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장식 또는 장치로서 기록?(1)

- 메타적 관점에서 프리즘 스크립트로 본 조선왕조실록 -

by PRISM SCRIPT


유튜브에서 케데헨 열풍 관련 뉴스들을 보다 알고리즘의 안내로 어느덧 도착한 곳은 바로 1,000만 회 이상 조회 마크가 붙은 역사 유튜버의 영상!! 주제는 뭔가 하니 조선왕조실록이었습니다.


꼭 그 채널뿐만 아니더라도, 조선왕조실록의 제작 이야기나 실록에 나오는 흥미로운 일화를 주제로 다룬 비슷비슷 영상들도 많았는데, 그 영상들도 거짐 10만~100만 회에 이르는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튜브가 나오기도 전부터, 조선왕조실록은 압도적인 연속성과 방대한 분량, 편찬 과정의 독창성과 객관성, 보존 기술과 전승 방식, 인류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K 콘텐츠 기록저작물 중 최초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든 의문!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장기·연속·정밀 기록 체계를 갖춘 조선은 왜 왕이 바뀌어도 유사한 실수와 실패를 반복했을까? 그렇다면 실록 그 자체는 조선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글자로 쓰인 장식품인가 안전장치인가: 역사 프리즘으로 들여다본 실록>

조선왕조실록/국가기록원 이미지

조선왕조실록 편찬은 조선이라는 국가가 막대한 비용과 오랜 시간, 그리고 수많은 인력을 쏟아부어 완성한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기록 사업과 뚜렷이 구분되는 독특한 차별성이 있었으니, 바로 ‘왕조차 볼 수 없는 기록’이었다는 점입니다. 대개 최고 권력자는 권력의 정점에서 모든 정보를 독점하지만, 조선의 실록은 오히려 권력자가 가장 중요한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실록이 당시의 정보나 지식을 즉각 활용하기 위한 ‘기록’이라기보다, 블랙박스나 타임캡슐처럼 봉인된 일종의 ‘장치’였기 때문입니다.


반에 그런 친구 한 명쯤 있지 않습니까. 성적은 평범한데 노트는 예술인 친구. 예전에 제 급우 A가 그랬습니다. 같은 반에 있던 전교일등의 노트와 비교해 볼 때, 전교일등은 이미 선행학습이 잘 되어 있어서인지 악필에 핵심위주의 필기여서 참고해도 그다지 도움 되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 비해, 노트필기의 예술가였던 급우 A의 노트는, 노트 첫 장부터 목차, 개요, 날짜·시간까지 빈틈없이 일목요연하게 채워져 있고, 글씨는 정자체, 오탈자는 수정펜으로 칼같이 교정, 검·파·빨 볼펜으로 중요도에 따른 색 코딩, 선생님이 한 번이라도 “강조”한 부분은 형광펜이 하이라이트 된. 그야말로 저작권을 설정해도 무리 없을 만큼 잘 편집된, 그야말로 장인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험 성적이었습니다. 희한하게도 노트 작성자보다 그 노트를 빌려 벼락치기한 애들이 성적이 더 잘 나왔습니다. 교실구석에 숨어서 졸거나 자거나 만화나 보던, (저 같은) ‘수업 시간 낭인 또는 닌자’들이 중간·기말만 다가오면 그 급우의 노트를 빌리고 복사하기 위해 노트의 우수성과 특수성을 칭찬하고 뇌물을(분식이나 과자, 음료, 아이스크림) 바쳐가며 사정하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때도 일반고 다니는 한국 십 대의 지상목표이자 절대과제인 명문대 입학을 위해 치열한 성적경쟁은 있었지만 ‘니 성적 오를까 봐 내가 가진 정보 절대 안 가르쳐주’는 그런 이기적이고 표독스러운 문화는 지금보다 덜하였으며 무엇보다 그 급우 A가 착했기에 그는 떡볶이, 순대만으로도 마음을 열었고 성은을 입은 우리는 시험기간 동안 복사한 노트의 내용을 달달 외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자신의 걸작이 학급에서 그런 식으로 추앙받는 것을 즐겼을지도)


여기서 저는 조선왕조실록을 떠올립니다. 비록 미관말직이었더라도 고도의 직업윤리를 바탕으로 문서작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전문성을 가진 조선의 사관들은 말 그대로 국가 공인 ‘노트 장인’이었습니다. 회의·발언·쟁점을 사초에 숨김없이 기록했고, 왕이나 신하는 그걸 볼 수도, 고칠 수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실록은 권력견제 기능을 일부 가진 장치로서 역할도 보유하게 됩니다) 임금조차 생전에 열람 불가. 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사초·시정기·승정원일기 같은 1차 사료를 모아 실록으로 편찬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작 완성도만큼은 정말 세계 최고레벨이었죠.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실록은 콘텐츠의 활용보다는 프로세스와 완성도가 목적이었습니다. 결벽을 너머 강박스러울 정도였던 실록의 비공개 원칙 덕에 기록은 오염을 피하고 후대에 이르기까지 객관성과 독립성을 얻었지만, 조선왕들은 처절한 실패와 반성을 실록에서 직접 학습할 수 없었습니다. 즉 당대의 조선왕들에게 그 노트에 적힌 과거의 금과옥조 같은 기록들은 완벽히 차단되어 있어서 실록 속 교훈을 즉각 활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은 이를 보완하려고《국조보감》같은 실록의 발췌본을 왕에게 제공했지만, '아바타'를 용산 아이맥스 영화관 가서 입체안경 끼고 직접 보는 것과 핸드폰으로 유튜버가 리뷰한 10분짜리 영상 보는 게 천지차이 듯이, 편집 과정에서 비판은 완화되고 그 결과 선대의 경험이 정책에 체계적으로 반영될 수 없었으며 생생한 실패의 디테일은 희미해지곤 했습니다.


요약해 보면, 조선은 위의 급우 A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절대노트를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 시대를 자세하게 복원할 수 있죠. 그렇다면 조선의 실록은, 당대에는 장식품 역할이었는가? 하는 물음이 남습니다. 프리즘의 시선으로 실록을 분석한다면 이는 과장된 표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실록은 통치에 참고되는 정책 자료라기보다는 사실을 후대에 전하는 역사적 기록 장치의 성격이 매우 강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대 사회를 직접 개선했는가 하는 시선으로 실록을 관찰하면, 봉인된 기록장치인 실록은 도탄에 빠진 백성의 삶을 바꾸지 못했고, 구제도의 모순과 개선에 필요한 왕의 정책 결정을 교정하는데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 사실 기록을 보장하려는 제도적 선택이었으며 역설적으로 후대의 우리에게 조선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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