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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현 May 14. 2018

수현과 현의 청첩

지난 일 년간 조금씩 그리고 전투적으로 준비한 결혼식

내가 미세먼지도 아니고 비를 걱정할 줄은 몰랐다. 4월의 봄 날씨는 변덕이 심했다. 행사를 치르기로 한 토요일은 강수 확률이 60%에서 80%를 왔다 갔다 하며 애간장을 태웠다. 장장 일 년간 머릿속으로 그리며 준비한 것을 모두 소화해 내지 못할까 봐 예민해지다가 '여기에도 다 뜻이 있겠지'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다독이며 해탈했다. 날씨만큼이나 신부(나)의 기분도 오락가락이었다.


다행히 비는 점심까지 부슬부슬 내리다 그쳤다. 하지만 야외에서 음식을 차리고 나눠 먹기에는 공기가 여전히 쌀쌀했다. 결국 크게 방향을 틀었다. 오후의 모든 행사를 실내에서 진행했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뜨끈한 바닥에 엉덩이를 지지며 한국의 바닥 난방 시스템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게 한옥의 진가인지도 모르겠다.


행사를 마친 지금은 벌써 공허하고 그리운 마음이 든다. 나는 왜 이 행사를 하고 싶었을까? 행사를 시작하며 잠시 마이크를 잡았는데, 그때 긴장하느라 제대로 말하지 못한, 지난 일 년간 조금씩 그리고 전투적으로 준비한 '수현과 현의 청첩'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나의 고향, 가회동 집

이북에서 내려오신 조부모는 서울 북촌 가회동에 터를 잡았고, 그곳은 나의 고향이 되었다. 어릴 때는 다들 명절마다 시골에 가는데, 내겐 그런 시골이 없어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한편 명절이 되면 오히려 한가하고 조용한 북촌이나 광화문 같은 시내가 내게는 진짜 서울로 각인되었다.

작은 할아버지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직접 그린 지도 ©손현 (좌) / 1996년, 추석에 삼촌과 함께 ©양수현 (우)

촌스럽게도 (또는 예스럽게도) 내가 말하는 시내는 사대문 안을 일컫는다. 그 때문인지 시내에 있는 직장에서 일하고 노포를 잘 아는 남자를 만나, '삐까번쩍'한 강남보다는 사대문 안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현을 처음 만났을 땐 현도 그런 남자였다. 지금은 비록 '삐까번쩍'한 강남에서 일하지만.) 나에게 우아한 삶은 그런 것이었다.


할머니는 항상 연탄불로 검게 변한 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있다가 손녀가 오면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 참고로 아랫목에 앉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양단 솜이불 속에는 종종 스댕(스테인리스) 밥그릇이 있었고, 그 속에 밥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밥솥이라고 보면 된다.


설 명절이면 대청마루에 며느리, 딸들이 둘러앉아 만두를, 추석에는 송편을 빚었다. 앞마당에서는 남자들이 큰 솥에 솔잎을 깔고 송편과 만두를 쪘다. 뒷간이라 불리던 화장실은 마당에 따로 있었고 나중에 집 안에 현대식 화장실을 만들었다. 사랑채에는 아빠와 두 삼촌이, 건넌방에는 고모 셋이 자랐다. 사랑채는 안채와 떨어져 있어서 아빠는 할아버지 몰래 방 안에서 담배를 태우곤 했단다.


할아버지는 평생 술, 담배를 몰랐던 모범 남편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간혹 아빠랑 다툴 때면 어떻게 아버님과 저리 다를 수 있냐고 한다. 내 초등학교 입학식에는 일을 하는 엄마 대신 할아버지와 함께 간 기억이 난다. 그는 뒷문에서 내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한참을 바라보다가, 하굣길도 함께 걸었다.


할아버지는 명절, 생일, 어린이 날이면 손주들에게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사 온 책들을 나눠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나는 미술작가 화집을 종류별로 선물 받곤 했다. 할아버지는 사전을 달고 다니면서 공부를 했고, 2002년, 79세의 나이에 그해 최고령으로 한국방송통신대학을 졸업했다.


1995년, 초등학교 입학식 날 ©양수현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하늘나라에 가시고 일 년 뒤 할아버지도 따라가셨다. 할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2010년부터 2013년까지 가회동 집은 빈 채로 있었고, 아빠는 우편물을 정리하러 종종 그 집을 찾았다. 몇 년 동안 아빠를 비롯한 여섯 남매는 그 집을 어떻게 할지 의견을 조율했고, 결국 집을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가회동 집이 카페를 만들겠다는 어느 유학생에게 팔렸다는 사실은 한참이 지난 후에 알았다. 아빠는 내가 그 집에 가지고 있던 애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차마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울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것이 있고, 추억과 시간은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매년 찾아오던 제비는 그 집이 무너질 때까지 찾아왔다.


