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수의 샤기컷에 카고바지를 읽고
음악방송에서 누가봐도 전형적인 연예인은 아닌듯한 중년남자가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된 건데 그는 중년남자도 아니고 그 당시 논란의 인물이었던 싸이였다. 방송에서는 외모가 중요했는데 그게 무너진게 그때였다.
시간이 흘러 그를 만나게 된 것은 대학 축제였다. 군대를 두번가니 하는 얘기들로 자숙복무의 아이콘이 된 그가 군복무를 끝내고 나왔을 때도 대학가 축제에서 싸이는 섭외 1순위였다.
우리학교규모가 작아서 동네잔치쯤 되는 무대에 올라온 그는 (작은) 규모에 놀랐다면서도 처진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관객들을 스탠딩으로 일으켜 세우고는 소주반병을 마시고 히트곡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와 노래 사이 쉬는 시간도 없이 이어간 그는 우리와 계약한 곡들을 다 부르고는 분위기가 좋다면서 잠시 담배한대 피우고 오겠다고 하곤 무대 뒤편으로 와서 담배를 피웠다.
마침 축제 진행 관계인이었던 이유로 싸이와 함께 말도 없이 담배를 피웠고 그는 다시 앵콜 무대로 돌아가서 4~5곡을 더 부르고 무대를 마쳤던 기억이 난다.
그때 당시 축제 섭외 비용이 비슷했던 가수중엔 슈프림팀이 있었고 섭외 회의에서는 힙합이 핫하니 래퍼를 부르자는 얘기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이다.
싸이는 군복무 이후에도 넘치는 열정으로 대학가 축제를 다녔고 무한도전 가요제에 나오면서 호감도를 올려나갔다.
역설적이게도 가수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을 때 쯤 같은 이름을 가진 싸이월드 미니홈피는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나오듯이 온라인 소셜서비스의 핵심은 이성관계에 있다. 고등학교 시절 좋아하는 여학생들의 사진을 보고 남자친구는 있는지 자꾸 방명록을 남기는 경쟁자는 없는지 확인하는 용도로 시작한 싸이월드는 웃긴 사진, 남들 보여주기 힘든 흑역사들을 일촌공개로 돌려보는 유머게시판이기도 했고 일촌평을 클릭하고 또 클릭하면서 일명 파도타기를 하며 일면식 없는 남들의 사생활을 구경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전혀 나와 관련이 없지만 지인의 지인의 지인쯤 되는 그들의 게시물을 구경하다가 재밌는 것이 있으면 파도타고 왔어요 퍼가요~♡라고 댓글을 달고 게시물을 퍼가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싸이월드를 한창 즐길 무렵, 대학 교양영어 강사가 페이스북 계정 만들기를 과제로 내주었는데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었다. 활성화가 되지 않은 탓에 전부 하얀 대머리인 친구들 밖에 없었고 그렇게 잊혀졌던 페이스북이 완전히 떠오르게 된 것이 강남스타일이 뉴욕 라디오에서 송출될 때 쯤이었다.
자기 취향에 맞게 스킨을 고르고 배경음악을 정하고 다이어리 폰트를 맞추어 자기 입맛에 맞는 공간을 꾸밀 수 있어서 자기는 싸이월드에 일기를 남긴다는 그녀가 더이상 싸이월드를 하질 않고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릴 때
이젠 더이상 싸이월드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선배, 옛날 사진 보내드릴까요?'
몇달전 후배가 자기 싸이월드 사진을 저장하다가 내 사진을 구했다면서 연락해왔다. 싸이월드 서버가 폐쇄되기 전이라 사진 데이터들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며 전해준 사진들을 보고 나도 냅다 프로그램을 받아 싸이월드에 남겨진 데이터를 백업했다. 수백장은 넘을 사진들은 데이터가 손실되어있었고 겨우 살아남아 챙긴 건 몇십장 뿐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만고의 진리지만 그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어린시절에 좋아했던 KBS드라마를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보고 싶을 때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KBS에서는 데이터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좋아했던 온라인RPG게임이 서비스를 종료하고 수년뒤 회사측에 서비스 재개 가능성을 타진했을 때 그들은 서비스종료할 때 데이터를 모두 삭제했고 핵심개발자가 독일로 유학을 가서 복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싸이월드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 데이터로 올려두면 영원할 것 같던 추억저장소도 결국은 노스탤지어적인 기억으로만 남았다. 정말로 이젠 그게 실존했었냐고 물으면 애정어린 말들로 답하는 것 밖에는 증거가 남지 않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