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동안 변하지 않은 숙제

서로 사랑하라

by 방덕붕

"서로 사랑하라."


2000년 전 갈릴리 호숫가에서 한 남자가 던진 이 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혁명적입니다. 아니, 혁명적이라는 표현도 모자랍니다. 여전히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놀라운 발전, 변하지 않는 것


생각해봅시다. 2000년 동안 인류는 무엇을 이뤄냈을까요?


로마시대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몇 달 걸려 이동했던 거리를, 우리는 비행기로 몇 시간 만에 날아갑니다. 그들이 양피지에 손으로 써서 몇 달 걸려 전했던 메시지를,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1초 만에 지구 반대편으로 보냅니다. 천연두와 페스트로 떼죽음을 당했던 그들과 달리, 우리는 백신과 항생제로 수많은 질병을 정복했습니다.


심지어 달에도 갔다 왔고, 화성에 탐사선을 보냈고, 인공지능이 바둑 최고수를 이기는 세상을 만들어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거의 신에 가까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인터넷 댓글창에서 서로를 향해 칼날 같은 말들을 던집니다. 정치적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족끼리도 등을 돌립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여전히 차별하고 혐오합니다.


2000년 전 로마 제국이 유대인을 억압했던 것처럼,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있습니다. 그때 검과 창으로 싸웠다면, 지금은 핵무기로 서로를 위협합니다.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는데, 인간의 본성은 여전히 2000년 전 그대로입니다.


에덴에서 시작된 이야기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20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려운 이유는 뭘까요? 답은 성경 첫 페이지에 나와 있습니다.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는 완전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였죠. 만약 그 상태가 계속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쟁도 없고, 살인도 없고, 모든 아이가 사랑받으며 자라고, 모든 병든 사람이 극진히 보살핌받았을 것입니다. 지구 인구가 지금의 80억 명이 아니라 200억, 300억 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은 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원망했고("당신이 주신 여자가..."), 하와는 뱀을 미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낳은 첫째와 둘째에게서 인류 최초의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가 뭐였나요? 하느님이 아벨의 제물만 받아주셔서였습니다. 질투였죠. 그 순간부터 인간은 비교하고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더 잘났는지, 누가 더 사랑받는지, 누가 더 많이 가졌는지...


하느님의 딜레마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하느님이 카인을 어떻게 대하셨는지입니다. 동생을 죽인 살인자에게 징표를 새겨주시면서 "누구든 카인을 죽이면 일곱 배로 갚겠다"고 하셨습니다. 벌을 주시면서도 동시에 보호해주신 거죠.


어쩌면 하느님도 후회하셨을지 모릅니다. 전능하신 분이라면 뱀만 벌하고 아담과 하와를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요. 타락하기 전으로 리셋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그 선택의 결과를 무효화해버리면 애초에 자유의지를 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로봇이 아닌 진짜 인간을 원하셨으니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다른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 카인에게 징표를 새겨주신 것처럼, 우리를 보호하고 기다려주시는 것 말입니다.


창조와 타락 사이에서


이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동시에 타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하느님을 닮은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고통받으면 마음이 아프고, 정의롭지 못한 일을 보면 분노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감동받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카인의 DNA도 흐르고 있어서 질투하고, 미워하고, 경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와 '그들'을 구분합니다. 같은 팀 응원할 때는 한마음이 되지만, 상대팀을 향해서는 야유를 보냅니다. SNS에서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만 어울리고, 다른 의견은 차단하기도 합니다.


타락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누군가가 나보다 잘되면 기뻐해주기보다는 은근히 질투가 먼저 올라오죠. 누군가가 나를 무시하면 사랑으로 응답하기보다는 똑같이 무시하고 싶어집니다.


사랑하는 것보다 경계하고 의심하는 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협력하는 것보다 경쟁하는 게 더 익숙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말에 끌립니다. "서로 사랑하라." 2000년이 지났는데도 이 말이 마음을 울립니다.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코로나19가 터졌을 때, 의료진들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지진이 나면 전 세계에서 구조대가 몰려옵니다. 길에서 넘어진 할머니를 부축해주고,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주고, 혈연도 아닌 사람의 장례식에 조문을 갑니다.


우리 안에는 분명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게 기본값이 아닐 뿐입니다.


어쩌면 종교와 철학이 생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타락한 본성을 극복하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인간만의 처절한 노력.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그 노력의 정점입니다.


영원한 선택


예수는 이 모든 걸 다시 알려주어야만 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지만 타락했다는 것, 그래서 본능적으로는 이기적이고 경쟁적이라는 것, 하지만 동시에 그 타락한 본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원래의 모습도 갖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하라"가 아니라 "사랑하라"고 명령형으로 말한 것 아닐까요. 의식적인 선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되는 게 아니라, 근육을 단련하는 것처럼 꾸준히 연습해야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2000년이 지나도 우리가 여전히 이 말을 되새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숙제이기 때문입니다.


기술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만, 마음의 성장은 선형적입니다. 한 걸음씩, 한 사람씩, 한 번의 선택씩 말입니다.


그래서 2000년이 지나도, 아마 앞으로 2000년이 더 지나도, 우리는 여전히 이 말을 되뇌고 있을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타락한 본성은 변하지 않지만, 그 본성을 뛰어넘으려는 의지 또한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매일 아침, 선택해야 합니다. 경쟁할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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