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머무는 곳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버릇이 있다. 그곳이 카페라면, 커피머신이 내는 소음, 음료가 준비됐다고 알리는 점원의 말, 곁에 앉은 손님들의 대화, 그리고 마침내 공간을 은은히 채우는 음악을 귀에 담는다. 공기의 진동을 만드는 스피커를 찾다 보면, 자연스레 그 공간의 사운드시스템(이하 오디오)도 엿볼 수 있다. 최근 방문한 몇 군데의 공간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대부분 블루투스 스피커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혹 빈티지 오디오 또는 그럴싸한 신형 오디오를 갖추었더라도,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일 뿐, 음악을 플레이시키는 것은 주로 유튜브나 애플뮤직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였다.
일정한 요금을 내고 신문이나 잡지를 구독하듯, 음악 또한 소유하는 대신 구독하는 ‘구독 경제(Subscription economy)'와 맥락을 함께 한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듯,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덴마크의 전자회사 뱅 앤 올룹슨(Bang & Oulfsen)은 2011년 8월 보도자료를 통해 “안녕, 아날로그 세계(Goodbye to the analogue world)"라고 말하며, 더 이상 CD플레이어를 만들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뱅 앤 올룹슨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디지털 세계를 앞장서서 매끈하고 간편한 블루투스 스피커를 만들고 있다.
애석하게도 나는 여전히 CD를 통해 음악을 듣는다. 10대 후반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CD더미에는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의 대부분이 있다. 분위기에 따라 CD더미에서 몇 장씩 꺼내 듣는 것만으로 이번 생에 들어야 할 음악은 충분한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영화 추천 서비스 왓챠를 개발한 프로그램스 박태훈 대표의 말을 빌리겠다. 그는 영화 콘텐츠와 음악 콘텐츠 시장의 차이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음악 콘텐츠 시장은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행태가 일반적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인이 10대 후반, 20대 초반까지 적극적으로 들었던 음악을 평생 듣는 경향이 있다.”
‘이미 세계가 저만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나만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지는 걸까?’ 다행히 세계는 내 우려보다는 훨씬 폭넓고 다양해 보인다. 그리고 세계가 빠르게 변화하는 만큼, 그 변화를 최대한 늦추고자 하는 흐름도 공존한다.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저자인 데이비드 색스는 디지털 시대에 거꾸로 LP와 아날로그 레코딩이 부흥하는 현상을 다뤘다. 디지털 기술 진보에 가까워질수록 ‘진짜(Real things)'를 향한 사람들의 욕망도 커지는 것이라고. 그러던 내게 ‘진짜’를 가질 기회가 생겼다.
결혼식을 앞두고 함(函)이 들어가는 날, 처가에 인사를 드리고 거실을 둘러보니 아내가 전부터 말했던 빛바랜 호두나무 재질의 스피커가 보였다. 플랜트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정년 퇴임한 나의 장인어른 양인규 씨가 1970년대 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 온 미국제 중소형 스피커 ‘JBL L40’이었다. 아내는 거의 27년 동안 인테리어 소품으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했다. 중앙의 10인치 우퍼 가장자리는 이미 부식되어 제 기능을 못했다. 나는 이를 수리해 신혼집에서 쓰고 싶다고 장인어른께 허락을 구했다. ‘진짜’를 향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스피커 수리를 위해 경기도 일산 초입에 있는 사운드로직(Sound Logic)을 찾았다. 그곳에 도착하니, 주인으로 보이는 엔지니어가 대뜸 말했다. “나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마치 어릴 적 보던 무협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깊은 산골짜기에 은둔해있는 취권 고수를 찾는 주인공에게 그들은 늘 비슷한 말을 했다. 주말 한 낮, 주인장의 얼굴도 영화 속 취권 고수처럼 발그레하게 취기가 올라 있었다. 찾아간 용건을 말하자,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오디오 수리로는 최고라고 약간의 허풍도 떨었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었으리라.
사운드로직의 주인장은 1954년생으로 내 아버지, 장인어른과도 동갑이다. 그는 한때 스피커 수리로 이름을 날렸던 ‘오무사(OHM사)’를 만든 엔지니어다. 오무사는 검색엔진에서 후기를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몇 년 전 임대료가 저렴한 현재의 장소로 작업장을 옮기고 이름도 현대식으로 바꿨다고 한다. 아들도 대를 이어 사운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이곳은 친구의 아버지이자 또 다른 오디오 애호가인 석정수 씨가 추천했다. 석 씨는 1975년 극동방송에 입사해, SBS와 SBS 기술국을 거쳐 남산 송신소장으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한, 숙련된 엔지니어다. 현재 취미로 진공관 앰프를 만들고 있는데, 1년 전 그는 내게 직접 만든 진공관 앰프를 선물했다. 물론, 그는 사운드로직을 여전히 오무사로 기억했다.
약 열흘 뒤, 장인어른의 스피커는 다시 태어났다. 사운드로직의 주인장은 스피커의 내부 흡음재부터 서라운드, 보이스 코일, 커버 등 낡은 부품을 교체하고, 흐트러진 네트워크를 바로 잡았다고 한다. 호두나무 몸통도 본래의 때깔을 찾았다. 수리를 마친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울려 퍼지자, 나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소리 들어보기]
몇 달 동안 오디오를 알아보고 수리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아날로그 방식을 통한 음악 감상 또는 하이엔드 오디오 수집이라는 취향이 단순히 개인의 만족을 넘어 베이비붐 세대를 비롯해 여러 사람을 다양한 방법으로 연결해주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내가 간편하고 콤팩트한 올인원 블루투스 스피커를 새로 구입했다면 겪지 못했을 에피소드다.
물론, 나 역시 스트리밍 서비스를 비롯해 진화하는 디지털 기술의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유튜브나 사운드 클라우드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로는 아무리 많은 음악을 들어도 별로 기억에 남지 않고, 무엇을 들어야 할지 늘 길을 헤맨다. 편리함은 때로 많은 과정과 기억을 건너뛴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인공지능이 큐레이션하는 음악을 무한정 들을 수 있다는 것(an endless mix of music)은 어쩌면 우리의 큰 착각이 아닐까? ‘스트리밍’이라는 말처럼 음악을 들었다는 사실조차 흘러간다.
반면, 아날로그 오디오와 관련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릴 적 살던 집 거실에는 인켈 오디오가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그 오디오를 별로 활용하지 않았는데, 나는 이름 모를 비발디의 바이올린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곤 했다. 외가에는 좀 더 값비싼 오디오가 있었다. 창백한 푸른빛을 도도하게 내뿜는 매킨토시 앰프와 웅장한 탄노이 스피커를 통해 친척들과 함께 음악을 들었다.
함께 좋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수준이라면, 굳이 비싼 오디오 기기를 마련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처럼 번거롭게 CD나 LP를 듣겠다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숙련된 엔지니어는 필요하다. 음악이 주는 메시지, 진짜 소리가 주는 감동은 그들이 없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테니까.
어떤 취향은 이런 식으로 확산되고 대물림될 수 있다. 새삼, 어디선가 활동하고 있을 부모 세대의 엔지니어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 신한은행 웹진 '스위치'(신한 쏠SOL 앱으로 연결되어 은행 고객은 물론, 온라인을 통해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는 매체)에 기고한 글의 원문입니다.
2018년 12월 신한은행 웹진 스위치(Switch) 전문 링크
글 | 손현
편집 | 문소라(북이십일 홍보기획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