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We're Reading #115
피천득에게 '은전 한 닢'이 있듯이 저에게도 물욕(物慾)이 있습니다. 하나는 질 좋은 가죽 재킷이고 다른 하나는 정교한 해골(skull) 무늬가 들어간 실크 스카프입니다.
그나마 은전 한 닢은 화폐 가치라도 있지만, 두 물건은 정말 가성비가 형편없습니다. 가죽 재킷은 봄과 가을이 짧아지는 한국의 날씨 때문에 입을 수 있는 날이 손꼽을 정도이고, 실크 스카프 역시 보온성으로 따지면 훨씬 따뜻하고 저렴한 제품이 많습니다.
마침, 지난 추석 연휴에 팀원 중 한 명이 런던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습니다. 뭐 필요한 건 없냐는 질문에 알렉산더 맥퀸의 스카프를 떠올렸습니다. 더 철들기 전에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진을 하나 보내며 혹시라도 비슷한 게 보이면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해골에 집착하는 사람이 저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영국 출신의 작가 데미안 허스트는 해골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았고, 이 조각 작품은 5천만 파운드(당시 약 900억 원)에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최근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본 무용 작품 두 편에도 해골이 오브제로 나왔습니다.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의 신작 '위대한 조련사'의 마지막 씬에서는 인간의 해골을 책과 함께 배치하는 장면이 나와, 유한함과 덧없음을 담은 바로크 시대의 바니타스화를 연상케 했고, 아크람 칸 컴퍼니의 '언틸 더 라이언즈'에 등장한 해골은 등장인물이 욕망하는 권력과 그로 인한 죽음을 암시했습니다.
이처럼 해골은 고전 회화에서부터 현대의 여러 예술 분야, 패션까지 다양한 아이콘으로 등장합니다. 그나저나 런던을 여행 중이던 팀원으로부터 다시 메시지가 왔습니다.
어떡하죠? 백화점을 둘러봤는데 그 패턴의 스카프는 도무지 보이지 않네요.
아, 차라리 다행입니다. 제 눈앞에 또 하나의 해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추석 연휴 기간에 충치를 하나 발견했고, 치료를 받는 동안 제 해골의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300파운드에 가까운 스카프 가격이 그대로 어금니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해골 무늬 스카프는 이번 생에 저와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당장 제 해골이나 챙겨야겠습니다.
2017년 10월 20일
오후 4시에 마지막 치과 방문을 앞둔 손현 드림
* 레터 커버 이미지: Skulls and Bones Scarf 2017 F/W (Wool 51%, Silk 49%, 120cm x 120cm) ©Alexander McQueen
* 뉴스레터 전문 보기: http://bit.ly/2l05Sg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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