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생각 後검색

先답정너 後GPT

by 불꽃지
새로운 프로젝트를 받으면, 나는 굳이 RFP부터 출력한다.
모니터가 아닌 형광펜을 들고 꼼꼼히 읽는다.

그리고 빈 종이를 펼치고 쓴다.

내가 지금 본 내용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내 머릿속 연관 생각들, 아는 정보들을 모조리 꺼내 적는다.
아무리 열심히 써도 1장, 즉 2쪽을 넘기기 어렵다.
그래도 기획에 착수하기 전, 꼭 이 과정을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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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생각을 끄적이는 게, 왜 중요할까?


기획서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가 없이 먼저 정보를 정리하기 시작하면 방향 없이 깨알 글자로 가득 채워져 있는 문제집 같은 제안서가 나온다. 생각은 담겨있지 않고, 정보만 나열된 기획서에 반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그런 기획서를 가지고 누군가 설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내 생각을 먼저 꺼내 놓고 그것을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보완해 나가는 형식을 취해야 좋은 기획서를 쓸 수 있다. <선 생각, 후 검색>으로 처음에 쓴 내용을 자료를 찾아가며 그룹핑하고, 틀린 내용을 고치고 새로운 걸 추가하는 것이다.

처음 떠오른 기획 아이디어가 터무니없어도 일단 꺼내 놓아야 한다. 내 첫 느낌을 무시하면 안 된다. 어쨌든 사람은 본인이 알고 있던 정보 위에 새로운 정보를 얹기 때문에 첫 느낌은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첫 느낌이 마중물이 되어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지만, 나도 모르게 선택과 결정을 방해하는 무의식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개요만 본 상태에서, 일단 내가 가진 사전지식과 상식에서 기획 방향을 적어본다. 그리고 접어 뒀다가 무엇인가 고안해 내야 할 때, 혹은 고민스러울 때 펼쳐서 본다.

‘선 생각 한 장’이 결국 나의 생각에서 기획이 출발하게 하고,

선입견을 빨리 버릴 수 있게 해 주며,

기획 방향이 끝날 때까지 딴 길로 새지 않게 막아준다.

사람의 사고는 편협할 수밖에 없다.

확증 편향을 막기 위해 정보를 찾기 전에 ‘내 머릿속’을 미리 체크해 두는 것이다.



RFP를 숙지했고, 내 머릿속도 체크했는가?

예전에는 끄적인 그 종이를 펼쳐놓고, 바로 기획을 시작했다.


그러나 요즘 기획자들은 여기서 AI를 호출한다.
ChatGPT든, Claude든, Gemini든.


프롬프트에 "이 프로젝트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치기 전에 또 해야 할 것이 있다.


답정너

미리 생각해 놓은 답이 있는 질문을 해봐라.

그리고 정말 아무 생각 없는 질문도 해봐라. 당신이 그 답을 보고 판단하는 사고의 폭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백지상태로 질문을 던지는 순간, AI는 친절하게 수십 가지 방향성을 쏟아낸다. 그리고 당신은 그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길을 잃는다. 뭐가 중요한지 분간이 안 된다.


먼저 답을 정하라

정답이 아니어도 된다. 지금 당신이 믿는 가설이면 충분하다. 조잡해도 좋고, 틀려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당신의 생각이 먼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선 답정너'는 AI에게 제한을 건다. AI의 답이 내 가설과 어떻게 충돌하는지, 어디서 삐걱거리는지 감지할 수 있게 한다. AI는 대리 사고자가 아니라, 내 사유의 경계를 압박하고 확장하는 장치가 된다.


방법은 단순하다

질문을 먼저 세워라.

그 질문에 대한 나만의 임시 답을 정리하라.

그 위에서 AI의 답을 받아라. 비교하고, 충돌시키고, 갱신하라.


AI는 이제 '정답 제조기'가 아니라, 내 사고를 교정하고 증폭하는 현미경이자 망원경이다.


질문 없이 묻지 말 것. 생각 없이 기대지 말 것.


기획은 인간의 사유에서 시작한다. AI는 그 사유를 더 멀리 밀어주는 바람이어야 한다.

선 답정너, 후 AI.

사고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강력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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