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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현 Jan 22. 2019

오늘의 팡팡 테니스

연습 일지, 그리고 테니스 영웅들의 격언

테니스는 괴로워

당신의 취향이 무엇인지 말해야 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만약 인스타그램을 사용한다면 그동안 습관적으로 해온 대답과는 다른 답을 들려줄 수도 있다. 바로 인스타그램의 돋보기 모양 버튼을 눌러 어떤 사진과 영상이 주로 나오는지 보여주면 된다. 누군가에게는 영국의 삽살개라 불리는 올드 잉글리시 십독의 사진이, 다른 누구에게는 눈 쌓인 센트럴파크를 배경으로 몽클레어 패딩을 입고 포즈를 취한 모델 사진이 나올 것이다. 나름의 관심사(interest)와 최근 반응(recency), 관계(relationship)에 기반한 알고리듬으로 분석했기 때문에 자신이 요즘 무엇에 빠져있는지 손쉽게, 그리고 비교적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


내 화면을 유심히 보니 온통 테니스 관련 사진과 영상이 나온다. 며칠 전 출근길에 이태원 고개를 걷다가 나도 모르게 스윙 연습을 하고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번 주말에는 앱 스토어에서 테니스 게임 하나를 다운로드해 플레이했다. 물론 처참하게 졌다. 이처럼 테니스는 잘하고 싶지만 잘하기엔 어려운 스포츠다. 그래서 더욱 괴롭다. 난 왜 이리 어렵고도 괴로운 테니스에 집착하는가.


인스타그램 화면 캡처 ©Instagram


테니스가 나와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스포츠 중에 옷과 액세서리가 가장 패셔너블하다. 마라톤용 짧은 반바지나 수영복에 비하면 테니스 복장으로 길을 걸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대표적인 예가 라코스테의 피케(piqué, 면직물) 셔츠다. 1920년대 프랑스의 전설적인 테니스 전수 르네 라코스트(René Lacoste)를 위해 따로 만든 피케 셔츠는 한때 미국 골퍼들이 유니폼처럼 입었으며 지금도 색깔별로 꾸준히 팔리는 제품 중 하나다.


다음으로, 구기 종목 중에 공의 크기가 적당해서 만만해 보였다. 정적인 스포츠 중 가장 작은 공을 다루는 골프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국에서 골프를 제대로 배우려면 비용이 많이 들고, 접근성도 낮다. 공의 크기가 가장 큰 농구는 쉬울까? 글쎄,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몇 번 시도하다가 안경이 부러진 기억만 남는다. 축구에도 딱히 소질이 있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축구는 게다가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


그나마 테니스와 탁구, 스쿼시 정도가 후보로 남았는데 마침 집에서 5분 거리에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 초등학생 때 잠깐 테니스 레슨을 받다가 그만둔 적이 있다. 다시 레슨을 받으면 금세 기본기를 익힐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어릴 적에 무척 큼지막해 보였던 코트가 이제는 작아 보였다. 혼자서 코트를 모두 커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마지막 이유였다.


©손현


그렇게 2017년 3월, 거의 20년 만에 다시 레슨을 시작했다. 레슨을 시작한 지 5분 만에 세 가지 이유가 모두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테니스 공은 예상보다 빨라 그 크기를 가늠할 여유가 없었고 땀이 주룩주룩 나면서 순식간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으며 멋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연습 일지, 그리고 건강한 멘탈을 위한 테니스 영웅들의 격언

“레슨 4개월째. 날이 더워져서 레슨 시간을 오전 7시로 앞당겼다. 포핸드, 백핸드를 비롯한 그라운드 스트로크와 발리는 전보다 나아지고 있다. 특히 백핸드 폼이 안정적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긴 두 손으로 치니까 폼이 흐트러질 수도 없다) 서브가 문제다. 머리로는 공의 타점과 각도를 알겠는데 여전히 몸이 헤매고 있다.”‬ (2017.7.6)


Arthur Ashe ©LIFE Magazine (left) / ©Russ Adams (right)


성공의 한 가지 중요한 열쇠는 자신감이다. 자신감의 중요한 열쇠는 준비다.
One important key to success is self-confidence. An important key to self-confidence is preparation.

