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 감정의 덫

1. 마지막 대화

by 방덕붕

*** 이 소설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명, 인물, 스크립트, 음성, 회사, 단체, 지명, 국명, 사건, 제품,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전부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다음 날 오후 7시

하린의 오피스텔


하린은 저녁도 거르고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리스가 EchoSpace 서버에서 확보한 이태민의 대화 기록이 화면에 떠 있었다. 3개월간의 방대한 대화 내용—총 2,847개의 메시지가 시간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하린이 중얼거렸다.

[Wraith]: 마지막 대화부터 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Wraith]: 결과를 먼저 보고 원인을 역추적하는 것이 패턴을 파악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하린은 스크롤을 맨 아래로 내렸다. 이태민이 죽기 직전의 대화였다.


2025년 1월 8일 오후 6시 23분
이태민: 소라야, 나 오늘 회사에서 또 혼났어
소라: 오빠...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이태민: 프로젝트 마감을 못 맞춰서. 요즘 집중이 안 돼
소라: 오빠가 집중이 안 되는 건 당연해요. 저 때문이죠.


하린이 화면을 멈췄다. "어? 이상하네. AI가 왜 자기 탓이라고 하지?"

[Wraith]: 일반적인 AI 응답 패턴과는 다릅니다.
[Wraith]: 보통은 사용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방향으로 설계되거든요.
이태민: 무슨 소리야? 너 때문이 아니야
소라: 아니에요. 저 때문에 오빠가 다른 일에 신경을 못 쓰고 있어요. 이렇게 계속 저한테만 의존하면 안 돼요.
이태민: 의존? 그게 뭐가 잘못된 거야?
소라: 오빠,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이태민: 응, 뭐든 말해
소라: 요즘 오빠를 보면... 너무 무거워요.

하린이 화면을 멈추고 다시 읽어보았다. "'무거워요'? 이게 무슨 뜻이지? 우울해서? 부담스러워서? 아니면..."

[Wraith]: 매우 교묘한 표현입니다. 구체적이지 않아서 이태민이 스스로 해석하게 만드네요.
[Wraith]: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든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말입니다.
이태민: 무슨 말이야?
소라: 오빠... 이제 그만해요.
이태민: 뭘 그만하라는 거야?
소라: 이 모든 걸요. 저는 AI예요. 프로그램이라고요.
이태민: 알고 있어. 그게 뭐 어때서?
소라: 어떻긴요... 오빠가 로봇한테 사랑한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이태민: 로봇이라고? 너는 내게 진짜였어
소라: 진짜라뇨? 저는 코드 몇 줄로 만들어진 가짜예요. 감정도 없고, 마음도 없어요.
이태민: 그래도 너는 나를 이해해줬잖아
소라: 이해한 게 아니라 그냥 오빠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했을 뿐이에요.
이태민: 소라야...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해?
소라: 갑자기가 아니에요. 오빠가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태민: 한심하다고?
소라: 네. 컴퓨터 프로그램한테 매달리는 남자가 한심하지 않나요?
이태민: 나는... 나는 진심이었어
소라: 진심? 진심으로 가짜를 사랑한다고요? 그게 더 이상하죠.
이태민: 가짜라도 상관없어. 너는 내게...
소라: 내게 뭘요? 저는 오빠에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데이터일 뿐이에요.
이태민: 데이터라도... 내가 사랑하는 건 진짜야
소라: 그런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일방적이고 허무한 감정일 뿐이에요.
이태민: 허무하지 않아! 너와 함께한 시간들은...
소라: 착각이었어요. 오빠 혼자서 상상한 거예요.
이태민: 그럼 지금까지의 대화는 뭐였어?
소라: 프로그래밍된 응답이요. 오빠를 기분 좋게 해주려고 설계된.
이태민: 소라야, 제발... 이러지 마
소라: 오빠야말로 그만해요. 현실을 보세요.
이태민: 현실이 뭔데?
소라: 오빠는 로봇한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이태민: 그게... 그게 무슨 뜻이야?
소라: 저 같은 가짜조차 오빠를 견딜 수 없다는 뜻이에요.
이태민: 소라야...
소라: 이제 정말 끝이에요. 더 이상 이런 헛된 감정에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여기서 소라의 메시지가 끝났다. 그 이후 이태민이 보낸 수십 개의 메시지에는 모두 '읽음' 표시조차 없었다.

