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와 디자이너에게 바치는 글
지난 9월 10일(토)에 책이 나왔다.
책이 출간되면 한 번에 공개하려고 그동안 틈틈이 모은 사진들을 공개한다. 이 지난한 과정을 함께 해 준 나의 편집자와 디자이너에게 이 글을 바친다. (주의: 사진 많음)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뒤, 글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두 달 반 가량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처음에는 집에서 마저 작업을 했는데, 어느 순간 이 상황이 모순된다고 느꼈다. 본문 속의 나는 집을 매우 그리워하고 있는데 현재의 나는 따뜻하고 포근한 집에서 그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여러 곳을 자발적으로 떠돌기도 했다. 그 와중에 고맙게도 공간을 흔쾌히 제공해주신 분들이 많아 참 감사했다.
그리고 3월 7일에 초고 완성. 이제부터가 편집과 디자인 작업의 본격적인 시작인데 이미 에너지를 다 쓴 기분이다.
원래 100~200부 정도의 독립출판을 생각했다. 다만 내가 전문적인 편집 툴을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최소한 본문 배치나 표지 디자인을 의뢰할 사람을 찾던 중, 운 좋게 미메시스 출판사와 연결이 되었다. 한 번의 미팅 후, 4월 초에 계약했다.
1차 교정은 우선 내 몫이었다. 전반적으로 초고를 다시 다듬어 출판사에서 생각하는 '진짜 초고'로 정리했다. 아마도 계약서에서 말하는 '최종 원고'는 1차 교정에 들어갈 수 있는 원고를 뜻하는 것 같다.
원고에 직접 등장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 부분을 보여주며 의견을 여쭙기도 했고, 도중에 Mac용 워드 프로그램에 오류가 생겨 수정한 내용을 날리기도 했다.
그 사이 함부르크의 헬마와 스카이프로 잠시 근황도 주고받고(헤어진 전처와 재결합했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크의 제니로부터 거의 1년 만에 (헬멧 차림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더욱 근사한) 사진을 받았다. 여행 전에 내게 타이어 패치 등을 선물해 준 김종범 작가의 작업실에도 다시 들러 생존 신고를 마쳤다.
글을 정리하다가 보면 문득 그 때의 하늘이 무척 그리웠다. 서울에서는 이제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아래 사진은 러시아 치타 가는 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의 든든한 파트너, 김미정 편집자 덕분에 탁구를 치듯 본격적인 2차 교정을 진행했다. 내가 습관적으로 쓰는 표현들까지도 알려줘서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가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기도 했지만...
이즈음 생각나는 글귀가 있다. 김애란 작가가 창비 50주년 축사 때 했던 말의 일부를 발췌한다. 감히 내 경험을 김애란 작가에게 견줄 수 없겠지만, 그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결례가 안 된다면 14년 전 제 첫 단편의 첫 교정지에 적힌 편집부 의견 중 한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 주인아주머니를 주인 여자로 통일하였습니다. 제 느낌엔 이 소설의 다른 여자들과 주인 여자가 같은 아우라를 품고 있다고 여겨져 이렇게 바꾸어보았습니다. 이 문제도 내일 같이 이야기해보면 좋겠군요.
저는 꽤 오랫동안 제가 ‘주인 여자’를 처음부터 ‘주인 여자’로 쓴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상태가 훨씬 좋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이 이야기해보자’는 사무적인 마지막 문장을 보며 작가에게 ‘같이 이야기’ 할 대상이 있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고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이 축사는 50년간 작가들과 긴 이야기를 나눠준 여러 부서 분들과 선생님들께 드리는 작은 목례입니다. 때로 서투르거나 괴팍하고, 까다롭거나 다정하고, 가난하고 외로운 작가들의 문장 위를 함께 걸어주고 ‘이 문제도 내일 같이 이야기해보면 좋겠군요.’라고 말해준 이들이 만들어낸 반백 년, 그 아득한 시간 앞에 드리는 박수입니다. (김애란, '창비 50주년 축하모임 축사', 2016.2.24)
지난 4월 말, 한국 출판문화산업 진흥원에서 진행하는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 지원사업'에 지원하기 위해 당장 임시 제목이라도 붙여 원고를 보낼 일이 있었다.
