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부처, 노부나가 앞에서 만나다"

- 프리즘 스크립트로 보는, 생사를 건 기독교 vs 불교 디베이팅 배틀

by PRISM SCRIPT

인간의 사고마저 박사 급의 수준인 인공지능이 대신해 주는 현 시대!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시각으로 일본을 봅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당신은 색다른 프리즘 인사이트를 얻게 됩니다. 준비되셨나요.


전국시대의 막을 내리고 통일을 이뤄가는 혼란한 일본의 16세기는 (일본에서는 이 시대를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라고도 합니다. 전국시대가 끝나고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치세기간입니다.


도쿠가와가 에도막부를 개막하기 전 일종의 과도기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유럽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같은 나라들이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한 물자나 은의 교류에 그치지 않고, 기독교를 비롯한 서구의 정신문화까지 일본에 흘려보내게 됩니다.


이 시기 일본을 지배하던 정신문화는 불교와 토착신도였으나 남만선을 타고 온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일본인들은 서구의 사상과 문화를 접하게 되었고, 따라서 서구의 물질뿐 아니라 정신문명과도 맞닥뜨리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심지어 오오토모 소린이나 아리마 하루노부 같은 규슈 일부지역의 영주(다이묘)들은 선교사들의 포교를 영내에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단순한 교역을 넘어 당시 세속화된 일본의 불교와 그리스와 로마 철학을 잇는 깊은 신학적 뿌리의 충돌이 발생했다는 겁니다.


혹시 ‘장미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탈리아의 중세 역사학자 움베르트 에코가 쓴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14세기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내용인데요.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는 이 사건을 해결하며 중세 시대의 종교적 갈등과 철학적 논쟁을 깊이 탐구합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 속에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독교 교리와 결합해 신학 논리를 학문적으로 강화하는 과정이 등장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시기의 신학을 스콜라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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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변화와 운동이 연쇄적인 원인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며, 그 시작점에 스스로는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최초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이 존재가 바로 ‘부동의 동자’‘제1원리’로, 이 존재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 원리였습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하느님 즉 기독교의 신 개념과 연결해 그들의 신학을 발전시키려 했습니다. 그들은 부동의 동자와 제1원리를 신의 속성으로 재해석하며, 신이 모든 존재의 절대적 근원이자 창조주라는 믿음을 이성적 논리로 증명하려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중세 스콜라 철학의 대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존재를 다섯 가지 논증으로 정리한 ‘다섯 가지 길(Quinque Viae)’을 통해 신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런 스콜라 철학으로 무장된 예수회 선교사들이 1549년부터 일본을 선교의 황금어장으로 콕 찍어서 방문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선교전략은 매우 특이했습니다. 일본으로 간 예수회 선교사들은 교토(미야코, 당시 일본의 중심도시) 한복판에서 붉은 십자가를 들고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초코파이를 나누어 주며 교회로 오라고 유인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요즘 MZ 군인들은 초코파이가 아니라 햄버거를 줘야


그나마 종교활동하러 움직인다는데, 것도 롯데리아급으로 주면 매우 실망한다 함, 고기 안 먹는 불교에서는 뭐 주는지 모르겠음) 더구나 문제 많은 어떤 기독교 이단 종파처럼 러닝크루 등 각종 동호회를 모집한다는 구실로 회원들을 포섭하려 한 거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심리테스트를 해준다며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확성기나 초코파이 같은 질료(!)로 일본인들의 이목을 끌고 환심을 사는 간접적인 방법(이 방법은 현재 한국에서도 볼 수 있음) 대신, 각 지역을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들 입회아래 일본의 최고위 불교 승려들과 공개적인 장소에서 논쟁을 벌이며 제1 원리인 데우스를 공개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정공법을(이 방법은 국내에 기독교가 전파된 이래 단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음) 택합니다.


문제를 증명한다는 것은 특정 주장이 항상 참임을 논리적으로 보이는 과정입니다. 증명은 모든 경우에 대해 성립함을 보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단순히 답을 찾는 것 이상의 범위를 포함합니다. 증명은 엄밀한 논리를 통해 어떤 명제가 일반적으로 참이라는 것을 보여야 하며, 특정한 경우뿐 아니라 모든 가능한 경우에 대해 적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이등변 삼각형에서, 두 변의 길이가 같다면 그에 맞닿은 두 각의 크기도 같음을 증명하듯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인들의 이성을 설득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야마구치 종론*"’과 "에이로쿠 12년 종론*"에 대한 프로이스의 일본사와 노부나가 공기에 나오는 논쟁의 기록들


- 종론은 종교논쟁의 줄임말, 에이로쿠 종론은 심지어 유력 다이묘들이 관람하고 당시 절대 권력자인 오다 노부나가가 심판 보는 앞에서 불교 측과 기독교 측 대표가 나와 영혼과 삼위일체 등의 주제로 치열하게 맞붙음. 일본 시대극이나 애니에서 단골 캐릭터이자 국내에서도 친숙한 노부나가는 천하제일 무도회에서 1등 한(드래곤볼 아님) 전국시대의 폭군이자 패왕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지적인 호기심도 상당이 강했던 모양임-


"나는 당신들의 가르침과, 당신들이 말하는 만물 속에 존재하는 '제1 원리' 원리'에 대해 조금 들었습니다."


