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걸 하는 것, 그게 첫 걸음

태극권을 배우기로 했다

by 티아

새해가 밝았다. 태극권이 배우고 싶어졌다.


하지만 '태극권을 배우기로 했다. 그래서 배웠다' 하는 전개는 시원시원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태극권을 생각하다가 이대로 그냥 한 해를 넘겨버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미 많은 일이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수 있다.


재즈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는데 배우지 않았다.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려 보고 싶었는데 아이패드만 샀다.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태극권을 하고 싶다는 것도 생각으로만 그칠 것이다. 시간의 투포환을 가능한 멀리 던져 본다. 할머니가 된 나는 우연히 텔레비전에 태극권이 나오는 것을 본다. "예전에 대만에 살았을 때 말이야. 태극권을 배워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페이드아웃 효과가 걸린 것처럼 작아지다 결국 사라진다. 듣는 이는 대꾸가 없다. 왜냐하면 대꾸할 게 없기 때문이다. 시작조차 되지 않은 싱거운 이야기이지 않은가. 나는 다시 태극권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며 살 수는 없다. 돈, 시간, 체력에는 한계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크고 작은 우선순위를 두고 인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내게 태극권은 다른 우선순위에 밀려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할 수 있는데도 귀찮아서,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무도 시키지 않아서 하지 않는 일에 속한다. 먹고사는 일과도 무관하고 말이다.




나는 대만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연말연초에는 학생들과 새해 목표를 나누곤 한다. 나는 이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학생들 앞에서 올해 태극권을 배우겠다고 공포했다. 학원 강사라고 해도 선생님은 선생님이다. 행여 학생들이 볼까 봐 밖에서 코도 후벼 파지 못하는데,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스스로 하겠다고 해 놓고 차일피일 미루는 좀스러운 꼴을 보일 수는 없다. 일곱 개 반, 오십육 명의 학생 모두에게 말했다.


학생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떠들썩한 격려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저 외국인은 참 열심히도 사네' 하는 무던한 감탄 정도는 기대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마치 내가 바지 뚫리게 방귀라도 꿨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태극... 뭐라고요? 고장 난 로봇 같아진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이제 와서 없던 일로 칠 수는 없었다. 어색한 적막을 뚫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찾아봤는데 타이중공원에 수업이 있더라고요. 아침 일곱 시쯤 나가면 될 것 같은데..."


학생들은 이제야 제대로 입력이 되었는지 삐릿삐릿 고개를 가로저으며 "왜요?"라고 묻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을 일곱 번이나 치르고 나니 삼십 대 중반의 외국인이 대만에서 태극권을 배운다고 할 때 어떤 반응이 오는지 확실하게 알게 됐다. 마치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김씨네 족보 연구회에 가입한다고 했을 때 마주할 법한 반응이었다. 도대체 그걸 왜 하냐는 반응이다. 나는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그냥 웃기기로 한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법을 부릴 때처럼 양팔을 공중에서 휘젓고 괜히 한 번씩 오른쪽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태극권이었던 것이다.


한 학생이 말한다.

"태극권은 우리 할머니가 하는 건데요."


학생들의 반응이 이상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나이 때문이었다. 대만에서 태극권은 보통 60대 이상이 한다. 대만에서 나이 든 사람이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한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태극권이다. 태극권은 해가 뜨는 이른 아침인 6시, 7시부터(찾아보면 저녁 반도 있기는 하지만) 야외에서(보통은 공원) 하고, 한 번 하면 두 시간 정도 한다. 그러니까 9시까지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들과 우선 시간부터가 맞지 않는다. 더 생각해 보니까 그 밖에도 젊은 사람들이 태극권을 하지 않는 이유가 꽤 많이 떠오른다.


우선 태극권은 운동이라고 하기에는 살을 빼거나 근육을 늘리기에 적합하지 않다. 리듬이 빨라서 흥겹거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도 아니다. 체력을 한계를 밀어붙여서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는 것도 아니다. 운동을 소셜 모임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태극권 회원들은 대부분 연세가 많고 관심사도 그만큼 다를 수 있다(모임은 주로 채식 식당에서 이뤄진다).


