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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념나무 Mar 21. 2020

스타트업 히치하이커
#2 환영받지 못한 자

"문 좀 열어줘..."

그들은 날 반기지 않은 게 아니다.
그저 어떻게 반겨줘야 할 지 몰랐던 것이다.

 

1. 

2017년 12월 26일 화요일

첫 출근.


유독 춥고, 인도가 온통 얼어붙은 빙판길로 뒤덮인 겨울이었다. 

그 날 출근 빙판길에는 한 몸 던져 자빠진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의 손을 잡아주려다 자빠진 남자친구가 있었고, 그런 그들을 비웃으며 지나가다가 바로 옆에서 자빠진 내가 있었다. 압구정로데오 빙판길은 상상 이상으로 미끄러웠고, 쪽팔렸다.


'매일 아침, 알람 소리를 듣고 깨어나 출근을 하는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꽤 대단한 존재일지 모르겠다'는 감성 터지는 글이 왜 하필 빙판길에 자빠진 채 떠오른건지 모를 그런 아침이었다.


2.

며칠 전, 난 스타트업 대표로부터 입사제안을 받았고 큰 고민 없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

안내받은 출근일시는 12월 26일 오전 10시


[2017년 12월 26일 오전 9:22]

압구정로데오에 위치한 회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니, 정확히는 문 앞에 도착했다.

검은색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회사 대표는 내게 입사를 제안했으면서 정작 중요한 철문 비밀번호는 알려주지 않았다. 면접 때도 그렇고, 이 회사는 어째 매 순간이 고난과 시련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첫 출근부터 빙판길에서 자빠지고, 한 겨울 사무실 문 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 내 신세를 한탄하며 보내길 15분. 계단을 하나 둘 밟으며 2층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는 흡사 구세주의 강림.


입사 첫 날 첫 인상이 무척 중요한 걸 알고 있는 만큼, 추위로 마비된 얼굴신경을 다급하게 움직여 사람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았다.


구세주인 남자는 이내 계단을 오른 끝에 문 앞에 서 있는 날 올려다 보았다. 그러고는 누가 봐도 신입사원을 환영해주는 미소가 아닌, 어째서인지 경계하는 듯한 표정으로 날 흘겨봤다. 어이, 지금 내 눈 피했어?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그때 그 추위에서 내가 지은 건 미소가 아니라 경련이었던 것 아닐까. 인상도 별로 좋아보이지 않은 애가 경련까지 떨면서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면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무튼.

기괴한 웃음을 짓고 있다는 자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살고자 하는 마음에 적극적인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

"혹시 이 회사 직원이신가요?"

"(끄덕)"

"오늘 처음 출근하게 된 양념나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아'라는 한 마디 뿐. '근데 이 사람은 왜 자꾸 내 눈을 피하는 거야?' 같은 의구심도 들었지만, 우선 추위에 돌아간 입부터 제자리로 돌려놓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난 묵언수행 중인 구세주께서 날렵한 손가락 놀림으로 출입문 잠금을 해제할 수 있도록 문 앞에서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나의 의도를 읽은 건지 묵언수행 구세주는 남은 계단을 올라와, 그대로 문 앞에 섰다.

...

......

1초.

2초..

3초...

4초....

5초.....

"저기, 왜 그냥 가만히 서 계세요?"

5초의 인내심 끝에 나는 그에게 물었다.

"...몰라서요"

뭐?

"뭐?...아니, 뭐라고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이 입 밖으로 나갔다.

"비밀번호를 몰라서요..."


아, 그는 구세주가 아니라 그저 묵언수행을 하고 있는 직원에 불과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다음 구세주를 하염없이 기다렸고, 어째 혼자 있을 때보다 기온이 5도는 더 떨어진 거 같은 썰렁함에 내 생각과 말로 이 분위기를 전환해보려 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3.

이대로 나도 묵언수행을 하는 수도승이 되는 건 어떨까 고민해보고 있을 무렵, 드디어 진짜 구세주인 여성 직원 분이 출근해서 문을 열어주었다. 묵언수행남은 소리 없이 바람처럼 사라졌고, 여성 직원 분은 친숙한 냉동창고로 날 안내 해주었다. 물론 그녀는 나를 건강기능식품 판매업체 담당자로 오해하지 않았으며, 히터도 켜주고 물도 가져다 주었다.

"그럼 편히 쉬고 계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 회사에서 처음으로 정상적인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나는 내심 안도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날 이후로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그 날이 마지막 근무였던 걸까? 아니면 그냥 도망간 걸까? 진실은 여전히 미궁속에 빠져 있다


이제는 내 안방 같은 냉동창고(미팅룸)에서 다시 30분 정도를 기다리며 '회사생활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회사생활이 참 힘들구나'를 실감할 무렵, 드디어 회사 튜토리얼 가이드 NPC가 등장했다.

...

......

그는 내가 두 차례 면접 일자를 바꾸는(사유는 모두 숙취때문이었다) 갑질에 놀아난 피해자이자, 도저히 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영업 제안서를 굴림체 메일로 '면접 전에 가볍게 읽고 와주시면 됩니다'라고 말한 장본인이었다. 


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건데.

여러 가지로 서로에게 첫 인상이 참 별로였을, 하필 이 사람이 내 상사란다. 


"안녕하세요, 회사 사업총괄을 맡고 있는 C입니다.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거고요."

"아, 안녕하세요."

"회사소개는 면접 때 들으셨을 테고, 저는 BM이나 매출구조 등 몇 가지 사항을 알려 드릴게요."

