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차 전시기획자의 고백
내가 후임을 제대로 양성한 적이 있던가?
창피하지만 없다. 그래서 풀어 놓기 시작한 나의 기획 이야기이다.
정해진 매뉴얼도 없다. 아무리 뛰어난 기획자라도 진행하는 모든 일을 매끈하게 성공시킨다고 보장하지 못한다. 상황과 여건을 어떻게 인지하고 포지션을 잡는지, 또 그 프로젝트에 운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합이 잘 맞았는지, 수많은 변수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그래서 기획은 정답을 말하기도, 누군가에게 가르치기도 쉽지 않다. 학문처럼 이론화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획은 말로만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딪치며 사고를 단련해야만 배울 수 있는 ‘사고의 영역’이다.
‘예쁘게’보다 ‘왜 그렇게’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기능, 목적, 사람의 욕망까지 포함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디자이너들이 이 지점에 이르지 못한 놓친 채 실무에 투입된다. 보고 듣고 따라 하며 기술은 익혔지만, 정작 ‘생각하는 훈련’은 해보지 못한 상태로 현장에 던져진다.
더 큰 문제는, 요즘의 사회초년생들에게는 실패할 기회조차 없다는 것이다. 기획이란 건 원래, 처음부터 잘할 수 없는 일인데,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 그리고 즉시 성과를 요구하는 조직 속에서 망치면서 배울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사라졌다. 바로 이 결핍이, 오늘날 기획을 배우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인 난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부터 프로젝트를 혼자 맡아 제안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작성해보며 기획이 뭔지 알게 됐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행운’이었다. 기획서를 망쳐도 사업은 굴러갔기에, 실수해도 일단 해보라고 초임에게도 기획의 기회가 맡겨졌다. 주도적으로 망쳐볼 수 있는 기회가 반복해서 주어졌기에, 나는 전시기획자가 될 수 있었다. 잘못된 기획으로 프로젝트가 무너지는 과정을 철저히 겪어본 사람만이,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이 곧 기획이라는 일의 본질이다.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는 말했다.
“전문가란, 아주 좁은 분야에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실수를 저질러 본 사람이다.”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어떤 분야에서 정말 정통한 전문가가 된다는 건 단지 이론이나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측 못 한 상황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실제로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을 때 ‘전문가’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지식이 증명하는 것도, 성공이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반복된 실수와 실패 속에서 길러진다
돌아보면 내가 했던 기획이 틀렸다는 사실을 처음엔 ‘낙선’이라는 결과로 배웠다.
당선작을 보고 나서야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연차가 쌓일수록 결과물이 나오기 전부터 ‘이건 아니다’라는 징조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먼저는 기획서 편집 단계에서, 이어서는 기술 협업 과정에서, 나중에는 아예 컨셉을 잡는 순간부터 그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망할 것 같은 냄새’를 점점 더 빨리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직감이자, 몸에 밴 학습의 결과였다. 틀린 기획은 후속 공정에서 아무리 수습해도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획의 실체’는 프로젝트가 막바지로 갈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한 번의 프로젝트를 온 힘을 다해 정성껏 망쳐본 경험.
그게 내 기획을 성장시켰고, 그 실패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사회는 실수에 가혹하고, 실패에 인색하다. 결과만을 요구하는 문화 속에서 사회초년생들은 실수를 통해 배울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다. 실패는 곧 기록되고, 낙인으로 이어지며, 두 번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 사회일수록 기획 능력은 더 강하게 요구된다. 이제 ‘기획적 사고’는 특정 직무의 기술이 아니라 모든 일을 잘하기 위한 기본 역량으로 여겨진다. 디자인, 마케팅, 개발, 심지어 행정까지... 문제를 정의하고, 구조를 짜고, 논리를 세울 줄 알아야 ‘일을 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획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지만, 제대로 배울 길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누구나 기획을 요구받지만, 아무도 기획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여기에 AI가 판을 바꾸어 놓았다. 단순한 업무 대체가 아니라, 기획 없는 노동을 완전히 흡수해버리면서 초년생이 끼어들 계단 자체가 사라졌다. 더 이상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구조가 아니다. 스스로 층을 올리지 않으면 올라설 수 없는 시대, 곧 기획력이 없으면 애초에 진입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