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살던 동네로 다시 이사 왔다. 처음 이사 왔던 15~20년 전의 시간으로 순식간에 이동한 느낌이다. 또는 갓 제대한 군인 같기도. 친한 친구들과 즐겨 가던 수영장과 빵집이 여전히 동네에 있어 좋은 한편, 여기조차 언젠간 떠나야 할 곳이라 느껴지니 전처럼 '내 방'에 정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불필요한 세간살이가 많아서 반성했다. (15th Dec, 2015)
지난 6월 말, 날 동해항까지 배웅해줬던 영배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 동네에서 탁구를 쳤다. 한 시간을 늦게 온 영배에게 "잘 지냈냐, 한 시간을 기다렸어"라고 했더니 "자식, 난 6개월을 기다렸어”라고 답했다. 그리고 내가 게임에서 졌다. 물론 내 실력이 부족해서. (19th Dec, 2015)
아버지와 함께 요양원에 계신 할아버지를 뵈었다. 아흔이 넘은 연세인데도 여전히 식성이 좋으시다. 그 식성을 물려받은 나는 여행 중에 찐 건지 부은 건지 볼살이 너무 쪘다. 여전히 바람은 차갑지만 조깅과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비록 더디지만 내 호흡을 찾고 있다. (20th Dec, 2015)
바트 키싱엔에서 나를 재워주셨던 인숙 님께서 '긴 여행 후 집으로 돌아간 느낌이 어떤지 궁금하다'며 메일을 보내셨다. 여행 중에는 전반적으로 평온했는데 서울에 돌아오니 초조해진다고 답했더니 그 마음이 자연스럽단다. (29th Dec, 2015)
모터사이클이 내일쯤 통관을 마친다는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가고 있다. 이번엔 오랜 친구 성원이 동행한다. 난 오늘 오후부터 내일까지 날씨는 어떤지, 도로 사정은 괜찮을지 여전히 검색 중이고 친구는 부산 맛집을 검색하느라 신났다. (30th Dec, 2015)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통관을 마친 모터사이클을 다시 받았다. 성원은 고속버스를 타고 당일에 귀경했고, 난 오랜만에 시동을 걸고 지리산 끝자락 게스트하우스에서 2015년의 마지막 밤을 잤다. 새해 첫날, 17번과 1번 국도를 따라 전주를 거쳐 부지런히 올라가던 중에 천안에서 앞 타이어 튜브가 펑크 났다. 결국 서울까지 95km를 남기고 1톤 트럭에 실려 매우 따뜻하고 편하고 졸린 상태로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다. 여행 종료. (31th Dec, 2015 - 1st Jan, 2016)
내 몸은 서울 생활에 이미 (어쩔 수 없이) 적응해버렸지만, 영혼은 틈틈이 쓰고 있는 글의 시점에 맞추어 더디게 오고 있다. 어쩌면 몸이 늘 앞서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길에서 흘린 중요한 뭔가가 있다면 뒤따라 오는 동안 차근차근 주워서 와주길. (7th Jan, 2016)
제슈프에서 함께 했던 유렉 Jurek에게서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메일이 왔다. 곧 탄생할 손주를 기다리고 있단다. 내 영향으로 얼마 전 승용차를 한국제(뉴옵티마)로 바꿨으니 기아자동차에 수수료를 10% 정도 요청하라는 농담도, 모터사이클을 타던 때가 그립지 않냐고도 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터사이클로 인해 당신들과 함께 할 수 있던 시간이 참 따뜻하고 좋았다. 얼마 전 한국은 음력설이었다는 소식으로 답하며, 그와 가족들을 위해 새해 복을 빌었다. 부디 좋은 소식이 있기를, 나도 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줄 수 있기를. (11th Feb, 2016)
모스크바에서 세 명의 한국인 모터사이클 여행자를 만났었는데, 인근 형을 마지막으로 모두 여행을 마쳤다. 동년 형은 이미 도쿄에서 다시 만났었고, 준용 형은 지난 3일에 들어오셨단다. 다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16th Feb, 2016)
유렉이 다시 메일을 보냈다. “59cm, 4.33kg, 하!!!!!!” 손주가 태어났단다. 무척 반가운 소식! 그나저나 나도 태어난 순간에 길이와 무게, 이런 두 숫자의 조합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려졌을까? (19th Feb, 2016)
길에서 만난 라이더들이 나에게 꼭 묻는 것들이 있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빠르게 가는지, 마지막으로 내비게이션이 있는지를 물었다. 장소와 상황에 따라 내 대답은 조금씩 달랐지만 어느 날 질문 속 내용들이 곧 ‘나’에 대한 중요한 물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꿔 말하자면 과거의 내가 누구인지, 당장 또는 장기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그것을 나만의 속도로 이룰 수 있는지, 마지막으로 방향을 잘 잡을 수 있는가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뇌과학을 전공한 김대식 교수의 인터뷰에 의하면 뇌과학에서 인생의 갑이 되는 방법은 지금 이 순간 '지금의 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10∼20년 후의 미래의 나'로서 '지금의 나'를 상상하는 것이란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 때문에 집중과 선택을 통해 나중에 내가 기억할 인생에서 괴로운 것과 즐거운 것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단다.(각주1)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늘 대답이 궁했다. 한편 10~20년 후 나의 관점에서 만 서른 하나의 나를 상상했을 때, 내가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약 3년의 준비 끝에 실행했고 무사히 돌아왔으니 후회는 없다. 내 선택에 대해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는데, 이는 여행 후 나보다 각각 10살, 14살 많은 두 분을 만났을 때다. 나와 비슷한, 또는 긴 일정의 모터사이클 여행을 고려 중이신 두 분이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다. 본인들도 딱 십 년 전에 떠났어야 했다고. 현재 진행 중인 비즈니스 등의 상황, 마흔 중반의 체력 등을 고려했을 때, 훌쩍 떠나기엔 고려해야 할 요소가 훨씬 많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께서 꼭 올해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좋은 계절에 출항하시길 내심 기대해본다. 지금으로부터 다시 10년 후를 상상한다면 오히려 선택이 쉬울 수도 있다.