마음을 수련한다는 점에서는 요가와 비슷하지만 태극권은 바디 라인을 예쁘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태극권은 언뜻 보면 제자리에서 여기를 봤다 저기를 봤다 하다가 손을 들었다 내렸다 발을 모았다 벌렸다 하는 것이 전부인 것 같다. 어려운 동작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온몸에 기가 제대로 흐르고 있지 않으면 표현해 낼 수 없는 동작들이다. 단전의 기(氣) 운용하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수련이다. 손과 발은 기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역할을 할 뿐이라서 힘을 주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 던전 같은 단전에서 기를 여기로 보냈다 저기로 보냈다 하는 혼자만의 싸움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학생들의 반응도 이해가 된다. 확실히 젊은 사람이 하기에는 요가나 달리기 등 더 좋은 선택지가 많아 보인다. 그나저나 집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안 입는 쿵푸 옷이 있으면 좀 빌려 달라고 했더니 웃기만 할 뿐 단 한 명도 빌려 주겠다는 녀석이 없었다.


좋은 것도 하나 없고 난해해 보이기만 하는 태극권을 나는 왜 배우려는 것일까? 내가 "태극권" 하면 음양(陰陽)의 조화처럼 되돌아오는 말이 "왜요?"이다. 어김없다. 나는 그때마다 여러 가지로 답을 내놓았다. 성격이 조용해서 격렬한 운동이나 경쟁하는 운동은 좋아하지 않는다, 반사신경이 느려서 공 운동을 하면 공에 맞기만 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 상대는 물러서지 않는다. 설명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통은 요가 아닌가요?"

"실내 운동은 답답해서…."

"그럼 등산이나 달리기도 있는데요?"


나는 일부러 이유를 숨기고 싶어서 애매모호하게 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나도 모른다. 내가 왜 태극권을 배우려고 하는지. 태극권은 바다 순찰대가 발견한 보트 같다. 나도 몰랐는데 언제부턴가 마음에 떠 있었다. 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조립되어 형태를 갖추자 바다 위로 떠오른 것 같다. 부품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게 왜 하나로 뭉쳐져서는 태극권이 되었는지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하고 싶은 일의 첫 번째 특징이 '데드라인 없음'이라면 두 번째 특징은 '이유 없음'이다)


나와 태극권 사이에는 분명 연결된 실들이 몇 가닥 있다. 사람들의 '그렇다면 B가 있는데요?' 'C가 있는데요?' 하는 말들이 생각의 잔가지를 쳐 줘서 바다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일단 태극권을 보고 듣는 환경에서 살고 있으니까 태극권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은 꿈꾸지 않는다고 한다. 한 번도 눈을 본 적 없는 사람은 눈이 내리는 꿈을 꾸지 않는다.


대만에서 태극권은 흔한 운동이다. 이른 아침 공원에 나가면 태극권, 기공(氣功), 스트레칭, 건강 댄스 등을 무리지어 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몇 해 전 엄마와 타이베이를 여행할 때도 그런 광경을 보았다.


아침밥을 먹으러 가는 길, 숙소 근처의 한 공원을 지나가는데 한 무리의 어르신들이 운동을 하고 계셨다. 호기심 많은 엄마, 왜인지 특히 외국에서 용기가 샘솟는 엄마는 곧장 그 무리 틈으로 들어가 동작을 따라 했다. 나와 동생은 공원 벤치에 앉아 엄마가 한 다리로 서서 균형을 잡고, 몸을 숙였다가 버텨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을 보았다. 일반 체조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기공이나 팔단금(八段錦, 중국의 전통 건강 체조)이었던 것 같다. 돌아온 엄마는 말했다. "동작은 느린데 땀은 억수로 나네. 희안하다잉." 우리가 자리를 뜨려는데 한 어르신이 따라왔다. "언제든 같이 해요." 나는 엄마를 통해 대만의 아침 체조를 처음 접했다. 느린데 땀은 많이 남. 누구든 환영함. 이렇게 머릿속에 기록했다.