가회동 집에서 ©양수현


그리고 지난 2017년 6월, 우연히 사직동에 있는 어느 한옥을 발견했다. 사직로7길 어딘가에 위치한다는 정보뿐이었다. 친구와 함께 무작정 그 길로 갔다. 한옥 단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 '운경고택(雲耕古宅)'이었다.


나는 무작정 벨을 누르고 이곳이 내가 아는 그 한옥이 맞는지 여쭤봤다. 마침 그 집에 늘 머무르며 운영 및 관리하는 부부 내외가 들어오라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 문을 열고 펼쳐진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전통 서울식 한옥이라는 운경고택은 보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복잡한 서울 한가운데 이런 곳이 있다니, 할머니, 할아버지의 옛 집이 생각났다.


운경 이재형 선생의 후손인 이두용 어르신은 운경고택을 왜 문화재로 등록하지 않았는지, 이재형 선생이 언제, 왜 도정궁 터를 매입했는지 등 운경고택을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운경고택을 통해 얻는 대관 수익은 불우한 학생을 위한 장학금으로 사용하고 있고, 매일 닦고 쓸며 아끼는 공간이라 후손들도 제사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4월 중순이 되면 마당에 큰 해당화와 다른 봄꽃들이 필 거라며 그즈음이 좋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2017년 6월, 운경고택 첫 방문 ©최고은


청첩장을 주는 문화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보통 결혼을 앞둔 사람이 청첩장을 주면서 밥을 사주곤 한다. 나 역시 지인으로부터 여러 번 청첩장을 받았다. 그들은 여러 약속을 소화하느라 바빠 보였다. 때론 영혼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친구의 배우자 얼굴도 모른 채 결혼식에 갔고 식장에서 배우자의 얼굴을 처음, 아주 잠시 볼뿐이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새로운 가정을 챙기느라 바쁘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아, 이곳에서
내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현을 내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나도 현의 친구들을 미리 만나 함께 청첩장을 전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현도 나의 제안을 따라줬다. 우리를 기점으로 서로의 친구 사이에 많은 교류가 일어나면 좋을 것 같았다. (나와 현 그리고 우리의 친구들은 대부분 낯을 가리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 운경고택에서의 하루를 꿈꾸기 시작했다. 대관 날짜를 정하고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한 게, 작년 10월이다. 친구를 초대하는 날은 2018년 4월 14일 토요일로 정했다.


현과 함께 운경고택 두 번째 방문 ©양수현


'청첩'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

청첩은 청할 청(請)과 편지 첩(牒)이라는 한자를 사용한다. 그래서 청첩장은 결혼 등의 좋은 일에 남을 초청하는 글을 적은 것을 말한다. 그동안 무심코 사용해온 단어인데, 이렇게 사전을 찾아보니 의미가 더욱 각별하여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럼 청첩장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서로 주고받은 연애편지를 이용해 만들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전형적인 카드 형식은 피할 것. 두 번째, 하객들이 연애편지 받는 느낌을 갖도록 할 것. 나 스스로에게 두 가지 미션을 주고 디자인을 시작했다. 모든 글은 현이 발췌하여 다듬어줬다. 마감 기한을 넘긴다고 서로 구박 아닌 구박도 해가며, 우리만의 청첩장을 만들었다.


점점 세상살이가 어려워지면서 다들 결혼이 곤란하다고들 말합니다. 그 곤란한 문제를 용기 있게 함께 풀어가려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고,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자주 일을 벌이는 수현과 글쓰기를 좋아하고, 보다 현실적이며 자주 일을 쳐내는 현이 만났습니다.

저희 결혼식에 여러분을 모십니다.


나와 현의 성향이 잘 드러나고, 이 시대의 현실과 결혼에 대한 책임감도 느껴지는 좋은 글이라 생각한다. 한 집에서 살게 될 우리를 나타내는 초록색 집 모양으로 청첩장 문을 열고 닫았다.


그리고 연애편지와 초대 글에 맞는 이미지를 찾아봤다. 서로 옆에 있음을 감사히 여길 때는 나란히 같은 곳을 바라보는 2개의 칫솔을, 곁을 내어줘서 고마울 때는 포개져 있는 베개를, 마지막 초대 글에는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는 포부를 수저 두 벌로 표현했다.


우리의 청첩장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떠올리거나, 우리를 향한 염려를 조금이라도 덜었다면 성공이다. 특히, 우리의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싶었다.


