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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념나무 Mar 20. 2020

스타트업 히치하이커  #1 스타트업에 낚이다

"내가 미쳤지..."

안녕하세요 양념나무님,
저희 회사에 관심 가져주신 점 감사드리며, 면접관련 안내 드립니다.


1.

2017년 12월

얼어붙은 취업시장 만큼이나 추웠던 겨울.


당시 청년실업에 크게 일조하고 있던 난 오랜 기다림(서류 광탈, 인적성 불합격, 1차면접 불합격, 최종면접 불합격 등...) 끝에 게임회사 두 곳의 최종합격 통보를 받았다. 직무는 인사담당.


비록 한 곳은 얄팍한 연봉 탓에 월급을 받아도 벚꽃마냥 흩날려보지도 못할 노릇이었고, 다른 한 곳은 판교에 위치해 있던 터라 출퇴근만으로 영화 두 편씩은 부실 수 있을 기세였다.


그럼에도 당시 나에겐 사회초년생다운 순수한 열정(이라 쓰고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같은 게 있었고, '사람이 좋아 인사직무를 희망하는' 박애정신 투철한 취준생들이 넘쳐나는 이 바닥에서 0명(=1명)을 채용하는 인사담당 입사는 어떤 어려움도 꿈과 희망의 행복회로를 작동시킬 이유가 되어주었다.


드디어 나도 불합격을 당하는 입장에서 불합격을 시키는 입장에 설 수 있다는 사악한 생각에 들떴을 무렵, 한 회사로부터 서류 합격 및 면접 관련 안내 메일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양념나무님,

저희 회사에 관심 가져주신 점 감사드리며, 면접관련 안내드립니다."


일정한 포맷을 갖추고 있는 보통 기업의 합격메일과 달리, Office Word에서 방금 막 휘갈긴 듯한 굴림체에서 인간적인 향기가 풍겼다.


이때 난 깨달았어야 했다.

이 굴림체는 회사 HR 체계가 황무지 상태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당장 입사하면 폰트부터 바꿔야했다.


물론 평범한 취준생에게 폰트만으로 회사 견적을 알아내는 안목따위 존재할리 만무했다.


입사할 곳이 이미 있는 상태였지만, 마지막으로 지원한 회사이기도 했고 채용공고상 사무실 사진이 예뻤던 기억이 나서 면접에 참석하기로 했다. 면접도 한 번만 하면 됐고, 심지어 면접관이 CEO라고 말하니깐 뭔가 신기하잖아?


2.

입사 할 수 있는 회사가 이미 있던 터라 두려울 게 없었던 나는, 회사를 상대로 면접일자를 두 차례 변경하는 아주 거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 일정을 조율해준 사람이 오늘까지 내 상사로 있을 사람이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면접 하루 전, 회사 측에서 보내준 기업소개서(정확히는 영업제안서...)를 한 번 훑어봤는데 글쎄.

무슨 말인지 1도 이해를 못했다. 굴림체 메일에서 "부담 없이 가볍게 읽고 와주시면 된다"고 말했는데, 괜히 읽고 부담만 생겼을 정도다. ㅇ..인플루언서가 뭐야? BOT은 뭐고?


그렇게 내가 면접 가는 회사가 도대체 뭘 하는 회사인지, 그 이전에 뭐하는지도 모르는 데 입사지원한 나는 뭘 하는 놈인지 회의감을 느끼며 회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

......


사무실에는 열댓 명의 사람들이 나를...개무시했다.

한겨울인데도 식은땀 흘리며 쭈뼛거리고 있는 꼬라지가 누가 봐도 입사지원자인데, 업무에 열중하고 계신 직원 분들께서는 내 존재조차 모르는 듯 싶었다. 아니면 그냥 일어나기 귀찮았거나.


그렇게 1시간 같은 1분을 사무실 입구에서 허비한 입사지원자A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제일 가까운 직원에게 관심을 구걸해보려 했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기면서, 나의 눈길은 자연스레 책상 위 놓여 있는 열 종류의 건강보조식품으로 향했다.


...

이대로 도망칠까?


혹시 이곳은 월급의 대가로 시간뿐만 아니라 생명력까지 요구하는 건 아닐지 두려움을 느낄 무렵, 건강보조식품을 잔뜩 구비한 건강마니아가 나의 희미한 존재감을 인지하고 인사를 해주었다.


"혹시 XX 업체 담당자신가요?"

이 인간이 도대체 뭐라는 거지? 내가 건강기능식품 판매원인줄 아는 건가?

"아닌데요. 면접보러 왔습니다."

"저희 회사로요?"

...아니 그럼 내가 1층 카페 아르바이트 면접 보러 온 걸 헷갈려서 여기로 왔겠냐?

"네."

"아 잠시만요"


혹여 이 모든 바보스러운 과정도 실은 면접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음모론을 제기하며, 나는 자본주의 미소를 짓고 1분을 기다린 끝에야 비로소 냉동창고마냥 추운 미팅룸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물 한 잔도 주지 않은 채 건강마니아는 떠나버렸고, 난 이 차디찬 추위 역시 나의 열정을 시험하기 위함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다시 5분을 기다렸다. 내가 미쳤지.


추위 속에서 어째서인지 냉동삼겹살이 떠오를 무렵, 건강마니아에 비하면 제법 나이스하게 생긴 사람이 들어와 명함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오, 젊어 보이는데 CEO였다.

문을 닫고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은 "뭐야 왜 이렇게 추워, 안 추우셨어요?"였고. 하나도 괜찮지 않지만 "괜찮습니다"를 말해야 하는 입사지원자는 이 추위 속 열정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를 냉동창고에 처박아 넣은 건강마니아를 입사하면 기필코 죽이리라 다짐하며, 대표와 함께 면접이고 뭐고 일단 몸을 데우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자 그제야 본격인 면접이 시작됐다.


