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날 그들에겐 무슨 일이.....
<죄 많은 소녀>에는 소위 말하는 스타도,
그렇다고 흥미를 유발하는 자극적 스토리 전개도 없지만, 꽤나 강렬한 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영화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 실체는 무엇인가? 소녀의 처지에 대한 공감인가? 테마에 대한 동의인가?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두 번은 보기 힘들 만큼 강렬하지만 매혹적이다.
뭐에 홀린 느낌이다.
‘경민’이란 소녀의 투신과 실종. 과연 그날,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조사를 통해 투신 직전까지 같은 반 친구 ‘영희(전여빈 역)’가 함께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또 다른 친구 해솔(고원희 역)은 ‘경민’의 죽음이 ‘영희’의 말 때문이었다고 증언한다.
‘경민’이 자신의 우정 또는 사랑(동성애인지 까진 모르겠으나 CCTV에 두 사람의 키스 장면이
포착된다)을 죽음으로 증명하겠다고 하자 ‘영희’가 그럼 그러라고 했다는 것.
하지만 ‘영희’는 그건 그냥 해본 말이었고 진심은 아니었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자식을 잃은 슬픔과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민’의 엄마, 학교 친구들.
억측과 추측까지 겹쳐 그녀의 세상은 지옥이 된다. 수일간의 수색 끝에 ‘경민’의 사체가 발견된다, 실종이란 애매모호함에서 사체라는 구체성이 생겼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누구 하나도 위안을 받을 사람은 없다.
‘경민’의 장례식장에서 갑자기 ‘영희’는 자신이 한 진술을 수정해야 한다며, 형사와 선생님을 불러낸다. 자신도 죽을 생각이었는데 ‘경민’이 자신의 방법을 가로챘다는 황당한 진술을 늘어놓는다. 이미 자살로 결론을 낸 상황이라 ‘형사’와 ‘선생’ 모두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영희’는 장례식장에서 음독자살을 시도한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지만 ‘영희’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경민’의 어머니는 죽은 딸의 보험금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영희’의 치료비를 낸다. 얼굴조차 보기 힘들지만, ‘영희’가 죽음의 진상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 그녀는 매일 병원에 나타나고 ‘영희’를 자극한다.
‘영희’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 친구 해솔이 나타난다. 그녀는 불리한 진술로 ‘영희’를 곤란에 빠뜨린 바 있다. 그녀는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며 자신과 ‘경민’ 아 나누었던 비밀스러운 대화와 사랑을 고백한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변한 건 없다. ‘영희’는 학교로 돌아온 첫날 아무도 알 수 없는 수화로 자신은 자신의 죽음을 멋지게 완성하러 왔다고 고백한다. 수화라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한다. 그걸 알 수 있는 건 관객뿐이다.
경멸과 분노로 가득 찼던 ‘영희’의 일상은 조금씩 회복된다.
이 지점까지 다다랐을 때쯤 과연 감독이 무엇을 말하려는가 점점 궁금해진다.
한때의 오해가 시간이 지나면 봉합된다. 아님 무언가 반전을 꾀한다.
초조해질 때쯤 ‘영희’와 ‘한솔’은 ‘경민’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과연 이야기는 어떻게 봉합될 것인가?
여기서부터 머리를 굴렸지만 결론적으로 내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같이 식사를 하러 간 세 사람,,, 긴장 가득한 분위기 속 ‘영희’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내어
말을 시작한다.
과연 이 세 사람의 만남과 그 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영화의 기본 구성은 위와 같이 진실을 추적해 나아가는 구성을 취하고는 있지만 미스터리 해결에 방점을 찍고 있지는 않다.
감독이 주목하는 것은 ‘영희’라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이다.
자유의지가 있고 불가해한 존재인 인간이기에 그로부터 기인한 충동. 사춘기에 발생하는 통제 불능한 에너지, 우정과 사랑이란 감정에 대한 집착과 강박.
이로 인해 불안정한 그녀에게 친구를 죽게 만들었다는 타인의 비난과 혼재된 죄의식까지 겹쳐진 심적 상태 그것에 집중하라고 말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 영화를 보는 시간이 그리 유쾌할 수는 없다.
킬링타임의 시간이라기 보단, 곱씹고 곱씹으며 생각을 해보지만 고구마 같은 답답함.
외길을 가다 커다란 벽을 만난 느낌.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통제 불능의 상황에서 오는 무력감.
절대 진상에는 접근할 수 없다는 필패(必敗)의 정서에 영화를 본 후 관객은 사로잡힌다.
아마도 끝까지 진상을 알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경민’의 어머니(서영화 역). 그녀가 바로 우리 관객의 대변자가 아닐까 싶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패배자라는 죄의식.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하나가 아니라 채도와 명도가 각 사람마다 다른 스펙트럼으로 공유하는 것. 이것이 감독이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닐까?
물론 이 것은 필자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생각으로 스토리라인을 명확하게 정리해서
진상에 다다른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에게 정말 묻고 싶다. 과연 그날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영화를 본 관객마다 무슨 답변이 나올까? ‘경민’은 왜 누구 때문에 죽은 것일까?
영화를 보고 무심코 떠올랐던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이다.
광고업계에 종사하는 저자에게 끊임없는 창의력을 제공하는 원천은 독서라는데
피디로서 이 영화는 상업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체험을 통해 사고의 전환을 요구한다.
감독, 시나리오, 편집까지(크레디트를 보고 확인한, 아마 더 많은 역할을 했을 수도) 다재다능을
선보인 감독 김의석의 능력을 칭찬하고 싶다.
진중하고 뚝심 있게 영화의 테마를 밀고 나간 굳건한 중심.
저예산임에도 불구 치밀한 콘티를 통해 세련되게 뽑아낸 미장센 등.
앞으로 차기작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겠지만, 미래가 기대되는 아티스트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했겠지만 고난도의 심리 표현과 감정 기복을 연기해낸 이 영화의 연기자들도 칭찬해주고 싶다
특히 영화의 주연을 맡은 ‘전연희’와 어머니 역을 맡은 ‘서영화’는 그 가운데서도 발군이다.
강렬한 눈빛과 분위기로 관객의 폐부를 꿰뚫는 연기가 진한 여운을 남긴다.
모든 걸 떠 먹여주는 과잉친절과 어디서 본듯한 클리셰에 익숙해져 영화에 싫증과 따분함을 느끼고 있는 당신!! <죄 많은 소녀>는 잠든 당신의 감성을 흔들고 관성을 부수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거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