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9 <선견지명이 저주처럼 느껴질 때>

by 호르몬닥터 권영구

@1549

<선견지명이 저주처럼 느껴질 때>


1.

“율곡 이이 같은 분이 내게도 멋진 조언을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그럴까. 누군가 당신에게 그런 대단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만 하면 당신 인생이 바뀔 수 있을까.


“지금 저한테 그런 행동을 하라굽쇼? 아, 그건 좀...” 무조건 이런 반응이 돌아온다.


2.

거꾸로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만약 율곡의 십만 양병설이 받아들여졌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잠시 상상해 보자.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금이 군대를 양성하기로 결정한다. 조선의 국방력은 엄청나게 강해진다.


“지금 조선은 너무 강해서 함부로 침략하기 어렵다고 사료되옵니다.”

첩자의 보고를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민에 빠진다.


어쩌면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같은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딪쳤다고 해도 작은 충돌 수준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3.

그렇다면 율곡은 영웅 대접을 받았을까. 아마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방팔방의 비난에 시달려 은퇴했을 수도 있다.


“전하,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고 있는데 군대가 왠 말입니까. 전쟁도 없는 태평성세에 사리사욕을 채우려 군을 양성하자고 한 율곡을 귀양 보내시옵소서.”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기억하는 전 세계 위인들은 모두 이미 벌어진 위기를 극복한 사람들이다. 엄청난 사건을 예방했다고 우리가 추앙하는 경우는 단 한 명도 없다.


결국 율곡이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전쟁이 터져야 한다. 남몰래 군을 육성하고 있다가 그때 짠 하고 출동하여 왜적을 무찔러야만 그가 칭송을 받는다.


4.

“지금 아드님은 정말 잘못된 습관을 갖고 있어요. 새벽 4시까지 게임을 하면 성장호르몬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키가 클 수가 없어요. 무조건 12시 전에 자야 합니다.”


1시간 넘게 환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설득에 성공했다. 아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되었지만 내게는 별 소득도 없었다.


“선생님, 너무 죄송해요. 저희 아이가 선생님한테 잔소리 듣기 싫어서 이 한의원 절대 안 온다고...”

엄마가 멋쩍게 소식을 전해주신다.


게다가 그 엄마의 말씀도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저희 아이가 작년에 키가 많이 컸어요. 역시 클 때 되니까 다 자라는데 괜히 걱정했네요.”


5.

내가 대접을 받으려면 방법은 하나다. 뻔히 보이는 건강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따로 적어놓는다. 건성으로 조심하라는 말만 건넨다.


3개월 뒤 그 문제로 다시 나를 찾아오시면 미리 생각해 두었던 치료법을 쓴다. 약을 쓰고 상태가 좋아지면 나는 돈도 벌고 명예도 얻는다.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냥 이렇게 살고 있다.


사람의 눈은 이미 벌어진 일만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예 볼 수가 없다. 선견지명의 안목은 때로 축복이 아니라 저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3줄 요약

◯위기를 예방한 사람은 칭찬받지 못한다.

◯안 좋은 일이 생긴 뒤 수습을 해야 박수를 받는다.

◯선견지명은 때로 재능이 아닌 짐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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