아니, 시작된 줄 알았다.


3.

"면접은 어땠어?"

이제는 "자니?"라는 안부 문자 외에는 어떤 연락도 건넬 수 없게 된 '전 여자친구이자 당시엔 여자친구'가 책을 읽으며 내게 물었다.

"음...모르겠어. 뭔가 여러가지로 이상해. 건강기능식품도 그렇고..."

"이상하다고? 건강기능식품은 또 무슨 소리야."

안경을 내려놓고 혹여 내가 이상한 다단계 회사에 간 건 아닐지 우려하는 그녀.

"아니, 여러 가지로 다 이상했는데...일단 면접도 대표 얘기만 듣고 끝났어."

"어느 정도인데?"

"1시간 동안 난 10분 정도 얘기했을 걸? 대부분 자기 회사 사업설명이랑 어떤 식으로 발전시킬 건지 막 얘기하더라."

"사업설명은 좋은데, 그럼 넌 거기 입사해서 뭘 하는데?"

"건강기능식품 죽이는 거랑, 따뜻한 방에 손님 안내해주고 물도 떠주는 거"

영문모를 소리만 늘어놓는 인간이 자기 남자친구라는 현실에 씁쓸함을 금치 못하는 그녀. 그 한심한 눈빛을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 같아 보충 설명을 하기로 했다.

"글쎄, 그냥 나 입사하면 나 하고 싶은 거 하라는데. 자기네는 아직 HR 없다고."

"뭐야 그럼...혼자서 A부터 Z까지 다 해야 한다는 거잖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난 내가 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만 앞섰는데, 그녀는 내가 앞으로 겪게 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길게 볼 것도 없이 그녀의 말은 옳았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렇지, 그런데 사업설명을 들어보니 제법 전망있는 회사인 거 같아. 대표도 되게 사람 좋아 보였고."

반은 맞고 반은 틀....

"그래도 네가 HR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닌데, 혼자서 괜찮겠어?"

"처음엔 힘들겠지만 그래도 내가 무언가를 직접 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데...내가 또 한 똑똑 하잖..."

그녀는 어차피 조언을 들을 생각도 없는 남자친구에게 이내 흥미를 잃고 다시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의 향후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칠 결정인 만큼, 아포가토를 먹으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분명 스타트업은 여러모로 리스크(회사 부도, 체계 없음, 건강기능식품 마니아, 냉동창고 등)가 있을 테지만 규모가 큰 회사에서는 쉬이 느낄 수 없었던, '성장한다'를 직접 경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다. 회사가 클 거라는 기대,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성장할 거라는 기대.


그렇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회사 측에서 (역시나) 굴림체의 오퍼레터 메일이 왔다. 근데 근무조건을 보니 수습기간 있고, 월급은 이게 월급인가 싶고, 당장 다음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라 하고...앞서 합격한 두 기업에 비하면 모든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나는 그리 오랜 고민을 하지 않고 입사를 하겠다는 회신을 보냈다.


"나, 스타트업 한 번 다녀볼래. 스타트업 인사담당자, 뭔가 있어보이지 않아?"

"일 복만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잘 어울려. 적어도 네가 대학생 때부터 생각해온 '사람냄새 나는 HR'은 해볼 수 있겠지."

"잘할 수 있을까?"

"뭘 할 줄 아는 게 있어야 잘하든 말든 하지."

그 솔직함이 참 매력적이지만 뼈 때릴 때 공격력도 인상깊은 그녀.

"아, 아무튼. 그래도 할 수 있는데까지는 노력해볼게."

"응, 잘할 거라 믿어."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의 크리스마스를 보낸 끝에.


12월 26일 화요일

스타트업에 첫 발을 내딛었다.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입사한 스타트업에서 어느 덧 3년차 인사담당자가 되어버린 양념나무라고 합니다.


'스타트업 히치하이커'는 10명 남짓 스타트업에 합류해 우여곡절을 겪으며 회사도, 저도 함께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으려 하는 곳입니다. 사회초년생이자 스타트업 인사담당자로서 느꼈던 여러가지 즐거웠던 일이나 힘들었던 일, 스타트업계의 현실 등을 하나 둘 들려드려볼 예정입니다. 동종업계 종사자들에겐 심심치 않은 위로(?)와 응원을, 스타트업계 취업/이직을 고민하시는 분들께는 이 바닥이 어떤 곳인지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는 창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여전히 회사가 가야 할 길도 멀고 제가 해야 할 일도 산더미(...)지만 돌이켜보면 10명 남짓의 구성원이 어느덧 60명이 되었다는 것, 냉동창고 미팅룸뿐인 사무실에서 4개의 미팅룸을 갖고 있는 따뜻하고 아늑한 사무실로 이사를 온 건 무척이나 놀라운 경험입니다. (연봉인상률도 보통 회사에 비해선 제법 놀랍습니다)


만들어진 틀 위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편안한 삶이 있는가 하면 성장과 성공을 이루기 위해 편안함을 잠시 뒤로 미루는 삶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2017년의 전 후자를 택했구요. 스타트업은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비즈니스에 대한 확신과 기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그렇기에 처음부터 모든 걸 직접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스타트업은 10년 동안 해야 할 일을 1년만에 해내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무작정 더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똑똑하게 일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남들과 똑같이 주어진 시간에 훨씬 더 높은 성취를 거두기 위한 고민은 필연적으로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내게 만듭니다.


스타트업 구성원들의 몰입 1년은 10년의 성과를 만들어 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노력을 아무나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속한 끝에 그들은 남들보다 빠른 압축성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가 발행할 글은, 그런 삶을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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