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모두에게 꼭 행동을 권해야 할까?
Actions speak louder than words.
이 말을 굳게 믿던 때가 있었다. 믿음과 달리 스스로 사회문제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부채감을 느꼈다. 뭐라도 해보자 싶은 마음에 1인 시위*에 참여했다.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던 2013년 4월의 일이다. 누굴 위한 시위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일면식 없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미국 대사관 앞에 서 있는 동안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 세상은 내 생각보다 바삐 돌아간다. 대부분 피켓을 신경 쓰지 않았다. 둘째, 꽤 용기를 내어 1인 시위에 참여했지만 내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다. 혼란스러운 감정만 더 커졌다. 이걸 왜 했을까. ‘실천하는 나’에 도취된 건 아니었을까. 자기 위안이었나? 물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여전히 동의하기 때문에 나눔문화(비영리 사회단체)에 소액 후원을 계속하고 있다.
며칠 전, 미국의 지인에게 페북 메시지가 왔다. 그는 현재 진행 중인 홍콩 민주화 운동(또는 시위)을 언급하며 “정말 화나고 속상하고 걱정돼. 네가 누리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야.(This is upsetting, heartbreaking, and alarming. Your freedom is not free.)”라고 말했다. 사진에는 무장한 폭동 대응 경찰 10명이 어느 할머니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노트르담 성당 대화재 때 전 세계가 주목하더니 홍콩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 분노를 표했고, 잔열은 내게도 전해졌다. 6년 전의 나라면 그 사진을 공유하거나 ‘화가 나요’라는 이모티콘을 눌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잊었겠지.) 그새 내가 더 세속적인 사람이 된 건지, 출근길에 정신이 없었는지, 원체 냉정한 사람인 건지, 그 메시지에 오히려 거부감을 느꼈다. 홍콩의 일을 모르는 건 아닌데, 그 분노가 내게로 와서 당혹스러웠다.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꼭 행동을 권해야 할까? 이건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대의(大義)란 무엇인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도리가 과연 크고 작은 걸로 나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우리 일상의 수많은 불의와 부조리가 더 눈에 밟힌다. 당장 가정과 일터에서 ‘82년생 김지영’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나부터 바뀌고 개선해야 하는데, 홍콩 민주화 운동을 감히 말하는 게 모순이라 느꼈다.
언젠가 나는 ‘호기심이 큰 사람이라서, 사회문제 역시 호기심의 영역으로 대할 뿐이지, 봉사심이 투철한 성향은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스스로의 부채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이제는 자선 단체의 메시지에 휩쓸리지 않는다. 적어도 죄책감을 자극하는 이미지나 문구에는. 다만, 나를 대신하여 실천하는 사람, 행동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지지는 더욱 커졌다.
쓸데없이 서론이 길었다. 소개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내가 이걸 왜 소개하고 싶은지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과정이 길었기 때문이다. 성향 탓이고 능력 탓이다.
지난여름, 소셜 투자 계모임 ‘디모스(demos)’의 참여를 제안받았다. 디모스는 “오늘의 일상을 바꿀 수 있는 프로젝트에 어떻게 하면 돈을 흘려보낼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안을 제시하고자 2017년, 각자의 본업을 가진 열두 명이 모여 시작했다. 2017년에는 LGBT 모임 플랫폼 mo:im 프로젝트, 2018년에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어른이되면', ‘우롱센텐스’에 투자했다.
올해에는 디모스 운영진 외에도 계주를 모집하고(디모스 운영진을 포함해 총 25명), 계주끼리 모여 투자 기준을 정하고, 이에 부합하는 프로젝트 6개를 선정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해양생태학 연구를 후원하는 ‘MARC’, 성폭력 피해자가 안전한 공간에서 자립하도록 돕는 ‘열림터’, 니트청년의 진로와 자립을 돕는 ‘일하는 학교’, 미취학 난민 아동의 주말을 함께 하는 ‘열국아이학교’, 미혼부 양육을 지원하는 ‘아품’, 온라인 청소년 성착취 문제를 해결하는 ‘WomenDoIT’.
디모스는 계모임답게 함께 계원을 모아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에 곗돈을 투자한다**. 그리고 내일(11/17)까지 추가 계원을 모집 중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프로젝트를 호기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어떤 대의나 당위가 없다. 계주로서 딱히 한 것도 없어 더 조심스럽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말보다 행동이 중요한 건 여전히 맞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니까. 호기심이 생겼다면, 아래 홈페이지를 둘러보시길 권한다.
* 2013년 나눔문화에서는 미국의 전쟁범죄를 폭로하고 감옥에 갇힌 브래들리 매닝(Bradley Manning) 일병의 석방 운동을 시작했고, 그는 2017년에 석방되었다. 매닝은 이후 첼시 매닝(Chelsea E. Manning)으로 개명했고, 자신의 성 정체성이 여성이라며 성전환을 요청했다. 첼시 매닝이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처럼 나도 내 인생을 열심히 살고 싶다.
** 디모스에 투자한 곗돈은 각 개인의 통장에 돈으로 상환되지 않는다. 투자를 통해 일상의 문제 해결에 투자하고 그 변화의 임팩트를 투자의 성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