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중순, 아버지께서 쓰시던 랩탑이 고장 났다. 서비스센터에 물어보니 내부 하드디스크의 바늘 때문이란다. 졸지에 하드디스크를 새로 샀고, 데이터 복구 분야에서 유명하다고 소문난 용산의 모 업체를 찾았다. 심지어 검찰과 국정원도 주요 고객이란다. 은행처럼 번호표를 뽑아 기다려야 했고 내 앞에는 이미 세 명이 더 있었다. ‘밝은 회사, 밝음을 전하는 회사’라는 경영이념과는 대조적으로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복구 비용은 40만 원 정도. 이럴 때 보면 클라우드 저장공간을 구매하는 비용이 결코 비싼 게 아니다. 데이터 복구 회사 대표의 인터뷰에 의하면 ‘비용은 얼마든지 줄 테니 저장된 정보를 되살려 달라는 고객이 많아 1993년부터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버지 역시 비용이 들더라도 기존 데이터를 복원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만일 내 랩탑도 고장 나 워드프로세서를 통해 써왔던 지난 여행에 관한 글이 통째로 날아간다면? 글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많은 부분을 여행 중 손으로 기록한 공책 속의 메모, 사진 그리고 기억에 의존했고, 기억은 이미 많은 부분 휘발했다. 공책을 다시 들춰보며 처음부터 다시 썼을 때 과연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을까. 아니면 세부적인 묘사와 글의 구성에 있어 훨씬 밀도가 떨어질까. 뇌를 통해 무언가 창작하는 과정이 매번 새로울 수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물론 궁금하다고 이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기를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시간과 돈만 있다면 손상된 데이터를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는 세상이다. 랩탑을 고치고 데이터의 90%가량을 되찾는 동안 ‘저장된 정보’가 갖는 가치와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예측컨대 점점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더라도 데이터 손실과 관련된 상황을 겪을 것이고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두 가지 옵션이 남을 것이다. 무엇을 저장하고 어떻게 보관할 건지 더 애쓰거나, 사라진 기록의 가치가 복원 비용보다 낮다고 판단할 경우 과감히 포기하거나.
언젠가 뇌공학과 뇌과학이 더 발전해서, 하드디스크를 복원하듯 뇌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거나 원래 기억을 별도로 저장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미셸 공드리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처럼 선택적으로 기억을 지울 수도 있겠다.
그때가 오면 기술과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더 중요해지지 않을까?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들. 이를테면 사소한 문제로 다투다 소원해진 친구 사이, 너무 골이 깊어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가족 간의 유대, 안타깝게 저 세상으로 가버린 반려동물 등 시간과 관련된 모든 것들.
마침 어제 밤에는 요양원에 계신 할아버지의 기억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이 언제고, 어디냐는 의사의 질문에 1886년 겨울의 마산이라고 답하셨단다.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점점 휘발되시더니 소년 시절에 배웠던 일본어가 갑자기 떠올랐는지 요양원의 간호사와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는 걸 들었었는데 이제는 뇌가 과거로 더 거슬러 갔나 보다. 참고로 할아버지의 고향은 마산이 맞지만 태어나신 때는 1924년 즈음이다.
존 레넌은 1981년 4월 <Beautiful Boy (Darling Boy)>란 곡에서 이렇게 불렀다. “인생이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동안 흘러 없어지는 바로 그것 Life is what happens to you while you’re busy making other plans.” 시간이 똑바로 가든 역행하든, 뒤죽박죽 속에 내 삶의 의미가 없어져도 좋다. 그저 주어진 시간을 잘 쓰고 싶다. (6th Apr,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