- 프로이스의 일본사 제4장 중 다이센보(大泉坊)라는 승려가 로렌소 수사에게 한말 -


"그러나 그것이 제가 설파하는 가르침 때문이라면, 이 도시에 학자나 권위자들이 많이 계시는 것은 잘 아시는 바입니다. 쿠보우사마 님께서, 저희가 진리에 대해 논쟁을 벌일 수 있도록 쿠보우사마 님 면전에서든, 또는 다른 공개된 장소에서든, 모두에게 명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논파된다면, 쿠보우사마 님께서 저의 가르침이 무익하고 국가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저를 추방하셔도 이는 정당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 프로이스의 일본사 제10장 중 가스파르 빌레라(Gaspar Vilela) 신부가 한 말. 일본 불교를 논쟁으로 압살 시킬 수 있다는 대단한 자신감이 엿보임. 참고로 쿠보우사마는 무로마치 막부 제1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 1536~1565) 임 -


"그들이 들어온 가르침과 비교하여 양자의 차이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명백한 근거를 가지고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각 종파의 오류를 밝혀야 한다. 그들이 이것을 이해하면, 각자의 이해력에 따라 삼위일체의 신비, 세계의 창조, 루시퍼의 타락, 아담의 죄에 대해 설명하고, 이어서 데우스의 아들이 현세에 출현하신 것과 그의 성스러운 수난, 죽음, 부활, 승천, 십자가의 신비한 힘, 최후의 심판, 지옥의 형벌, 그리고 천국에 받아들여진 자들의 행복에 대해 설명한다."


- 프로이스의 일본사 제18장, 데우스는 하느님을 지칭함-


"사제는 이에 대해 그 승려의 이해력에 맞추어 유형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고, 만약 데우스가 사대 원소로 이루어진 물질적이고 눈에 보이는 실체라면 그것이 어떻게 불합리해지는지를 설명했다."


- 프로이스의 일본사 제7장 -


등등


대단하지요? 무슨 델포이 신전 앞에서 청중에게 진리를 연설하는 소크라테스나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반박하는 교회학자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보듯이 예수회 선교사들은 당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公方様: 쇼군보다는 쿠보사마라고 불림)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 (足利義輝)를 만나 포교 허가증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지방 영주들에게 자신들과 불교 승려들 간의 디베이팅 콘서트를(논쟁) 주선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종교 논쟁은 일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일본의 불교는 본질을 깨닫고 진리를 체험하기 위해 깊은 직관과 명상적 사고를 중시했는데, 교리를 수호하고 이단을 심판하기 위해 그리스 철학의 논리학과 수사학을 학습하고 훈련받은 예수회 선교사들은 논쟁이라는 색다른 선교 방법으로 일본인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사고 체계를 소개한 것이죠.


오로지 이성만을 무기로 사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철학적 투쟁은, 논쟁을 주재한 오다 노부나가부터 관객이었던 일본의 지방 영주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물론 논쟁 이후 일본 불교계에게 밉보인 선교사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앞서 말한 오오토모 소린 (大友宗麟, 1530~1587)이나 아리마 하루노부 (有馬晴信, 1567~1612) 같은 일부 지방 영주들은 서양 문물과 사상체계에 매료되어 예수회의 포교를 자신들의 영지에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예수회는 규슈 지역에 신학교인 ‘세미나리오’를 설립해 현지에서 일본인 신학생들을 교육할 기회도 얻습니다. 기리시탄(전국시대 천주교 신자)들도 계속 증가하여 히데요시의 치세 때는 무려 20만 명이 훌쩍 넘어서게 됩니다.


조선이 건국 이후 주자학 중심의 유교 질서를 국가 이념으로 삼아 근대 전환기에 이르기까지 그 체계에 크게 의존했던 것과 달리, 일본은 조선보다 폭넓은 사상 체계를 접하며, 이를 바탕으로 메이지기에 ‘국체’ 담론 등 자국적 정신문화를 강화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일본 근대 정치사상 연구의 거장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에 따르면, 에도 막부 초기 조선을 거쳐 전래된 주자학은 막번 체제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고, 200여 년 뒤 사무라이 지식인들의 비판과 변형을 거쳐 서구 근대사상으로 향하는 사상사적 전개가 나타났다고 분석합니다.


이렇게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조선보다 400년 앞서 서구의 철학과 신학을 접한 일본 지식인들은, 총포와 같은 물질문명뿐만 아니라 사상과 학문이라는 ‘지적 충격’에도 대응할 수 있는 일종의 면역력을 기를 수 있었던 셈입니다.


* 야마구치 종론 (1551년)


내용: 야마구치에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동료인 코스메 데 토레스와 후안 페르난데스가 선종 승려들과 공개적으로 기독교 교리와 불교 교리를 놓고 신학적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의는 “공(空)”과 “신(神)”의 개념 등 형이상학적 주제에 집중되었으며, 기독교의 유일신론과 불교의 무아 또는 공 사상 사이의 차이를 두고 치열하게 다퉜습니다.


결과: 이 유·불 논쟁은 일본에서 기독교와 불교 간의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신학 대립의 초기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하비에르는 이 논쟁을 통해 일본불교에 대한 이해와 비판을 강화했고, 이후 예수회 서간과 문서에 그 내용이 반영됐습니다.


* 에이로쿠 12년 논변(종론) (1569년)


내용: 1569년, 교토 또는 노부나가 관할 지역에서 기독교 대표(프란시스코 프로이스)와 불교 일련종 승려(아사야마 니치조) 사이의 공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논쟁은 종교적 주장이 아니라 정치적 무대, 즉 노부나가의 관심이 얽힌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결과: 논쟁 자체는 기독교 측의 우세로 전승되며, 같은 해 노부나가는 교토 내 기리시탄(기독교인)의 거주를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등 관용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성장에 대한 반작용도 있었으며, 전반적으로는 기독교와 불교 간 권력 구도 속에서 전략적으로 이루어진 논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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