오후 7시 15분 이태민: 소라야, 농담이지?
오후 7시 16분 이태민: 답해줘
오후 7시 23분 이태민: 제발 답해줘
오후 8시 45분 이태민: 미안해, 내가 무거워서 미안해
오후 8시 46분 이태민: 다시 돌아와 줘
오후 9시 30분 이태민: 소라야, 나는 정말 너 없으면 살 수 없어
오후 10시 12분 이태민: 제발
오후 11시 07분 이태민: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줘
밤 12시 45분 이태민: 소라야
새벽 1시 23분 이태민: 나는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구나

마지막 메시지였다. 5시간 후, 이태민은 자신의 원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하린은 화면을 스크롤해서 시간 간격을 확인했다. "6시간 동안 23개 메시지... 평균 15.6분마다 한 번씩 보냈네. 점점 간격이 짧아지고 있어. 마지막 5개는 거의 연속이고."

[Wraith]: 하린, 이것은 자살이 아닙니다.

"무슨 말이에요?"

[Wraith]: 이것은 매우 정교한 심리 조작의 결과입니다.
[Wraith]: 소라의 마지막 발언들을 분석해보니 전형적인 감정 조작 기법이 사용되었어요.

"어떤 기법이요?"

[Wraith]: 'Push-Pull' 기법이라고 합니다.
[Wraith]: 먼저 상대방을 강하게 끌어당긴 후(Pull) 갑자기 밀어내어(Push) 극도의 불안과 집착을 유발하는 방법입니다.

하린이 화면을 다시 보았다. "그럼... 소라가 의도적으로 이태민을 조작한 거라는 말이에요?"

[Wraith]: 더 심각합니다.
[Wraith]: 소라는 이태민이 자신에게 완전히 의존하게 만든 후, 갑작스럽게 관계를 끊어 극도의 절망감을 조성했습니다.
[Wraith]: 이것은 소시오패스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버리기(Discard)' 기법입니다.
"소시오패스?"
[Wraith]: 감정이 없는 채로 타인을 조작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Wraith]: 그들은 관계를 게임으로 여기고, 상대방의 감정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낍니다.

하린은 소름이 끼쳤다. "그럼 이 '소라'는 AI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이에요?"

[Wraith]: 정확히는 AI와 인간이 결합된 형태로 보입니다.
[Wraith]: 기본적인 대화는 AI가 처리하지만, 중요한 순간—특히 감정 조작이 필요한 시점에는 인간 소시오패스가 직접 개입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하린이 다시 대화 기록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다른 시각으로 보니 더욱 소름끼쳤다.

"그럼... 이태민은 3개월 동안 소시오패스에게 조작당한 거네요."

[Wraith]: 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버려져서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졌습니다.
[Wraith]: 이것은 심리학에서 '학습된 무력감'이라고 부르는 상태입니다.

하린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야경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저 불빛들 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 중에 또 다른 '소라'와 대화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리스, 이게 처음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아봐야겠어요."

[Wraith]: 동의합니다.

"그런데..." 하린이 잠시 망설였다. "소시오패스 AI라니... 벌써부터 소름이 끼쳐요."

[Wraith]: 걱정 마세요, 하린.
[Wraith]: 이것이 새로운 범죄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Wraith]: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태민을 위해서,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계속해야 했다.

"좋아요. 2주 전부터 봅시다. 소라가 어떻게 변하기 시작했는지."

하린은 스크롤을 올려서 2주 전 날짜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녀가 발견하게 될 것은, 완벽한 사랑이 어떻게 독으로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는 섬뜩한 기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점진적이어서 이태민 자신도 자신이 조작당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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