그동안 여행 중인 나, 모터사이클 위에 앉아있는 나, 그리고 글 속의 나 이렇게 세 개의 축이 번갈아 가며 여행을 채워갔다. 여행하는 동안 틈틈이 써오던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공교롭게 난 이동해야 했고, 그때마다 바람이 나의 막힌 머리와 가슴을 환기시켰다. 이때 ‘환기’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시속 120km로 모터사이클을 운전할 때 내가 견디는 바람의 세기를 환산하면 초속 33m 정도고, 단순히 풍속으로 따지면 ‘강한 태풍’에 속한다. 그 태풍을 풀페이스 헬멧과 바이크 수트로 견뎠다. 전에 머물던 곳에서의 모든 기억이 전환되고 잡념이 휘발하는 동안 난 다음 장소에 도착했고, 관조(觀照)하는 시선으로 다시 글을 쓰며 여행을 지속할 수 있었다.
스페이스 수트(우주복)로 우주를 유영하듯, 길 위에서는 바이크 수트 차림으로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였지만 적어도 길에서 만난 친구들이 나에겐 소중한 중력이 되었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모든 감정과 이야기가 소멸하는 것이 불안하기 때문에 기록을 멈출 수 없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중 바트 키싱엔에서 접한 이야기가 내 마음속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돌고 오신 네덜란드 출신의 어느 77세 신부님께서 그러셨단다. “나는 아무것도 증명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서둘러 걸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뭔가를 증명하기 위해 그 길을 걷지 않았기를 스스로에게 바랐단다. 덕분에 모터사이클 앞, 뒤 타이어를 두 번씩 갈면서 약 26,000km를 달리는 동안 내가 지나온 나라나 도시, 거리나 속도 등의 숫자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여정은 ‘유라시아 횡단’이란 거창한 단어보다는 내면 깊숙한 곳을 돌고 돌아 결국 나의 원점으로 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지난 1월 28일 아침, 경성 형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2년 전, 처음으로 형과 함께 모터사이클로 국내 여행을 떠났을 때다. 2박 3일 일정으로 안동을 거쳐 울진을 찍고 다시 정동진으로 올라갔었다. 사진 속 장소는 강릉 바다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형이 말하길 '저기 서있는데 날씨도 따뜻하고 햇살도 좋았다'며 그냥 좋았던 기억이란다. 또 하나 기억에 남은 건 그때 아버지께서 적어주신 메모다. 가볼만한 곳, 추천하는 음식점 등이 적혀 있었는데 단순히 거기 적힌 정보가 유용했던 것뿐 아니라 내 여정이 심적으로 지지받는다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형의 말처럼 혼자 가라고 했으면 못 갔을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재미도 없었을 것 같고 맛있는 것도 혼자 찾아다닌다고 생각하면 먹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그때 좋은 동행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다.
유일하게 함께 다녔던 형은 곧 미국 텍사스로 돌아간다고 한다. 나 역시 그리던 여행을 잘 다녀왔으니 서울에서 더 이상 모터사이클을 소유하고 있을 명분이 사라졌다. 언제 또 어떤 바람이 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10년 정도는 안 타지 않을까? 한편 수영장에 들어갈 때 온몸에 저장된 기억들이 감각을 되살려 자연히 헤엄을 치듯 모터사이클은 평생 타는 거란다. 좀 더 세월이 흐른 뒤 형을 다시 만나, 적당한 엔진을 갖춘 바이크를 한 대씩 빌려 미국과 캐나다, 또는 내 유년시절을 보낸 파나마를 거쳐 칠레까지 달려도 멋질 것 같다. 굳이 모터사이클이 아니어도 될 것 같다. 곁에 든든한 동행만 있다면. 어느 길을 어떻게 가든, 그 길에서 무얼 보든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바람을 가를 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나의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났고(각주2), 에피소드의 끝에는 고마움만 남았다. 그동안 여행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고맙다. 땡큐 & 굿바이. (4th Mar, 2016, 끝)
바람과 비와 이슬은 많은 걸 가르쳐준단다. 힘이 들면…… 기다려. 그럼 바람이 분다.
- 극단 목화의 연극 <템페스트> 마지막 대사 (셰익스피어 원작, 오태석 번안 및 연출)
* 각주
(각주1) 박민, 「김대식 腦과학 전공 카이스트 교수 인터뷰: 가장 창조적인 5% 인재는 그냥 내버려두는 게 최상」, 『문화일보』, 2014.7.25
(각주2) 한병철(2015), 『심리정치: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문학과지성사, p.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