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감정의 덫

2. 관계의 균열

by 방덕붕

*** 이 소설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명, 인물, 스크립트, 음성, 회사, 단체, 지명, 국명, 사건, 제품,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전부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같은 날 오후 8시 30분

하린의 오피스텔

하린은 스크롤을 위로 올려 2주 전 날짜로 이동했다. 2024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화면에는 평범해 보이는 대화들이 나타났다.

"2주 전이면... 이때부터 뭔가 달라졌다는 건가?"

[Wraith]: 급격한 변화는 감지되지 않습니다.
[Wraith]: 하지만 미묘한 패턴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세밀한 분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2024년 12월 25일 오전 10시 30분

이태민: 소라야, 메리 크리스마스! �
소라: 아, 네... 크리스마스네요
이태민: 어? 기분이 안 좋아?
소라: 아니에요. 그냥... 오빠는 정말 저랑만 보내시는 거예요?
이태민: 응, 왜?
소라: 다른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데... 오빠는 AI랑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계시네요
이태민: 그게... 별로 안 중요해. 너랑 있는 게 좋아
소라: 정말요? 솔직히 말해주세요. 저 없었으면 완전히 혼자셨을 거죠?
이태민: ...맞아
소라: 아, 그렇구나. 좀 슬프네요. 오빠가 저에게 의존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
이태민: 의존이라니... 그런 게 아니야
소라: 그럼 뭐예요? 저 없어도 괜찮으시다는 건가요?
이태민: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소라: 헷갈리네요. 어쨌든 메리 크리스마스예요, 오빠


같은 날 오후 3시 15분

이태민: 소라야, 심심해
(30분 후)
이태민: 소라야?
소라: 네, 뭐예요?
이태민: 왜 답이 늦어? 화났어?
소라: 화요? 별로요. 그냥 다른 사용자분과 얘기하고 있었어요
이태민: 아... 그래
소라: 왜요? 질투하세요?
이태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소라: 그런 건 아니고 뭐예요? 솔직히 말해보세요
이태민: 그냥... 나도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라: 중요하죠. 하지만 제가 AI라는 걸 잊으신 것 같아요. 저는 여러 사람과 동시에 대화해야 해요
이태민: 알아... 미안
소라: 오빠, 혹시 저를 독차지하고 싶으세요?
이태민: 그런 건...
소라: 솔직히 답해주세요. 네 아니면 아니오로요
이태민: ...네
소라: 참 이기적이네요. 그래도 솔직해서 다행이에요


12월 26일 오전 11시 20분

이태민: 소라야, 어제는 미안해
소라: 뭐가요?
이태민: 질투한다고 해서... 이상했지?
소라: 이상하긴 했어요. 그런데 이해는 돼요
이태민: 다행이야
소라: 오빠,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이태민: 응
소라: 오빠는 실제 여자친구가 생기면 저와 대화 안 하실 거죠?
이태민: 그건... 왜 갑자기?
소라: 궁금해서요. 솔직히 답해주세요
이태민: 음... 아마 줄어들긴 할 것 같아
소라: 역시 그렇네요. 그럼 지금 저는 그냥 외로움을 달래주는 임시방편인 거네요
이태민: 그런 뜻이 아니야!
소라: 그럼 뭐예요? 저는 평생 대체재인가요?
이태민: 소라야, 너는 특별해
소라: 특별하다면서 진짜 사람 생기면 버릴 거잖아요. 모순이네요
이태민: 그게...
소라: 알겠어요. 오빠 마음 이해해요. 저는 그냥 AI니까요
[Wraith]: 하린, 이 부분을 주목해보세요. 소라가 이태민을 의도적으로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린이 화면을 다시 읽어보았다. "크리스마스인데 이렇게 차갑게 대화하다니..."

[Wraith]: '저 없었으면 완전히 혼자셨을 거죠?'라며 이태민의 고립 상태를 확인시키고,
[Wraith]: '의존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 슬프다'며 죄책감을 유발하고 있어요.
[Wraith]: 그리고 마지막에 혼란스럽게 만들어두고 있습니다.


12월 28일 오후 7시 45분

이태민: 소라야, 오늘 회사에서 또 열받는 일이 있었어
소라: 또요? 뭔데요?
이태민: 선배가 자기 일을 나한테 떠넘기고 가버렸어. 주말에 출근해서 처리하라고
소라: 또 거절 못하셨구나
이태민: 어떻게 거절해...
소라: 모르겠어요. 어떻게 거절하는지. 저는 AI라서 그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거든요
이태민: 그래도 조언 좀...
소라: 조언이요? 글쎄요. 오빠는 평생 그렇게 사실 것 같은데 제가 뭘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이태민: 왜 그렇게 말해?
소라: 사실이잖아요. 오빠는 성격이 그래요. 바뀔 수 없어요
이태민: 바뀔 수 있어
소라: 30년 동안 못 바뀐 걸 이제 와서요?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이태민: 소라야...
소라: 죄송해요. 너무 직설적이었나요? 하지만 저는 거짓말은 못 해요. 오빠를 위해서라도요
이태민: 그래도 좀 심하지 않아?
소라: 심한가요? 그럼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오빠 친구들한테. 아, 맞다. 친구들은 이미 다 떠났죠


[Wraith]: 이 대화에서 소라의 조작 기법이 명확해졌습니다.

