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ree Ways Dec 09. 2022

눈치 없는 ‘ㅂ’에 관하여

우리 지수 이야기의 외전

‘ᄇ’은 사실 아무 죄가 없습니다. 영화구경을 간다고 하니 그냥 따라나선 것이 죄라면 죄인 겠죠. 인디아나 존스 두 번째 에피소드를 기억하시나요. 상하이에서 노래하던 무희와 귀여운 꼬마와 한 패거리가 되어 인도 북부 어디에서 모험을 하는 이야기요. 지금 보면 조금 유치한 구석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재미있는 영화였거든요. 혼자라도 가고 싶었는데 친구들이 간 다고 하니 저라도 따라나섰을 겁니다.


속삭이듯이 우리 지수에게만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그만 큰소리로 영화구경을 가자고 한 제 가 잘못이지요. 우리 지수는 ‘나도 같이 가자’고 따라붙는 ‘ᄇ’을 싫다고 거절할 리가 없는 착한 친구였으니까 말이죠. 악랄한 범죄조차 ‘공소시효’란 것이 있는데 사실 ‘ᄇ’이 부지불식간에 행한 일이었으니 용서하고 말 것도 없는 일이었죠. 게다가 이게 ‘미필적 고의’였다고 해도 벌써 30년을 훌쩍 넘겨버린 이야기이니 이젠 모두 다 추억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ᄇ’은 ‘미필적 고의’를 실현에 옮길 정도로 사악한 녀석이 못 됩니다. 착한 녀석이었다니까요.


*미필적 고의란 결과가 뻔히 예상되지만 어떤 나쁜 일을 일부러 하는 경우입니다. (눈치 없게도) 여름방학 때는 우리 집(청주)에도 며칠 놀러 왔었습니다. 이 녀석을 데리고 속리산 문장대도 올라가고 청주에 사는 다른 친구들과 막걸리도 마시러 다니고 했습니다. 1학 년을 마치고 바로 군대로 가버렸는데 하필이면 우리 집 근처인 증평 교육 사단에 자대 배치를 받고 조교로 근무를 했었습니다. 휴일에 시간이 맞으면 면회도 다녀오곤 했거든요. 초코파이를 많이 먹더니 초코파이처럼 얼굴이 동그래져 있더군요. 돌이켜 보니 우리 지수와 나에게 저 지른 만행(?)에도 불구하고 꽤 친하게 지냈던 것 같군요.


졸업을 한 후에는 네팔인가 하는 곳으로 봉사활동을 간다고 하더군요. 창문을 열면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곳이라고 했었는데. 그 동네 아이들 신발도 없이 산길을 뛰어다닌다고 하더라 구요. 사람이 살면서 물이 가장 귀한 것인 줄 그때 실제로 체험했다고도 했습니다. 안나푸르나의 산동네 조차도 식수가 오염되어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몇 년 후 귀국해서도 한동안은 그곳을 잊지 못하더군요. 히말라야에서 봉사활동만 하고 오기엔 젊고 혈기왕성한 청년이었을 텐데. 어여쁜 처자라도 남겨두고 와야 했을까요.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겠군요. 왜 그렇게 안나푸르나를 그리워했는지 말입니다. 혹시 나처럼 30년이 넘은 이야기를 묻어두고 있을지 모를 노릇이잖아요. 나의 경우는 사실 묻어두었다기보다는 말할 곳이 없었던 거였지만요.


짝사랑 이야기 같은 것이 그래요. 남세스러워서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서 누구한테 한단 말입 니까. 이제 30년이나 지나버렸으니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말이죠. 설마 이 녀석도 우리 지수를 좋아했던 것은 아닐까요.


눈이 올 것 같은 날씨네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