"부족한 저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 다 당신들 덕분입니다. 다르지만 잘 맞는 둘이 만나 어떤 시너지를 일으킬지 지켜봐 주세요. 걱정 마세요. 잘 살아보겠습니다!"


청첩장 (사진: studio Dii/정지훈, 최종은 포토)


가훈을 정하자

새로운 가정에는 새로운 가훈이 필요했다. 우리를 잘 아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가훈을 정해주면 어떨까? 그들의 지혜를 본받아 살아보는 거다.


운경고택의 건넌방은 사면이 서예로 가득하다. 그 공간 안에서 서예라는 퍼포먼스를 경험해보면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그 서예 작품을 어딘가 걸어두어 봄바람에 날리는 그림이 떠올랐다. 상을 빌렸고 서예용 검정 천을 두르고 붓과 벼루 그리고 먹을 준비했다.


행사 날에는 비가 올 텐데, 어디에 걸어야 젖지 않고 바람에 흔들릴 수 있을지 전날까지 한참을 고민했다. 다행히 한옥에는 비를 대신 받아주는 지붕 처마가 있었다. 처마 덕분에 가훈을 적은 화선지도, 손님들의 신발도 젖지 않았다. 한옥의 지혜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총 10개의 가훈이 나왔다. 하나만 꼽자니 다른 9개의 지혜가 아까웠다. 현의 아이디어로 일 년에 한 번씩 돌아가며 가훈으로 삼기로 했다. 서로에게 소원해질 때는 '최애(最愛)', 2세가 태어난 해에는 'grow more', 새로운 시작이 있을 때는 '흥(興)해라'와 같이 우리 상황에 맞는 가훈을 매년 1월 1일에 정해보려고 한다.


우선, 결혼 첫해에는 일일댄스의 합동 작품으로 정했다. 모두가 돌아가며 끝말잇기 형식으로 적었다.


춤추고 사랑 하라면먹을 땐 알지? 계란 두 개소리 금물리기 없음쓰는 남편담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무조건이야하게 살자 해피섹시 엔조이 결혼이 마지막인 걸로


사실 우린 라면 먹을 때에 계란 한 개로도 충분하지만 (현은 노른자를 안 먹고 난 노른자를 흰자보다 좋아하니, 흰자 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 특히 '음쓰는 남편이'와 '야하게 살자'가 신혼에 얼마나 적당한가! 십 년간 가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자! 이제 잘 지키는 일만 남았다.


가훈 공모전 ©윤세영과 친구들


고마운 사람들

잔칫날에 음악이 빠질쏘냐. 우리 집은 TV에서 신나는 노래만 나오면 뜬금없이 춤을 추기 시작하는 흥 많은 집안이다. 아마도 아빠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리라. "쑥! 대애~므리"라는 유행어가 돌 때, 내 동생 혜린이가 장난이라고 툭! 따라 했는데 소리가 다르더라. 음악을 시켰어야 했다면서 당시 온 가족이 아쉬워했다.


예단이 들어온 날 형부(현) 앞에서 혜린이 일주일에 한 번씩, 두 달 동안 겨우 여덟 번 배운 민요를 뻔뻔하게 불렀다. 그리고 결국 시댁 부모님의 승낙도 받았다. 뒤늦게 적성을 찾은 혜린은 퇴근하면 집에 와서 연습을 하며 우리의 잔치를 빛내줄 민요 3곡을 불렀다. <꽃타령>, <통영개타령>, <너영나영>에 맞춰 아빠는 지휘를 해가며 고수 역할을 해줬고 친구 고은이 한복을 빌려줬다.


신부 측에서 한 명이 나왔으니, 신랑 측에서도 한 명이 나와야지. 현과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성원 씨(a.k.a 산체스 또는 코방새)가 피날레를 장식했다. 난 성원 씨가 참 맘에 든다. 그는 여자를 잘 알고 대화가 통하는 남자다. 그런 남자의 연주라니, 그것도 색소폰으로! 달콤한 연주에 맞춰 현과 브루스 한 곡을 당기고 싶었지만 몸치인 현은 온몸이 굳어버렸다고 한다. 아빠랑 출 걸 그랬다. 그날 손님 몇 분께서 플레이 리스트를 탐냈는데, 음악 선곡 역시 성원 씨의 솜씨다.


비록 내가 PPM(pre-production meeting) 자료까지 만들며 디렉팅하고, 시장을 돌아다니고, 필요한 소품을 만들고 주인공까지 맡는 등 1인 다역을 소화했지만,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은 베테랑에게 맡겼다.