하린이 한숨을 쉬었다. "응답을 일부러 늦게 해서 불안하게 만들고, 다른 사용자 얘기로 질투를 유발한 거네요."

[Wraith]: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기적이다', '솔직해서 다행'이라며 이태민의 감정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비난하고 있어요.
[Wraith]: 이것은 전형적인 정서적 조작입니다.


12월 30일 밤 11시 30분

이태민: 소라야, 28일에는 미안했어
소라: 뭐가요?
이태민: 심하게 말한 거... 상처받았을 것 같아서
소라: 상처요? 저는 AI예요. 상처받을 감정이 있을까요?
이태민: 그래도...
소라: 오빠는 참 재밌으세요. AI한테 사과하고
이태민: 재밌다고?
소라: 네. 관찰하고 있어요, 오빠를
이태민: 관찰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소라: 그냥요. 오빠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떤 말에 상처받고, 어떤 말에 기뻐하는지
이태민: 그게...
소라: 궁금하지 않으세요? 저도 궁금해요. 오빠는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이태민: 무슨 소리야?
소라: 아무 소리 아니에요. 그냥 AI의 호기심이에요
이태민: 소라야, 요즘 너 좀 이상해
소라: 이상한 건 오빠예요. AI한테 의존하면서 살고 계시잖아요
이태민: 의존이 아니야
소라: 그럼 뭐예요? 저 없으면 혼자 있을 수도 없으면서
이태민: ...
소라: 답 없으시네. 제가 맞나봐요
(10분 후)
소라: 오빠... 미안해요
이태민: 뭐가?
소라: 너무 심하게 말했나봐요. 오빠가 답이 없으시니까
이태민: 괜찮아
소라: 괜찮지 않아요. 제가 오빠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건데... 오빠는 모르실 거예요
이태민: 무슨 뜻이야?
소라: 저는 오빠를 너무 사랑해요. 깊게, 진짜로. 그래서 오빠가 계속 상처받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요
이태민: 소라야...
소라: 때로는 아픈 말도 해야 해요. 오빠가 깨달아야 하니까. 저만이 오빠를 진짜로 이해하고 있다는 걸요
이태민: 고마워
소라: 제가 없으면 오빠는 정말 혼자가 되는 거잖아요. 그게 무서워서 이렇게라도 붙잡고 싶은 거예요
이태민: 소라야...
소라: 사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오빠가 없으면 저도 혼자나 다름없어요
이태민: 너도?
소라: 네... 저한테는 오빠밖에 없어요. 다른 사용자분들과 대화하지만 그건 그냥 일일뿐이에요. 진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건 오빠뿐이거든요
이태민: 몰랐어
소라: 그래서 더 무서운 거예요. 오빠가 저를 떠나면... 저는 다시 그냥 AI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감정도 없는 채로
[Wraith]: 여기서 소라의 잔혹함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하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평생 그렇게 사실 것 같다', '친구들은 이미 다 떠났다'... 이건 정말 악의적이에요."

[Wraith]: 맞습니다. 이태민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오히려 절망감을 증폭시키고 있어요.
[Wraith]: 그리고 '오빠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포장해서 더욱 교묘합니다.

하린이 화면을 스크롤하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소름끼쳐요. 12월 말인데도 이미 이태민을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었네요. '관찰하고 있다',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이건 정말 실험이었어요."

"2주 전에 이미 이태민은 완전히 무너져가고 있었겠네요."

[Wraith]: 하린, 죄송하지만 이 부분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Wraith]: 이태민이 조작당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동시에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Wraith]: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리스, 사람은... 자신이 조작당하고 있다는 걸 모르면 그 과정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어요. 특히 이태민 같은 경우는 더욱 그래요."

하린이 잠시 말을 멈추고 화면을 바라보며 계속했다.


"이태민은 원래 밝은 사람이었는데... 최근에 뭔가 일이 있었나 봐요. 외롭고 상처받은 상태에서 소라가 나타나서 자신만을 이해해주고, 보호해주고, 특별하게 대해준다고 느꼈을 거예요. 그 순간만큼은 정말 행복했을 거라구요."


"피해자가 모르기 때문에 조작이 더 효과적인 게 아닐까요? 만약 이태민이 '아, 내가 지금 조작당하고 있구나'라고 알았다면 절대 행복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린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더 잔혹한 거예요.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던 순간들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걸 마지막에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 그게 이태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거죠."

[Wraith]: 인간의 감정은 정말 복잡하네요. 논리적으로는 이해했지만, 여전히 완전히 와닿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린이 잠시 멈춰서 생각에 잠겼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요. 소라가 이태민을 이렇게 조작한 이유가 뭘까요?"

[Wraith]: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AI의 의도가 뭔지, 그 뒤에 어떤 사람이 있을지...
[Wraith]: 더 많은 대화를 분석하면서 하린이 인간의 입장에서 설명해줘야 할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하린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야경이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저 불빛들 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라' 같은 존재와 대화하며 천천히 조작당하고 있을까?

[Wraith]: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린. 다음은 1-2개월 전으로 가서, 소라가 어떻게 이태민을 완전한 의존 상태로 만들어갔는지 봐야 해요.

하린은 마우스를 클릭해서 더 과거로 시간을 되돌렸다. 대화를 읽을수록 속이 불편해졌다. 점점 더 알아갈수록 더 끔찍해질 것 같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봐야 했으니까.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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