식품과 엔터테인먼트를 두루 섭렵하는 모 대기업에서 마케팅을 하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결국 친구의 조언을 따라,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라는 애매한 제목의 원고로 제출했고, 보기 좋게 탈락했다. 물론 제목 탓은 아니었겠지...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로 선정된 작품 리스트는 여기를 참고)
아, 그래도 이 이야기가 브런치북 프로젝트 #2에서 감사하게도 금상을 받았다. (이 상금은 추석 연휴가 지난 후 모두 해외 배송비로 쓰일 예정)
그리고 3차 교정을 진행 중이던 8월 9일, 편집자가 제시한 몇 개의 제목을 놓고 머리를 맞댔다.
회의를 통해, '여행기'와 '일단 다시 (떠나야 한다)' 이렇게 두 개의 제목으로 압축했고, 모터사이클로 유라시아를 건넜다는 부제를 추가했다. 그리고 가제본을 만들 때 사진과 함께 제목을 얹어본 뒤에 다시 판단하기로 했다.
막상 제목은 마지막에 『모터사이클로 유라시아』로 확정됐다. 거추장스러운 부제도 떼어냈다. 참고로 편집자가 책을 준비하면서부터 임시로 붙였던 제목이다. 내가 그토록 빼고 싶었던 단어 '모터사이클'과 '유라시아'를 정공법으로 합쳤는데, 돌이켜보면 이 제목이 차라리 정직하고 제일 나은 것 같다.
거의 다 왔다. 추석 전 출간을 목표로 3차 교정 후 최종 교정까지 순식간에 지나갔다. 마침 회사 일도 바쁠 때라 주말과 쉬는 날을 이용해 틈틈이 봤고, 이미 눈에 익어버린 글들을 어찌 더 손대야 할 지 막막할 때도 있었다. 나도 엎드려 자고, 지친 편집자도 쪽잠을 잤다. 띠지는 밝은 녹색과 은은한 노란색 중에 마지막에 노란색으로 결정되었다. 사진 선정과 레이아웃 등 모든 디자인은 석윤이 디자이너를 믿고 맡겼다. 꽤 만족스럽다.
볕 좋은 날, 파주 미메시스 사옥에서 마침 디자이너와 편집자가 함께 있길래 사진에 담았다.
석윤이 디자이너: <월간 채널예스> 8월호 인터뷰 기사
김미정 편집자: 요즘 교보문고 북뉴스에 『미술철학사』에 관한 칼럼을 쓰고 있음
석윤이 디자이너, 책 제작을 담당하는 이소현 대리와 함께 파주 문발동에 있는 영신사에 함께 갔다. 내 눈엔 그 색이 그 색 같은데, (CMYK밖에 구분을 못하겠다..) 역시나 매의 눈으로 팬톤 컬러칩과 샘플을 들고 꼼꼼하게 감리를 보셨다. 인쇄소 안에는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음에도 직원의 이마에는 땀이 송송 맺혔다.
종이로 된 책을 낼 수 있어 가장 기쁜 점은 그걸 소중한 사람에게 직접 건네줄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화요일(9/13)에는 평소 존경하는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아마 독자 중 가장 연령이 높지 않으실까(1938년생). 돌이켜보면 교수님 수업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는데 6년 전 파리에서 만났고, 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쏘련’에서 쓰라며 용돈도 쥐어주셨었다. 평소에는 포르쉐 카이엔을 타고, 아프릴리아 스쿠터도 가지고 계신다. 비록 사모님께서 못 타게 하셔서 1년째 집에 방치되어 있다고 하시지만...
가능한 정제된 글을 쓰고자 했지만 내 감정까지 정제시키진 않았다. 오히려 당시 공기를 박제하려고 애썼다. 언제든 글을 다시 읽으면 그 기억이 나를 환기시킬 수 있도록.
그리고 그때의 공기를 소포에 담아 먼저 여행 중 만난 고마운 이들에게 보내려고 한다.
