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의 생각 교환일기(3) '딸'

세 번째 이야기, '딸'이라는 이름으로

by 채원



시어머니 명희의 '딸' 이야기


딸로서의 나.

나는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삼평리에서 1952년에 태어났다.

위로는 오빠가 한 분 계시고...

나는 엄마의 첫째 딸이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딸로서의 나는 철부지였다.

나 자신만 위해서 살았던 것 같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다하면서 살았다.

서울로 음악회 가고, 서울로 백화점 가고,

자기 자신만 위해서 다른 사람은 생각할 줄 모르는 그런 나였다.


결혼하고서 나는 딸을 세명이나 생산했다.

딸 가진 엄마로서 마음은 언제나 좌불안석이었다.

조금만 늦으면 걱정이 앞섰고 험한 세상에 딸들은 언제나 위험한 시대에 살았다.

그렇지만 나는 딸들도 자기 목소리(?)를 내기를 바라면서 키웠다.

나는 딸들에게 정신적 풍요를 소유하기를 희망했다.

자기 삶은 자기가 책임질 줄 아는 그런 딸이기를...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직업을 소유하기를 바랐다.

딸들은 나름대로 멋진 직업을 가졌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딸 가진 엄마로서 나는 행복하다.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내가 살던 시대는 남아선호가 심해서

딸로서 태어나는 것이 죄(?)가 많다고 하던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남녀가 평등한 그런 시대에 모든 딸들은 살고 있다.

모든 세상에 딸들이여

우리도 멋있게 유리천장을 깨기를 소원한다.


-명희-

2021.03.09





며느리 채원의 '딸'이야기



엄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삶을 통틀어 제일 잘한 일은 너랑 희원이를 낳은 거야, 내 삶이 흔들릴 때 너희 둘이 있었기에 잘 버틸 수 있었어."


그 당시에는 든든한 딸이, 자식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는데- 내가 아이를 낳고 나니 엄마의 말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 더 알 것 같다.

그것은 내가 굳이 '딸'이어서가 아니라 엄마의 자식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지만- 딸로서, 동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은근한 위로가 조금 더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를 위로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서 내가 조금 멋있어 보였다.



딸 = 여자, 그리고 떠오르는 단어가 성차별. 어쩌면 이러한 사고의 흐름 자체가 성차별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세상으로부터 성차별을 직접적으로 받은 기억이 없다. 아니 어쩌면 지나치게 단단한 감정 근육을 가지고 성차별을 잘 무시하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이 단단한 감정 근육의 가장 큰 지분은 또 누군가의 '딸'인 우리 엄마에게 있다. 엄마가 성장시켜준 나의 삶은 '여자라서' 불가능했던 적이 없다. 막힘없이(?) 자랐다. 지금까지의 삶을 휘리릭 떠올려 보니 조금 나부대며 지냈나도 싶다.

학창 시절 내내 반 대표를 하거나, 학교를 대표하거나, 운동으로 대학을 진학하고, 혼자 여행 다니고, 혼자 외국으로 휙 떠나고, 회사를 입사하고, 그 안에서도 나름 원하는 것들을 잘 얻었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휴식을 취할 때도, 스타트업 회사에 일해보고자 할 때도 엄마는 "너를 믿어".


엄마가 믿기 때문에 더 믿을 만한 짓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조용히 다짐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엄마가 키워준 튼튼한 이 마음들을 다시 엄마에게 나누고 있는 것 같아 행복하다.

비로소 잔잔해진 마음을 서로가 나누고 있는 딸들이 되어 행복하다.


나에게도 딸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주고 싶은 것은

할머니처럼 스스로를 믿고, 또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첫 번째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나눌 수 있다.


love yourself, 나 자신은 내가 지킨다.

우리는 '딸'로 분류되기 전에 하나의 사람들이고, '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지금의 삶을 토닥이고, 스스로 기특해하며 살아간다. 그래도 나는 '딸'이기 때문에 조금 더 이해 가능한 '딸'들의 삶을 조금 더 응원한다. 헤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고맙게 여기며 더 많은 딸들이 기꺼이 활짝 피어나기를 바란다.


이제 나는 '딸'만이 될 수 있는 '엄마니까'

그래서 가능한 일들이 더 많지 않을까?


이렇게 또 엄마다운 마무리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