"네."

"아참 그 전에, 영어 이름은 정하셨나요?"

뭔 영어 이름? 여기 한국인데? 

"영어 이름은 왜요?"

"저희 회사는 영어 이름으로 호칭을 부르고 있어요."

뭐야? 여기가 무슨 월스트리트인스티튜트코리아야?

당황해서 정신머리 출타한 내 모습을 보던 C는 이내 "혹시 못 들으셨어요?"라고 물었다.

"네, 몰랐어요."

출입문 비밀번호도 못 들었는데 그걸 들었을 리가 없잖아?

"그럼 지금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당장요?"

"네, 생각하시는 동안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이렇게 내 이름의 가치는 고작 C의 장실타임 정도에 불과한 건가 하는 생각이 낮게 일었으나, 그의 빠른 발걸음을 지켜보면서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음을 깨달았다. 당장 떠오른 이름은 스미스, 샘, 존, 메리 등 초등학교 영어교과서 주인공들이었고, 리암 니슨같은 간지나는 이름도 고려했지만 여자친구가 납치당할 거 같아서 그만뒀다.


빠른 발걸음 만큼 일처리도 신속한 C는 금세 자리로 돌아왔고, 마치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줬다는 얼굴로 "정하셨어요?"라며 더 이상의 유예를 주지 않았다.

"딜런으로 하겠습니다."

하필 떠오른 게 미드 모던패밀리에 등장하는 심각하게 멍청한 남자 조연이라니.

"좋아요 딜런,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회사설명을 좀 해드릴게요."

딜런? '님'자는 어디다 팔아 먹고 대뜸 편하게 부르는 거지?

[참고사항] 영어 호칭 사용 시에는 뒤에 '님'을 붙이지 않습니다. ex. 딜런(O), 딜런님(X)

여기까지 오는 데 참 우여곡절이 많았구나 회상하며, 나는 C의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펜과 노트를 꺼냈다.


[30분 후]


결과적으로 난 펜과 노트를 꺼낸 채 C의 모든 말을 놓치고 말았다. 영업 제안서를 부담없이 읽고 오라는 말 만큼이나 '참 쉽죠?' 같은 어조로 뭘 알려 주는데, 밥 아저씨가 아니었던 난 영문도 모른 채 연신 고개만 끄덕여야 했다. 

이미 영업 제안서도 읽어봤고 대표 사업설명도 들었지만, 그럼에도 생각보다 비즈니스모델이 복잡했고 그 이상으로 난 멍청했다. 그럼에도 C로 하여금 자기 팀원이 백치라는 충격을 벌써부터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자리로 안내 해드릴게요."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전 여기서 뭘 하면 되죠?"

"일단은 채용이랑...음, 저도 인사업무는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직원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대표도 C도 나도 나의 존재의의를 알지 못한 채 안내 받은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일단 영업 제안서랑 적당히 공유되어 있는 폴더들 열어서 보세요."

그러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버린 C.


이런 C...

읽을 때마다 부담이 되는 그 영업 제안서를 또 읽으라고?

그 이전에 이 사람은 내가 인사담당자가 아니라 영업담당자로 착각하는 거 아니야?


모든 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신입사원 딜런의 스타트업 생활은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양념나무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인 '환영받지 못한 자'는 모든 게 불안하고 두려운 입사 첫 날, 제가 겪은 몇 가지 크고 작은 불편함(?)을 담았습니다. 당시 회사는 아직 신규입사자가 많을 때가 아니었던 만큼, 당연히 입사자를 위한 별도의 프로세스가 마련되어 있진 않았습니다. 물론 당시 제겐 여러모로 당혹스러운 경험이었지만, 사실 그들은 절 반기지 않은 게 아니라 어떻게 반겨줘야 할 지 몰랐던 것 뿐이었습니다. 또한 엄밀히 말해 그런 신규입사자를 맞이하고 그들의 성공적인 합류를 돕기 위해 인사팀이 존재하는 걸 테죠.


하나 둘 신규입사자가 생기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제 저희 회사도 신규입사자를 위한 배려를 조금은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입사자를 환영하기 위해 파티까지 열어줄 수야 없을 노릇이지만, 적어도 그들로 하여금 회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만큼은 줄 수 있게 하려 해요. 신규입사자를 위한 별도의 세션이 마련되어 있고(C는 이제 훨씬 쉽고 친절하고 자세하게 교육을 해주고 계십니다), 더욱 체계적으로 프로세스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물론 영어 이름도 입사 며칠 전부터 미리 고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개명도 할 수 있습니다(웃음).


회사 관점(대표, 인사담당 등)에서 이번 글은 입사자의 적응과 빠른 합류를 위해서라도, 입사 전부터 입사까지의 모든 경험적 과정을 제대로 관리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는 걸 아셨을 겁니다. 

반대로 규모가 크지 않은 보통의 스타트업 합류를 이제 막 하셨거나 준비 중인 분들은, '나'를 위한 시간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너무 섭섭해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스타트업은 대기업처럼 새로운 사람을 위해 몇 날 며칠을 할애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한 별도의 인력이 없고, 모두 각자 자기 본연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짬짬이 챙기는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입사자를 위한 교육이 생기고, 인력이 배정되겠지만 그 전까지는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지탱하는 형태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잊지 마세요, 그들은 여러분을 반기지 않는 게 아니라 어떻게 반겨야 할 지 그 방법을 아직 모르는 것 뿐입니다. 모르면 알아가고, 프로세스가 없으면 만들면 그만 아니겠어요? 스타트업은 그런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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