태극권이 음양을 기본으로 하는 수련이라는 것도 내 관심사와 일치한다. 나는 오랫동안 음양에 대해 생각했다. 보이는 세계가 있으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 '아'가 있으면 '어'가 있다. 많이 쉬면 쉴 수 없는 날이 온다. 많이 먹으면 먹을 수 없는 날이 온다. 가까우면 멀어지고 자만하면 실수한다. 태어나는 순간 발끝에 죽음을 달고 살아야 한다. 13세기 시인, 루미는 말했다. "그대의 모든 불안정은 안정을 추구해서 생기니 불안정을 추구하라. 안정이 그대를 찾아오리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나 또한 겪어 본) 공황발작은 너무나 안정을 추구해서 심장이 돌아버린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음양은 평소 내가 삶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방식이다. 미리 고백하자면 이것은 나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다.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의 글에서 훔쳐본 것이다. 내가 부딪히고 얻어터져 가며 얻은 답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마음으로 들이지는 못한다. 음양을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내게 음양은 수학 문제집 뒷면부터 열어본 답안지다. 그게 답인 것은 알지만 그게 왜 답인지는 모른다. 게다가 답안지에 오류가 있어서 틀렸을 가능성까지 떠안아야 한다. 결국 내가 부딪혀 느껴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몇 해 전 5점 일기를 쓴 적이 있다. 매일 밤 하루를 5점을 만점으로 하여 점수를 매겼다. 5점이 계속 이어지는 날들이 있었다. 평안하고 즐겁고 괴로운 일도 없고 걱정 근심도 없는 나날이 계속 이어져 어제도 오늘도 5점이었다. 이러다가 인생이 계속 5점 행진을 하는 게 아닌가, 은은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그런 날이 며칠 지나고 나면 거의 확실하게 거지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음양의 균형이었다. 계속 행복할 수도, 계속 불행할 수도 없게 중재하는 나보다 더 큰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음양을 몸으로도 체험하고 싶다. 보이지 않는 기와 보이는 몸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지 이해하고 싶다. 막상 배우면 내 생각과 많이 달라서 음양 같은 건 전혀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태극권을 한다면서 닥터 스트레인지를 흉내를 낼 정도로 태극권에 무지하지 않은가. 그래도 괜찮다. 이 산이 아니면 내려오면 그만이다. (최근에 내려온 산으로는 제빵이 있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빵 굽는 냄새지 빵 만들기가 아니었다)


아직은 쌀쌀한 2월의 어느 아침, 8시경 타이중공원에 도착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데 벌써 반을 배운 것 같았다. 과장이 아니었다. 침대 위에서 머리로만 태극권을 상상하지 않고 진짜로 행동했으니까 말이다. 원하는 것을 끌어당기려면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흰 종이에 여러 번 쓰고, 이미지로 출력해 벽에 붙여 놓아야 한다고 들었다. 성공해서 큰집을 샀는데 젊었을 때 벽에 붙여 놓고 늘 보던 집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는 증언도 들어 본 적이 있다. 이들의 논리는 사람의 생각과 말에 힘이 있어서 물질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만약 생각과 말에 힘이 있다면 행동에는 더 큰 힘이 있지 않을까?


바라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하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일이 후자다. 나는 역사를 바꿀 수 없고 날씨를 정할 수 없고 인연을 정할 수 없다. 실연한 친구에게 "울 거 없어, 세상의 반이 남자[여자]야, 인구로 치면 무려 40억이라고"라는 말은 공갈빵만큼이나 텅 비었다. 우리는 절대 세상의 반을 만날 수 없다. 그것이 옷깃 한 번 스치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빨강머리 앤처럼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재미있다'라는 상상을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일을 당하는 입장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인간이 겪어내야 하는 큰 산이다.


하지만 바라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오늘 밤 채소를 듬뿍 넣은 훠궈가 먹고 싶다면 먹는다. 휴대폰을 덜 보고 싶다면 휴대폰 사용 시간 관리 앱을 설치한다. 복권에 당첨되고 싶다면 일단 복권을 산다. 당첨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복권 집에 가서 돈을 내고 복권을 사 오는 것은 내 몸뚱이로 충분히 해 낼 수 있다.


나는 지금 타이중공원에 있다. 어떤 선생님을 만나게 될지, 어떤 사람들이 함께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시작했다. 이건 나에게 작은 마법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도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그냥 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그것은 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