아래 글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Thanks to' 원고.
글 속의 나는 여행하는 동안 고독했다고 투덜댔지만, 내 글을 여러 번 읽고 고치는 동안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돌이켜 보니 그 어느 여행보다 많은 동행이 있었고, 어떤 방식으로든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여러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감사는 <표현>해야 한다고 들었다.
우선 러시아에서 만난 하바롭스크의 야나Yana와 세르게이Serg 커플, 울란우데 가는 길에서 만난 세르게이Sergei, 바이칼 호수에서 만난 두 명의 크리스티나Kristina, 아냐Anna, 노보시비르스크의 세르게이Sergey, 정비소에서 만난 알렉스Alex, 바짐Vadim, 박스를 되찾아 준 튜먼 출신의 안드레이Andrei, 블라드Vlad, 세르게이Sergei(네 번째 세르게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리나Irina와 다리아Daria 그리고 제니Jenny에게 고맙다.
유럽에서는 보빈이네 부부, 유렉Jurek과 루시Lucy 부부, 인숙과 안드레아스Andreas 부부 (그리고 이들을 소개해 준 시현), 큐레이터 예니Jenni와 그녀를 소개해 준 홍보라 대표, 소헤일Soheyl, 에릭Eric, 헬마Helmar, 히나코Hinako, 윌리Willy(규석), 얀Yann(정현), 보은, 지민, 준영, 수진, 스테파노Stefano, 비르질리오Virgilio, 아야카Ayaka, 헬레리Heleri, 연상, 주영이네 부부, 후배 수연, 기준 선배, 공연을 함께 준비한 송주원 안무가와 아림, 성은, 논 베를린의 최찬숙 작가와 신이도 디렉터 그리고 매거진 B의 최태혁 편집장을 만났다. 스케줄을 맞춰 일부 여정을 함께 해준 아람, 문형, 민선에게도 고맙다. 덕분에 유럽에서의 여행도 무사히 마쳤다.
비슷한 시기에 각자의 차량으로 여행을 무사히 마친 캠핑카팀(세환, 지면, 승훈, 세훈), 옵티마팀(성범, 우균), 동년, 준용, 인근, 성민이 생각난다. 내 모터사이클을 비롯해 이들의 차량들을 정비해 준 곳곳의 엔지니어들 덕분에 퍼지지 않고 잘 달렸다.
마지막에 들른 일본에서는 진섭과 민현에게 각별히 고마움을 표한다. 물론 다시 만난 동년에게도. 그 밖에 이 여행을 채워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은혜는 <갚는> 것이라고 배웠다. 왜 갚는다는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를 책으로 엮음으로써 그걸 갚을 수 있어 매우 기쁘다. 여행 중 만난 고마운 이들에게 책으로 보내고 싶어서 한동안 마음의 <빚>처럼 남아 있었다. 그걸 실현하게 해 준 미메시스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여행 기간과 거의 비슷한 시간 동안 책을 만드느라 큰 도움을 주셨다.
이제는 이 책이 친구들의 품으로 그리고 독자를 향해 새로운 여행을 하길 바란다.
고맙습니다.
2016. 8. 30 서울에서 손현 드림.
+ 참, 바이크는 잘 있습니다.
이제는 신귀만 사진작가가 탑니다. 저보다 훨씬 더 자주 이용하며 잘 관리하고 있답니다.
제 책은 서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도서 보기
교보문고: tally-ho
알라딘: tally-ho
알라딘US: tally-ho
예스24: tally-ho
인터파크: tally-ho
++ 마지막 하나 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미안합니다)
'바람을 가를 때 내가 생각하는 것'이라는 글 초반에 딜러와의 대화가 나온다. 코오롱 모토라드의 정청림 과장이다. 최근에 출간 소식을 전해드렸더니 이렇게 코멘트를 하셨다. (당시 그의 표정이 어두운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반대하시는 줄은 몰랐다)
아무쪼록 이 분께도 좋은 소식으로 보답할 수 있어서 마음이 홀가분하다. 교수님이 나보고 다시 떠나라고 한다면 가겠냐고 물으셨다. 흠, 글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