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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현 Oct 06. 2017

여럿이 한 호흡

풍정.각(風精.刻) 일곱 번째 공연 기록

첫 만남

어쩌다 보니 3년 전부터 현대무용 공연에 간간히 참여하고 있다. 송주원 안무가를 처음 만난 것은 2014년 7월이다. 갤러리 팩토리에서 기획한 현대무용 워크숍으로 인연이 되어 그해 10월, 무용수로서 공연에 참여했다.


<풍정.각(風精.刻)>을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이름을 풀어보면 '바람의 뜻을 아로새기다'란 뜻이다. 장소 특정적(site-specific)인 무용 프로젝트인 만큼 바람은 그동안 꽤 다양한 장소에서 불어왔다. 북촌문화센터, 이태원MMMG, 서울도서관(구 서울시청), 낙원악기상가 등의 공간을 거쳐, 종로구 창성동 일대의 골목에서도 공연이 있었다. 그중 다섯 번째 시리즈는 2015년 늦가을, 독일 베를린의 마인블라우(Meinblau) 갤러리에서 진행되었다. 공연 대부분이 10~11월에 있었기 때문인지, 관객과 무용수를 맴돌던 늦가을의 잔잔한 바람이 종종 생각난다.


일곱 번째 이야기: 풍정.각 오차원에

지난 8월 중순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공연을 마쳤다. 이번에는 유독 마감이 몰려있는 주(나는 현재 미디어/콘텐츠 회사 PUBLY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에 리허설과 본 공연까지 겹쳐 몸과 마음이 괴로웠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무렵, 매 공연이 괴로웠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그런 걸 참 쉽게 잊는다.


본 공연이 임박할수록 상황은 복잡할 때가 많다. 안무가, 무용수, 음악가, 기술감독, 사진 및 영상 작가, 큐레이터, 미술관 다른 부서 등 상상하지 못한 여러 문제들이 여러 관계에서 터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괴롭고도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추억할 수 있는 걸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처음에는 이런 과정을 혼돈 또는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한번 기적을 경험하고 나니 더 적절한 단어가 떠올랐다. 바로 '협력'이다.


석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고정적인 시간과 장소에 맞춰 연습하다 보니, 연습은 어느새 공연을 준비하는 모든 사람의 습관이 되었다. 그들과 협력하면서 끈끈한 유대감이 생겼고, 공연은 차근차근 짜임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지난 석 달 동안의 기록을 시간 순으로 정리해본다.


• 5월 7일(일): 풍정.각 일곱 번째 시리즈 준비를 위한 첫 미팅.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양지앙 그룹(Yangjiang Group)의 <서예, 가장 원시적인 힘의 교류> 전시를 함께 보면서 안무가에게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 5월 13일(토): 양지앙 그룹이 한국에 방문했다. 오후 2시부터 함께 차를 마시고, 4시부터 8시까지는 전시 공간 일부에 파라핀 왁스(paraffin wax)를 붓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파라핀을 천천히 부어야만 흰 눈처럼 서서히 굳는다는 사실을 네 시간이 걸려서야 알았다. 마치 세상사 중에는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진행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것처럼.

왁스 퍼포먼스를 마치고 양지앙 그룹과 함께 단체 사진 ©손현

• 5월 19일(금): 첫 번째 워크숍. 오전 10시에 국립현대미술관 지하 1층에서 모이기로 했다. 동네에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자 맥도널드에서 부랴부랴 맥모닝 세트를 주문해 먹고 왔는데, 하필 안무가의 첫 질문이 '오늘 아침에 먹은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늘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그것이 내 몸에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쓰도록 했다. 또한 평소 자주 마시는 음료와 그것이 내 몸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노트에 적도록 했다. 이는 추후 무브먼트의 주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그 외에 두 가지 질문이 더 있었다. 요즘 관심 갖는 주제는 무엇인지? 그중 어떤 걸 손으로 쓰고 싶은지 물어봤고, 마지막으로 '먹의 연못'이라고 불리는 동그란 전시 공간 안에 지금의 마음을 담아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도록 했다. 안무가는 각자 자신에게 쓰는 편지를 세로로 써달라고 주문했다.

• 6월 2일(금): 두 번째 워크숍. 그날 아침에 먹은 음식이 우연에 의한 선택일 수 있지만, 어쩌면 각자의 생활 습관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소 밀가루 음식을 자주 먹는 나는 어쨌든 팬케이크와 버터, 해시 포테이토와 커피 등 맥모닝 세트에 들어가는 음식을 춤으로 만들어야 했다.

©송주원

• 6월 4일(일): 홍은동에 있는 서울무용센터에서도 연습을 시작했다. 각자가 상상하는 '시금치'를 소리와 동작으로 표현하는 단체 신을 만들어봤다.

홍은동에 있는 서울무용센터 ©손현

• 6월 16일(금): 첫 번째 워크숍 때의 질문을 몸동작으로 구체화시키고 안무가에게 확인받는 과정을 지속했다.


• 6월 18일(일): 이후 연습은 주로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평일)과 홍은동 서울무용센터(주말)에서 진행되었다. 18일 오전에는 내 테마인 '맥모닝'이 잘 풀리지 않아 아침 식사로 맥모닝 세트를 다시 먹어봤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내 몸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걸까? 포만감을 느끼는 순간부터 가벼운 졸음이 오는 것 같다.


• 6월 23일(금), 25일(일), 30일(금): 연습 & 연습. 다른 무용수들의 동작을 서로 따라 해 보는 등 각자 안무한 내용을 공유했다.


