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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분의 삼 Apr 12. 2018

'비' 정규직에 관하여.

너무나도 잔인한 그 한 글자에 대해.


엄마는 계약 기간 3년을 채우고 그 회사를 나왔다.
더 일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게 '비'정규직이라고 했다.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다니던 엄마는 결혼 후 나를 가지면서 퇴사했다.

연년생 아이 둘을 낳고 학교에 혼자 걸어갈 수 있을 때쯤 까지 길러놓고 나니, 엄마는 흔히 말하는 '경력 단절 여성'이 되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20년쯤 전인 그 시절에는 더 그랬다.

경력 단절 여성을 정규직으로 채용해주는 회사는 많지 않았다.

엄마는 그렇게 '비'정규직이 되었다.


그때 나는 겨우 여덟 아홉 살쯤 되어, 세상 물정 같은 것은 몰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조숙한 어린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다음에 커서 꼭 정규직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그렇게 말했거든. '비'정규직은 너무 서럽다고.

엄마는 계약 기간 3년을 채우고 그 회사를 나왔다.
더 일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게 '비'정규직이라고 했다.






사회 생활을 시작한 강남 한복판의 고층 빌딩.


그건 나의 잘못도, 그들의 잘못도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정규직이었고, 나는 비정규직이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콩만 했던 나는 어른이 되었고,  첫 사회생활을 글로벌 IT 회사의 인턴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비'정규직이었다.

멋진 빌딩 외관에 커다란 사무실, 서울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사내 식당.

그곳에서 나는 스스로가 꼭 유령 같다고 느꼈다.

분명 나는 여기 존재하는데, 내 발은 땅에 닿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분명 그 조직에 속해있었지만, 사람들은 나를 외부인으로 대했다.


비정규직의 안 좋은 점을 꼽자면 셀 수도 없다.

급여도 적고 여러 복지 혜택도 받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건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분위기다.

그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발이 땅에 닿지 않았던, 그 이상하고 불안했던  분위기.


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나를 소외시켰다.

하지만 그건 나의 잘못도, 그들의 잘못도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정규직이었고, 나는 비정규직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모든 분위기를 당연하게 여기려고 노력했다.

나는 정규직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어. 그렇게.

그러지 않으면 내가 어딘가 모자르고 부족한 사람인것 처럼 느껴져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정말로 서러웠다.

엄마가 말했듯, 정말 정말로 서러웠다. '비'정규직은 그런 거였다.






또 시간이 흘렀다.

7개월간의  장기 인턴 생활을 마치고 비로소 나는 그 서러웠던 한 글자를 떼어냈다.

20명 규모의 작은 스타트업에서의 1년을 지나, 총 인원 100명이 넘는 회사로 얼마 전 이직했다.

이곳에는 120명의 정규직 사원과, 이름부터 서러운, 20여 명의 단기계약직 사원이 있다.


내가 속한 팀에도 단기계약직 사원이 있다.

그녀를 보며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나는 정규직이고 그녀는 단기계약직인가?

(심지어 그녀의 근무 기간은 1년 반을 넘어섰다. 아마 다음 1년 동안도 그녀는 이 회사를 다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직급 앞에는 '단기'가 붙어있겠지.)

그녀는 나보다 일을 훨씬 빨리 끝내며, 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가 회사에서 받는 여러 좋은 복지들을 누리지 못하며, 상여금도 없다. 또 아침마다 하는 데일리 미팅에도 참가하지 않고, 사용하는 메일 주소도 다르다.  사내 시스템 접근 권한도 요청 해야만 부여된다. 심지어는 정규직들만 참여하는 그룹 채팅 방에도 초대되지 못한다.


분명 그녀는 내가 인턴 시절 느꼈던 그 느낌을 받고 있을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구분 지어지는 모든 순간마다 서럽고, 기분 나쁘고, 가끔은 화가 날 것이다.






소름 끼치는 사실은, 내가 이 모든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느끼고 있을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끝 모를 안도감, 때로는 우월감에 도취되고 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정규직이고, 그녀는 '비'정규직일 뿐이다.

나의 잘못도, 그녀의 잘못도 아니다.


...

정말 그렇게 말하고 끝내도 괜찮은 걸까.

정말 발 붙이고 멀쩡히 서있는 사람을 유령처럼 만드는 그 분위기 그대로 괜찮은 걸까.

초대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권리를 제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여기라고 종용하는 그 문화 그대로 괜찮은 걸까.



여전히 사무실에는 내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그 모든 상황을 몸소 겪어봤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불편함이 공존한다.

그게 '사회 생활'이라고 받아들이는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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