공황장애 전엔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말들이 뾰족한 창을 든 유령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난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귓가를 털어 내다가 이내 끔찍한 상상을 해댔다. ‘내일 출근길에 주황 불로 바뀌면 무조건 멈춰야지. 그러면 커다란 덤프트럭이 제 속도를 못 이기고 내 차를 쳐버리고 말 거야. 그럼 끝이 나겠지?’하는 비겁하고 무책임한 상상.


하루 만에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난 다시 매일 같이 술을 찾았고 가끔 피아노가 정말 치고 싶어 못 참을 지경이 돼야 연습실에 한 번씩 갈 뿐이었다.


그랬던 내게 집사람이 뜬금없이 “쮸리, 이 피아노 어때?”하며 당근마켓 링크를 보냈다. 링크 속에는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의 낡은 디지털 피아노가 있었다. 그 피아노는 내 마음을 마구 뒤흔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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