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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현 Jan 26. 2020

제철을 누리는 삶

<JOBS - CHEF> 취재/편집 후기

Note. 잡스(JOBS) 시리즈를 만들면서 누군가의 직업을 뭉뚱그려 설명하거나, 쉽게 판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에디터 편 이후로 처음으로 다른 직업을 다룬 셰프 편에 관해 글을 쓰는 게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인터뷰를 진행하고 편집한 사람으로서 섭외에 응한 고마운 분들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자,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여 짧게 기록합니다. 이번에는 출간 직후 유통망에 신경 쓰느라 홍보 글 발행이 늦었습니다. 덕분에 빠르게 2쇄를 찍는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취재/편집 후기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단풍이 아직 이쁘더라고요. 바쁘겠지만 지나가는 가을도 꼭 즐기세요.


잡스’ 시리즈의 두 번째 책에 등장하는 인터뷰이에게 원고 정리가 예정보다 늦어져 양해를 구한다는 메일을 보냈더니 이렇게 답신이 왔다. 다른 인터뷰이의 활동을 누군가는 ‘제철을 따라잡아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잡스 - 셰프: 맛의 세계에서 매일을 보내는 사람>에 등장하는 직업인의 말을 글로 옮기고 다듬는 동안, 이들이 공통적으로 시간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매일, 하루, 때, 제철, 절기, 계절 등 이들이 사용한 단어는 다양했지만 모두 시간을 가리켰다. 시간은 맛과 연관 지을 수 있다. 유통기한, 상미기한을 관리하는 일이 셰프의 숙명이라는 점도 자연히 이해가 갔다. 음식 연구가 하미현 대표가 인터뷰를 통해 식재료가 가장 맛있을 때와 그렇게 키우는 농부만 알면 음식 문화를 최대한 누릴 수 있어요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타이밍은 다른 직업인에게도 중요하다. 셰프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식재료의 제철을 기다리는 것처럼 사진가는 빛이 가장 좋을 때를, 의사는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미리 손 쓸 수 있는 때를, 투자가는 시장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때를 기다릴 것이다. 타이밍에 따라 각자가 내리는 선택의 옳고 그름, 유리함과 불리함이 결정된다.


경상북도의 입말 음식에 관한 아부레이수나 부엌 여는 날 행사 중 ©손현


문제는 우리가 그 타이밍을 제어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는 무엇일까? 책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은 루틴을 견디고, 그걸 조금씩 최적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매일이 똑같이 반복되어요. 서울의 파인 다이닝 씬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무대를 넓힌 박정현 셰프의 말이다. 그는 오전 9시 반에서 새벽 3시까지 빼곡하게 짜인 하루 일과를 소화하며, 가장 좋은 방식을 찾기 위해 여전히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심지어 조계종 수행승려인 정관 스님은 자신의 일과가 곧 수행이라고 표현했다. “일상생활의 모든 순간 중 선(禪)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생활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수행이고 선입니다.” 그는 넷플릭스 <셰프의 테이블>을 통해 사찰 음식을 전 세계에 알리면서 더욱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 일부 사람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가공 식품을 만들거나 인공조명을 사용해 사진 촬영을 하거나 유전자를 분석하여 발병 요인을 미리 알아내고자 하는 등 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여전히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높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내 우주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인 것 같다.

- 김동조, <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 중 01.14. / p.24


평소에 좋은 습관을 다져놓았다면, 자신에게 기회가 올 때 과감히 도전하는 훈련을 하면 좋겠다. 이선용 대표는 자신처럼 다른 분야에서 요리로 커리어를 전환하려는 사람에게 조언을 부탁한다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요리 분야에 대한) 환상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저도 환상을 가지고 요리학교에 등록했잖아요. 무언가 시작한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스스로를 테스트해봐야죠. 내 몸이 잘 견디는지 봐야 하고, 내가 남보다 잘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실수를 통해 한 단계 도약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리고 실수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미식의 도시 코펜하겐에 신선한 변화를 불러온 프레데리크 빌레 브라헤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흥미로웠다. 현재 개성이 돋보이는 레스토랑 네 곳을 운영 중인 그가 처음부터 셰프라는 직업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해 요리를 시작한 일, 요리를 그만두고 디제잉에 뛰어든 일, 음악을 포기하고 예술가를 보조한 일 등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찾아오는 기회를 잡아보라고 조언했다. “기회를 잡는다는 말은 자신이 실수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의미이자 인생을 변화시킬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잖아요.”


이쯤 되면 이 책에 궁금증이 조금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여섯 편의 인터뷰와 한 편의 에세이에는 영감을 관리하는 법, 실패를 수용하고 새로운 기회를 잡는 법, 리더십, 나아가 자신의 직업과 환경의 관계 등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많다. 무엇보다 자신의 일상을 꾸준히 반복하며 목표를 이룬다는 점이 내게는 더 와 닿았다.


JOBS - CHEF. 120×170mm, 288쪽, 사철제본, 19,000원 ©윤미연


잡스 시리즈의 첫 책을 출간하며 쓴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무엇보다 진로 선택을 앞두고 있는 중,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이 시리즈를 종종 접하기를 바란다. 전통적 관점의 직업인부터 고유의 영역을 개척 중인 인물까지, 국적과 배경을 넘나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각 직업 세계의 속성과 변화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늘 든든하게 내 편이 되어주는 아내는 이번 작업을 지켜보며, “제철 음식이야말로 요즘 시대의 럭셔리”라고 말했다. 우리는 한때 제철 농산물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했었다. 서로 일이 바빠지면서 평일에 요리하는 일이 뜸해졌지만, 새해에는 집에서 같이 저녁 먹는 날을 작년보다 늘리자는 목표를 세웠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가끔 시장을 찾고 과일이라도 챙겨 먹으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요즘도 동네 과일 가게를 기웃거리며, 이 계절에 가장 맛있는 과일이 나왔나 살핀다. 제철을 누리는 삶, 그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되지 않을까.



부록 1 참고 문헌

· 하미현, <입말한식>, 디자인하우스, 2018

· 박찬일, <스님, 절밥은 왜 그리도 맛이 좋습니까>, 불광출판사, 2017

· 댄 바버(Dan Barber), 임현경 역 <제3의 식탁: 미래의 요리를 위한 위대한 실험(원제 The Third Plate)>, 글항아리, 2016

· 댄 바버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 Save Our Food. Free the Seed. (NYT, 2019.6.7)

· 심가영, <젊은 오너셰프에게 묻다: 사람들은 왜 당신의 작은 식당을 즐겨 찾는가?>, 남해의봄날, 2014

· 넷플릭스 시리즈(데이빗 겔브 제작), <셰프의 테이블(Chef's Table)> / 현재 시즌 6까지 스트리밍 중



부록 2 도움 준 분들, 고생한 분들 (사진)

한창 마감 중일 때, 아부레이수나(하미현 대표)의 부엌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이날 열린 동지 파티에서 옥수수가 들어간 강원도식 팥죽과 단팥죽을 맛보는 호사를 누렸다. ©손현


2019년 10월 25일, 이선용 대표가 운영하는 목금토 식탁의 모임에서 라비올리를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다. 음, 나는 글을 더욱 열심히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양수현, 손현



신간이 나올 때마다 유통 담당(김수연, 김기란)과 마케터(김현주, 김예빈), 그리고 포토그래퍼(윤미연)가 늘 바쁘다. 점점 손발이 잘 맞고 있다. 덕분에 든든하다. ©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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