• 7월 1일(토): 함께 공연을 준비하는 무용수 중 성악을 전공한 친구가 있었다. 전문 무용수와 비전문 무용수 모두 바르게 소리 내는 연습을 진행하며, 화음과 불협화음을 맞춰보았다. 같은 날 오후, 50여 명의 관객을 초청해 차 마시기 행사를 진행한 양지앙 그룹은 그 시간과 공간을 통째로 박제하려는 듯, 다시 파라핀을 붓기 시작했다. 사고하는 방법과 스케일이 다르다는 면에서 그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사람은 이런 발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 7월 2일(일): 첫 번째 워크숍 때, '요즘 관심 갖는 주제'에 관한 질문이 있었다. 그때 적은 내용을 서예로 쓰는 시간을 가졌다. 그 종이를 뭉쳐 전시 공간 내 '먹의 연못'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연습.

양지앙 그룹이 직접 쓴 '풍정.각' ©손현

• 7월 7일(금), 9일(일), 14일(금), 16일(일): 각자의 솔로를 연습하는 동시에, 전문 무용수들이 안무한 듀엣 동작을 비전문 무용수끼리 변주하여 발전시켜봤다. 역으로 비전문 무용수의 테마를 전문 무용수가 발전시키는 등 무용수 간에도 동작의 교류가 서서히 진행되었다.

• 7월 23일(일): 한여름의 홍은동 연습실에서 나의 서른세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안무가가 부암동에서 손수 사온 생강 케이크를 나눠 먹고 연습했다. 이날은 무학사의 손정민이 합류하여 간단히 의상을 확인했다.


• 7월 28일(금), 29일(토), 30일(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예고편 영상을 찍기로 해서, 의상을 입고 리허설을 진행했다. 토요일 저녁에는 다 같이 미술관 근처의 오래된 중국집 연춘관에서 저녁을 먹었다. 옛날 방식으로 요리한 탕수육이 맥주와 잘 어울렸다.


• 8월 5일(토), 6일(일): 어느새 본 공연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주말 이틀 연속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연습 및 리허설 진행.

• 8월 7일(월): 퇴근하고 저녁 8시 30분부터 11시까지 미술관에서 리허설.


• 8월 9일(수): 오후 4시부터 11시까지 미술관에서 리허설. 처음으로 음악가와 함께 리허설 할 예정이었으나, 미술관의 갑작스러운 운영 문제로 2시간 정도 지연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너무 더운 날씨로 인해 야외 공연 장소가 실내 로비로 옮겨지면서, 우리 측 리허설과 음향이 겹쳤기 때문이다. 한편 나는 회사 업무 사정으로 반차를 내지 못하여 틈틈이 원격으로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 8월 11일(금): 오후 5시부터 8시 30분까지 미술관에서 리허설. 역시 반차를 내지 못하여, 리허설을 마치고 새벽 4시까지 일했다.

계속되는 리허설 ©손현

• 8월 12일(토): 드디어 본 공연. 오후 1시에 마지막 리허설을 진행하고 오후 4시와 7시 30분, 두 차례의 본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제법 많은 관객이 왔다. 자연스레 긴장했지만, 그 굳은 마음을 음악이 풀어줬다. 피아노, 비브라폰, 하모니카 등의 여러 악기가 내는 흥이 분위기를 살렸고, 우리는 리허설을 통해 어느덧 몸에 익숙해진 동작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계수정, 최창우, 존 벨(John Bell)에게도 감사드린다. 당신들의 연주가 좋았다.

(사진 ©이운식)

(사진 ©이경진/이미지 줌)


협력 역시 습관이다

풍정.각의 일곱 번째 공연은 결과적으로 무용수나 음악가 개인 특성만을 고집하는 것보다 더 큰 성과를 냈다. 그 성과는 관객 반응을 통해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공연에 참여한 무용수와 음악가들, 더불어 송주원 안무가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 스스로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고된 협력을 이끈 안무가의 리더십 덕분이다.


40여 년 동안 수천 명의 무용가와 백여 개의 회사들과 함께 일한 천재적인 안무가 트와일라 타프는 자신의 저서 「여럿이 한 호흡」에서 이렇게 말했다.

협력 역시 습관이다. 그 습관을 계발하길 바란다. 처음에는 개인의 발전보다 협력적인 프로젝트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그 감정을 극복하면 제 궤도에 오른 것이다. 상대방이 나보다 똑똑하다면? 더 심한 일벌레라면? 머리 회전이 빠르다면?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협력은 테니스 경기와 같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과 시합을 펼칠 때 비로소 실력이 향상된다. (중략)

협력은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일하는 방식을 연습하는 것이다. 협력은 근본적으로 관계에 기반한 것이다. 따라서 협력은 '더 나은 인간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함께 시작된다. (p.23)


바람의 뜻을 아로새기다. 풍정.각의 의미는 여전히 알쏭달쏭하다. 그 의미를 곱씹어보고자 양지앙 그룹의 전시 마지막 날인 8월 27일 늦은 오후, 다시 미술관을 찾았다. 2016년 10월부터 시작한 전시도 이날이 마지막이다. 미술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전시 준비를 위해 분주해 보였다. 공연을 했던 장소가 통째로 변하는 기분은 어떨까? 삶의 터전이 사라진 듯한 상실감일까 아니면 새 단장할 장소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클까? 장소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은 어쩌면 장소 특정적 무용 프로젝트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그곳이 어디든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번에는 한여름의 뜨겁고 습한 바람부터 약간의 선선함이 감도는 초가을의 건조한 바람을 매우 즐겁게 느꼈다. 한 호흡으로 협력한 동료들과 안무가 덕분이다.
(글 | 일일댄스프로젝트 손현)

공연에 와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손현

* 본 글은 <춤 웹진 Dance webzine>에 기고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2017년 9월 2일에 발행된 '〈풍정.각(風精.刻)_ 오차원에〉 작업기: 일상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몸의 오차원적 재생'의 전문은 이 곳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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