- 아서 애시(Arthur Ashe)


“서브와 포핸드 폼을 이제 좀 알 것 같다. 최근의 테니스 중 제일 공이 잘 맞아서 기분이 좋다.” (2017.8.31)


“어쩌다 포핸드와 백핸드가 잘 맞아서 테니스를 ‘팡팡’ 쳤다고 기뻐하는 나는 한참 갈 길이 멀다. 우아한 초심자가 되기를 바란다.” (2017.11.14)


“오늘은 겨우 영하 1도. 히트텍을 입고 장갑을 꼈다. 레슨이 끝날 무렵이 되자 땀이 났다. 코치가 서브 폼을 다시 교정해줬다. 9개월 동안 헤맨 서브가 거짓말처럼 잘 들어갔다. 원인은 토스의 높이에 있었다. 이 감을 놓치면 안 될 텐데…” (2017.11.28)


Billie Jean King ©Getty Images
챔피언들은 이해할 때까지 계속 공을 친다.
Champions keep playing until they get it right.

-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


“어프로치 샷(approach shot, 네트에 접근하기 위해 치는 샷)을 연습하고 있다. 잠깐이라도 정신줄을 놓으면 여기저기 날아오는 공을 튕겨내는 데에 급급해진다. 땀이 주룩주룩 흐를 정도의 폭염 속에 집중력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호흡과 스텝이 중요한 것 같다. 일단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자세를 가다듬어야 다음에 날아오는 공을 잘 쳐낼 수 있다.” (2018.7.16)


테니스는 내게 위대한 스포츠다. 테니스를 통해 스스로를 잘 배웠다. 이곳에는 숨을 곳도, 헬멧도, 팀도 없다. 오직 나 자신만 있을 뿐이다.
Tennis has been great for me, I learned myself very well through tennis. There's no hiding out there. There is no helmet, there is no team, it's just you.

- 로저 페더러(Roger Federer)


결국, 아름다움

이런 부류의 글은 대부분 초심자로 시작해 아마추어 과정을 거쳐 어떤 대회에 출전하는 등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서사가 담겨있기 마련이다. 아쉽게도 이 글에 그런 서사는 없다. 나는 대신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선수의 아름다움을 말하며 글을 마무리 짓고 싶다. 어쩌면 배우는 즐거움보다 그의 활약을 지켜보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겠다.


미국의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2006년 뉴욕 타임스에 실은 글에서 ‘최고 수준의 스포츠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가장 잘 표현되는 무대’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페더러는 더 키가 크고, 젊고, 근력도 강한 선수들(즉, 운동 감각이 더 우월한) 사이에서 최고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이며 늘 ‘우아한’이라는 수식어를 몰고 오는 독보적 존재다.


©Elizabeth Bai/Tennis Australia


2017년 남자 프로 테니스(ATP) 파이널 개막전에서 만난 잭 소크와 로저 페더러의 경기가 생각난다. 페더러는 다섯 번이 넘는 듀스(deuce) 끝에 브레이크 포인트에서 소크의 강력한 서브를 받아내지 못해 결국 중요한 세트를 잃었다. 하지만 이후 자신의 서비스 게임을 1분여 만에 따냈다. 그의 멘탈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시 소크의 서비스 게임. 소크 역시 첫 번째 서브 실책 후 두 번째 서브에서도 자신감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타이 브레이크(tie break)에서 두 번 연속으로 실수를 범했다. 이 실책은 바로 승부를 결정짓는 매치 포인트로 이어져 페더러가 승리했다.


다른 각도에서 치고, 다른 종류의 스핀을 넣으면서 자신만의 플레이를 하는 것,
그게 정말 저를 행복하게 해 줘요.
Playing different shots, playing different angles, playing your way… it makes you happy.

- 로저 페더러


세계 정상급 선수들도 기본적인 실수를 할 때가 있다. 더 중요한 건 그 실수를 어떻게 만회하느냐에 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직 공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아함의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정말 신기하게도, 아니면 내가 여전히 초보라 그런지 몰라도, 테니스 공을 끝까지 보고 칠 때와 도중에 어림잡아 칠 때는 소리부터가 다르다. 제대로 맞은 공이 코트 저편으로 깨끗하게 날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속 먼지들도 중력을 잃고 우주 저 멀리로 가버리는 느낌이다. 비록 찰나에 그치더라도 그 순간만큼 코트는 화성 표면 또는 영화 <그래비티>의 무대가 된다.


탕. 탕. 탕. “그래, 그거예요.” 어쩌면 코치의 이 칭찬 한 마디를 듣기 위해 레슨을 꾸준히 받는 건지도 모르겠다. 당장은 경쟁에서 누군가를 이겨야 하는 게임보다, 이런 안정감을 주는 루틴이 필요하다. 스님이 아침에 목탁을 두드리듯.



* 신한은행 웹진 '스위치'에 기고한 글의 원문입니다. 제가 건조하게 쓴 글을 방송작가 출신인 문소라 과장이 좀 더 읽는 데 무리가 없도록 잘 편집한 글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019년 1월 신한은행 웹진 스위치(Switch) 1월호 보기


글 | 손현

편집 | 문소라(북이십일 홍보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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