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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 Sep 02. 2017

나는 어떻게 간호사가 되었나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저는 정말로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뚜렷한 목적의식은 없었지요. 원대한 포부가 있다거나 (UN에서 일하고 싶달지...), 특정 직업을 꿈꾸거나, 상위권 대학에 욕심이 있다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연극반을 할 땐 '배우 할까?' 생각했고, 방송반을 할 땐 '아나운서 할까?' 생각하는 그런 애였습니다. 국문학과 출신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책 읽는 걸 좋아했고, 자연스레 고등학교 때 문과를 택했습니다. 친구들이 특정 대학을 목표로 공부에 박차를 가하자, 일단 열심히는 하자 싶어 '그냥' 공부했습니다. 누굴 닮았는지 수학을 지지리도 못했는데, 엄만 수학 점수만 오르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며 수학 과외를 시켰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쓸모였지만요.


"너 간호사 하면 잘하겠는데... "

볼일이 있어 교무실에 들렀는데 담임 선생님이 툭, 던진 말입니다. 아무런 근거도 논리도 없었습니다. 그냥 (이미지가) 어울린다고 했습니다. 수능 점수가 나왔고, 저는 막연하게 신방과를 생각했는데 엄마가 펄쩍 뛰었습니다.


"신방과, 국문과, 문창과가 얼마나 취업이 어려운지 아니? 차라리 교차 지원해서 간호학과 가."

결혼해서 애 낳고도 얼마든지 재취업이 가능하고, 전문직이라 밥그릇 걱정 안해도 된다면서요. 그간 모아둔 신문 기사까지 보여주며 간호사라는 직업의 전망에 대해 늘어놓았습니다.

음, 그렇군! 그렇게 저는 별생각 없이 간호학과에 갔습니다.


어찌어찌 4년을 보내면서, 다들 빅 5 병원 (서울대, 세브란스, 삼성, 아산, 성모)에 가고 싶어 하니까 저도 '있어 보이는 곳'을 한 군데 골랐습니다. 토익 점수를 따고, 병원의 미션과 비전을 외우고, 면접을 준비했습니다. 심지어 혼자 병원 투어도 갔지요. 왠지 그 병원이 저랑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환자를 대상으로 장사를 한다는 기업 병원보다는 훨씬 신뢰가 갔습니다.





얼마 전에 노트북을 새로 샀습니다. LG그램을 살지 뉴맥북을 살지 무려 일 년 넘게 고민했습니다. 당장 급한 건 아니었지만,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큰 지출이었습니다. 저는 맥북을 사용했던 남동생에게 틈날 때마다 이것저것 물었고, 그램을 쓰는 지인도 괴롭혔습니다. 괜스레 컴퓨터나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대생 출신들에게도 의견을 구했고, 인터넷에서 후기란 후기는 죄다 털었습니다. 내가 힘들게 번, 큰돈이 걸린 중대한 사안이었습니다. 후회 없는 선택,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었지요. 지인 중 한 명은 그래픽 디자인 같은 작업이 아니라면 맥북은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느려지지 않는 맥북을 추천했습니다.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는 노트북으로 주로 뭘 하게 될까? 지금이 아니라 나중엔? 하나를 선택했을 때 얻는 이득은 뭐고, 감수해야 하는 불편은 뭐지? 결국 저는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에 매우 만족합니다.


갑자기 웬 노트북 얘기냐고요? 저는 [백만 원 대의 노트북]을 사는 데에는 무려 1년을 꼬박 투자했으면서, [사천 만원 가량의 등록금 + 4년의 시간과 노력 + 첫 직장]은 거의 광고만 보고 덜컥 산 셈입니다. 다른 user의 경험도, 나의 needs도 아무것도 몰랐고, 대강의 시뮬레이션조차 돌리지 않았습니다.





첫 직장을 나온 후에야 '남의 말'과 '느낌'만으로 얼마나 성급한 결정을 내렸는지 실감했습니다. 미래를 알려면 과거를 보라고 했던가요? 저는 대학 생활을 돌이켜보고, 실습할 때의 경험도 곱씹어 보았습니다. 학생 때 관심을 가졌던 MBTI (성격유형검사 도구)도 더 깊이 공부했습니다. 수술방에서 일하면서는 MBTI 전문가 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땄지요. 그러면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지 조금씩 알아갔습니다. 이런 과정은 진로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정답은 모르지만,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가 브런치에 글을 써야겠다 결심한 건, 며칠 전 인터넷을 뒤져보니 여전히 양질의 정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국에 수많은 간호사들이 있는데 정작 서로가 원하는 정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병원 사보에 나오는 백의의 천사나 의료계 소식 말고, 간호사 개개인의 찐한 '사용자 경험 (User Experience)' 말입니다. 제 글은 그런 솔직한 후기이고 '그램을 살지 맥북을 살지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p.s. 

글에 없는 내용은 묻지 말아주세요! 제가 경험하지 않은 직무에 대해서는 답하기 어렵습니다. 학생 분들의 문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 경험의 한계로, 타 직종과 간호사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간호학과 지원 여부는 스스로 결정하셨으면 합니다. 제 글은 참고만 해주세요!





엄지 umji.let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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