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8
<왜 부당한 위계질서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까>
1.
“김대리, 아까 팀장님 지시는 옆에서 보기에도 좀 억지스럽던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상관없어, 어차피 나도 박사원한테 시킬 거니까.”
무리한 오더가 떨어져도 즉각 바로 잡는 사람이 드물다. 합리적으로 소통하면 얼마든지 해결될만한 사안에 대해서도 그냥 가만히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본인도 아랫사람을 그렇게 부리면 되니까.
2.
“원래 이런 일은 막내가 다 하는 거야.”
요즘은 다르겠지만 예전 군대의 막내는 무척 힘들었다.
내무반에 처음 배치를 받으면 불만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상급자 여러 명의 별별 희한한 취향까지 고려한 맞춤형 개인비서 노릇을 해야만 했다.
공식 근무와 관계된 일이라면 몰라도 사적인 일까지 수발을 들어야 하니 욱하는 순간이 많았다. ‘내가 선임이 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악습은 무조건 없애야지.’ 굳게 결심한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내 밑으로 새로운 막내가 들어온다. “야호, 드디어 막내 졸업이다. 자, 인수인계해 줄 테니 잘 들어. 딱 한 번만 말한다.” 오히려 더 지독하게 군다.
3.
위계구조는 생각보다 무척 견고하다. 언뜻 보기에 말도 안 되는 규칙과 명령들이 난무하니 마음먹으면 한 순간에 싹 뜯어고칠 수 있겠다 싶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윗사람에게 말을 꺼내려고 하니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판단이 옳지만 상대의 지위가 높으니 논리가 통할지 알 수 없다. 모험을 걸어야 하나 갈등한다.
그 와중에 내 부담을 덜어 줄 희생양이 포착된다. 신입이다. 옳다구나 잘 됐다. 은근슬쩍 내 짐을 다 떠넘긴다. 어차피 나만 힘들지 않으면 그만이다. 결국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최상급자와 그 모든 억지를 떠안는 말단의 부조리만 남는다.
이 기묘한 현상을 다르게 설명해 보자. 10명이 이삿짐을 날라야 한다. 대장이 일을 골고루 나누어주면 전체 인원이 금방 일을 해치울 수 있다. 대장이 딴짓을 하며 2번 선수에게 떠넘기는 순간 망조가 시작된다. 줄줄이 사탕 릴레이를 거쳐 결국 10번 막내 혼자 모든 일을 다 하게 된다.
4.
한마디로 내 아래에 편히 부릴 수 있는 사람 한 명만 있으면 시스템에 대한 불만쯤은 얼마든지 속으로 꿀꺽 삼킬 수 있다. 내 위로 1명이 있든 100명이 있든 상관없다. 고스란히 내 아래로 넘기면 그만이다.
부당한 위계구조 전체를 뒤엎을 만큼 절실한 사람은 딱 한 명 10번 선수뿐이다. 중간의 8명은 모두 나 몰라라 하며 한 발짝 물러서서 자유를 만끽한다.
다들 한때 그 부당함을 겪었지만 그 불편했던 시간은 이미 다 지났다. 이제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이제야 내 손아귀에 들어온 이득은 그 힘들었던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긴다.
잃을 것이 있는 사람은 혁명에 쉽게 참여하지 않는다. 서로 눈치만 보며 몸을 사린다. 오히려 시스템이 이대로 계속 굴러가길 바라기까지 한다.
5.
“회사 관리 노하우를 알려드릴까요? 직원 수가 아무리 적어도 직책만큼은 전부 다르게 정하세요.”
내가 개원할 때 실제로 누군가에게 들었던 조언이다. 일단 위계구조만 다양하게 만들어 놓으면 그들끼리 알아서 폭탄을 돌릴 테니 관리자는 신경 쓸 일이 없다는 논리였다.
심지어 10번 선수조차 이 시스템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그래, 조금만 견디면 내 밑으로 누군가 들어올 거야.” 도대체 고양이 목에 방울은 누가 달 것인가.
25년 전 인턴시절 나는 그 바쁜 아침 6시에 상급자 영어공부를 위해 교육방송 녹음까지 해다 바쳤다. 나의 연차가 올라갈수록 도장 깨기를 했고 마침내 모든 규칙을 없애버렸다. 나부터 시작할 용기만 있다면 혁명은 의외로 쉽게 이루어진다.
*3줄 요약
◯위계질서가 부당해도 본인 아래 희생양 한 명만 있으면 시스템을 바꾸려 들지 않는다.
◯부당한 구조에서는 10명이 있어도 결국 막내 혼자 모든 일을 떠안는다.
◯혁명은 엄청 대단해 보이지만 나부터 변할 용기만 있으면 의외로 무척 간단하게 이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