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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필런 Aug 13. 2019

혹시... 뇌에 필터 기능이
부재하신지요

#직장인_헛웃음_에세이 <좋은 아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래도 최부장이
집에서는 좋은 아빠래”


커피를 마시며 말하는 그의 그 말이... 나는 그렇게도 거슬렸다... 

별것도 아닌 일로 최부장에게 꾸지람을 받은 뒤였다. 

내 입사동기는 나름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한 말이었지만 어쨌든 그 말이 너무 거슬렸다.  


사건의 발달은 이랬다. 

다른 부서와 함께 협업하는 사업에 대한 홍보자료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 그 과업은 내가 수행하게 되었다. 홍보자료의 내용에서부터 구성 디자인까지 총괄해야 하는 상황이다. 절차에 맞게 내용과 구성 작성 후 두 부서에게 모두 컨펌을 받았다. 다음은 디자인. 디자인은 누가 뭐래도 전문가의 영역이다. 특히나 외부로 나가는 소개자료는 더욱이 그러하다. 나는 우리 회사와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디자인 외주업체를 통해 3개의 시안을 받았다. 3개의 디자인은 모두 만족스러웠다. 업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디자인 업체라 크게 걱정을 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두 부서원들은 모두 엄지손가락을 내 보였다. 

하지만 협업하는 부서의 최부장에서 막혔다. 

생각 없이 말하기, 그리고 뭐든지 아는 척하기로 유명한 최부장.


“아니지. 이런 디자인으로는 고객에게 어필되지 않아. 자고로 디자인이란 가독성이 생명이야. 글밥이 많아야지”

‘가독성과 많은 글밥이 공존할 수 있을까?’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번 자료는 인포그래픽을 활용했기에 누가 봐도 이해하기 쉽게 만든 자료였다. 그는 최대한 글을 줄여서 쉽게 사업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자료를 이해 못하는 중이었다. 물론 디자인에는 정답이 없다고 하지만 최부장의 제외한 거의 모든 직원이 엄지를 치켜올리지 않았던가. 이후 최부장의 말은 계속되었다.


“내가 딱 스탠다드야 스탠다드. 당신 너무 트렌드만 따르는 거 아니야? 디자인 업체에 말해서 시안 좀 몇 개 더 달라그래”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우리 두 팀 중 가장 선임인 최부장의 말이니 주변 다른 부서원들도 딱히 의견을 달지 않는 듯했다. 그저 나를 측은하게 바라볼 뿐. 


tvN 드라마 <미생> 중



며칠 뒤 

그가 원하는 줄글 형태의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미리 다른 부서원들에게 공유해 보았지만 이번 디자인에 대해 다들 엄지를 아래로 내렸다. 아무리 글을 짧게 줄이더라도 사업 프로세스 자체가 복잡하기 때문에 영 적합지 않는 디자인이라고 나 역시도 생각했다. 최부장이 디자인을 그윽하게 바라본다. 무슨 일인지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리고 종이가 얼굴에 붙을 정도로 가까이 갔다 대며 내용을 살펴본다. 그의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이건 아니지 알아보기 어렵잖아. 이렇게 글이 많으면 어쩌라고, 그 요즘 뭐야 그림으로 만화처럼 설명하는 거 있잖아... 그거 몰라?? 아.. 요즘 트렌든데 말이야..”

“인포그래픽요?”

“그래 그거, 그거랑 막 비주얼 싱킹인가 뭐 그런 거 있잖아. 내가 이래 봐도 요즘 젊은 사람들 트렌드 빠삭하다고. 내가 말이야 우리 딸이 대학생인데.... (어쩌고저쩌고)”

최부장이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게 한두 번이었던가. 사실 그는 아무 디자인으로 제작해도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이다. 내가 괜히 최부장까지 보고한 게 애초의 화근이었다. 나는 거기서 한번 더 참고 그저 자리를 피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의 말을 잘랐다.


tvN 드라마 <미생> 중


“부장님, 제가 지난번 보고한 자료는 기억하시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게 인포그래픽이라구요”

최부장의 얼굴이 빨개졌다.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아는 척 쟁이인 그의 치부를 찌른 것이다. 최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보다는 조금 더 높고도 큰 목소리로 일장 연설이 시작된다. 


“아니, 내가 시키지 못할 거 시켰나? 그리고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야? 상사한테 말이야!”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자꾸 말을 바꾸시니까...”

“여러 개 시안 받자고 그러는 거잖아, 그게 뭐 잘 못 된 거야? 어차피 협력업체한테 그냥 전화해서 맡기면 되는 일 가지고 이게 뭐 하는 거야? 아직도 일 그거밖에 못해? 나 20년 차야, 빼꼼하게 내가 다 안다고, 내 말 들으란 말이야! 나 때는 말이야...” 

이 대목부터 나는 '오늘 퇴근길에 와이프가 마트에 들러서 사오라고 했던 물건들이 뭐였더라'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생각보다 너무 오래 떠들어대는 바람에 그 품목들이 마트 어디쯤에 있는지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지나갔다. 



며칠 뒤 

몇 개의 시안을 더해 가져 갔지만 결국 최종 선택되어진 것은 제일 처음에 보여준 그 시안이었다. 


“그래, 사실 첨부터 이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었어, 수고했어. 그리고 지난번 일은 안 과장이 반성해야 해. 내가 해준 조언 잘 새기고, 나니까 이 정도로 넘어가는 거야 나 때는 말이야...”


그의 세치 혀 하나 때문에 시간은 시간대로 흘렀고, 많은 사람들이 고생은 고생대로 했다. 나중에 최부장 팀원에게 들었지만 그와 일하면 누구라도 이런 상황은 허다하다고 들었다. 그의 대부분의 말들은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오기에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혹은 했는지 기억을 못 한다고 했다. 그런 그는 그놈의 혀를 쭉 빼고 싶다고도 했다. 


tvN 드라마 <미생> 중


“그래도 최부장이
집에서는 좋은 아빠래”


그런데... 그런 그가. 집에서는 좋은 아빠라고? 

그래서 뭐 나보고 어쩌라는 말인가.

그가 집에서 좋은 아빠건 남편이건 나랑 무슨 상관이야.

참으로 오지랖도 넓다.

그 사람의 집안 사정까지 알아주는 내 동기 녀석. 


역시 사람은 무엇보다도 입이 문제다 입이. 그리고 그 입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말까지. 

할 말이 없을 땐 그냥 입을 다물어 주는 게 상책이다. 



함부로 아는 척하려 하지 마라. 함부로 공감하거나 위로하려고도 하지 마라. 
적어도 뇌에서 필터링할 자신이 없으면.



https://5seung.blog.me/221601462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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