사진 촬영은 예전부터 SNS를 통해 눈여겨본 에보니앤아이보리(ebony & ivory)에게 부탁했다. 주중에는 부천에서 '분식의 숲'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주말이나 촬영이 있는 날에는 본업인 포토그래퍼로 활동한다는 김형석, 안주영 부부와 미팅이 잡혀서 현과 함께 식당을 찾았다.


이들은 (마침 이날 나 몰래 프로포즈를 준비하느라 종일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어 힘이 없던) 현과 나에게 김치볶음밥과 떡볶이 등 제대로 된 분식의 맛을 보여주었다. 음식과 더불어 두 분의 편안한 말투와 공간 속에서 미팅했는데, 덕분에 행사를 앞두고 불안해서 요동치던 마음이 잔잔해졌다.


행사 준비 과정 ©수현과 현

촬영 전날에는 심지어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에 날짜를 바꿔야 할지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김형석 대표의 말이 참 든든했다.


야외 촬영 때 비가 온다고 하면 대부분 촬영 날을 바꾸긴 해요. 다만, 비가 와도 신부가 개의치 않다면 문제없습니다. 사실 날씨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신랑과 신부의 표정이 중요하죠.


그의 말을 들으니 '그래, 비가 오면 다 맞아주지! 다 뜻이 있을 거야'라는 마음이 생겼고 걱정이 싹 사라지면서 배포가 커졌다.


꽃 장식과 부케는 현의 친구인 혜민 씨가 맡았다. 그는 현재 한남동에서 화연당을 운영하고 있다. 꽃 잔치가 열리는 집이라니, 이름부터 이번 행사와 딱 맞아떨어진다.


꽃 피는 봄의 운경고택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곳이다. 과한 장식으로 고유의 멋을 가리고 싶지 않았고, 우리가 정한 대표 색상인 진녹색과 흰색을 살렸으면 하는 나의 희망사항을 전했더니, 그는 센스 있는 조언과 실력으로 구현해주었다. 그날, 손님들 사이에서는 꽃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한옥에는 어떤 음식이 잘 어울릴까? 케이터링은 푸드 스타일링 스튜디오 차리다가 맡았다. 전통 소반 위에 음식을 담아 장식하고, 한옥과 어울릴 만한 메뉴를 장지애 매니저와 상의해가며 정했다. 장지애 매니저는 쌀쌀한 날씨에 식어도 괜찮을 만한 음식들을 추천했고, 귀찮을 법한 나의 몇 가지 요청들을 친절히 받아줬다.


그 외에도 나와 처음 운경고택을 찾았던 고은, 간단하게 영상을 부탁했는데 다른 장비까지 빌려와서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준 수연, 진행을 도와준 최신영 플래너, 그리고 궂은 날씨에도 우리의 잔치를 함께 즐겨준 가족, 친구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Film: Sooyeon Kim / Edit: Hyun Son


많은 스태프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 있다. 바로 나의 신랑 현이다. 현은 처음부터 함께 했고 앞으로도 끝까지 나와 함께 할 단 한 사람이다.


현과는 행사를 준비하는 동안 몇 번 다투기도 했다. 미술을 전공한 나는 한 상에 4명이 앉아서 서예를 하면 좋겠다는 상상을 최대한 구현하려고 노력했고, 건축을 전공한 현은 인원수에 맞춰 최소한의 재료로 행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접근했다.


착하고 쓸모 넘치는 현 ©양수현


우리는 '서예 붓을 하나 더 사네 마네' 같은 너무 사소한 문제로 다퉜지만, 그 계기로 알게 된 사소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우리는 다르다는 것
그 다름을 상대에게 대화를 통해
충분히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고,
그걸 들어야 할 필요도 있다

알고 나면 이해되는 행동이, 모르면 화를 부른다. 싸우면 입을 닫는 나를 달래 대화를 이끌어 내느라 고생 많았다. 동지여.


축제가 끝나간다. 일 년 전 결혼을 약속했을 때와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당장 다음 달이 걱정되는 백수다. 개인적으로 너무 변한 게 (해놓은 게) 없는 것 같아서, 지난 일 년간 무엇을 하며 내 시간을 보냈나 돌이켜 보니 우리를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다. 후회는 없고 여한도 없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 해, 우리를 위해 살아갈 거다.


그렇게 저희 오늘 결혼했습니다.

가훈은 잘 지키고 있는지 옆에서 지켜봐 주세요!


2018년 5월 12일, 수현 드림.


덧. 일 벌이는 사람 옆에서 쳐내느라 힘들었을 현. 당신이 아니었으면 아마 결혼을 안 했을 거야, 정말로. 사랑해.


글 | 양수현

편집 | 손현

#수현과현의청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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