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시를 좋아한다. 두바이 셰이크 자이드 로드를 따라 늘어선 미래 도시 느낌의 건물들,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라스베가스의 화려한 스트립, 상하이 황푸강을 사이에 두고 묘하게 대조적인 동방명주와 와이탄의 근현대 모습......반대로 자연경관에는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해서 오로지 산과바다를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자연 앞에서 "와!"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은 첫 번 째 장소가 그랜드캐년이다.
학생이었던 당시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라스베가스에 한 달가량 머물게 되었다. 말 그대로 Sin City인 라스베가스는 꺼지지 않는 화려한 불빛 아래 끝없는 쇼와 클럽, 카지노로 24시간 유흥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매일 밤 스트립을 어슬렁대며 잠들지 않는 도시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내던 중 그랜드 캐년 당일 투어를 가게 되었다.
밤에 더 활기찬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년은 라스베가스에서 많이들 다녀오는 곳이긴 하지만 거리상 근처가 아니다. 헬기투어로는 금방 간다고 하던데 나는 버스투어를 이용해 왕복 8시간은 넘게 걸렸던 것 같다. 백발의 씩씩한 할머니 가이드를 쫓아다녔던 당일 투어는 그랜드캐년에 머무는 시간보다 이동시간이 몇 배는 더 걸렸다.
긴 이동 끝에 캐년에 도착한 순간,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파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붉은 절벽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눈 앞의 광경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붉은 장막을 걸어놓은 것 같았다. 태초 지구의 모습과도 같은 거대한 협곡은 감격 그 자체였다. 라스베가스의 화려한 불빛 못지않게 붉은빛의 자연에 압도당했다. 한 달간 머문 라스베가스 일정 중 하루 방문한 캐년의 인상이 마음속에 깊이 박혔다.
하늘에 붉은 장막을 걸어놓은 듯한 그랜드캐년
다음으로 나를 매료시킨 자연은 바로 알프스 마테호른이다.
사실 스위스까지 갔다가 알프스도 못 오르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융프라우의 거점인 인터라켄에 갔을 당시 산악열차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역으로 갔는데 사고인지 공사인지의 이유로 운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 날은 다른 도시로 떠나는 열차와 숙소가 확정되어 있어 결국 융프라우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시녀였던 나는 산에 미련이 없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크지 않았다.
그 후 다시 스위스를 가게 되었다. 역시나 알프스보다는 슈타인 암라인의 예쁜 건물과 국제기구들이 모여있는 제네바의 분위기, 다빈치 코드에도 등장하는 CERN 견학에 의미를 두고 간 것이다. 하지만 명색이 스위스 여행이니만큼 의무적으로 알프스를 일정에 넣었고 토블론 초콜릿의 모티브로 유명한 마테호른에 가기로 결정했다.
체르마트라는 예쁜 산악마을에서 마테호른 전경이 보이는 고르너그라트 전망대행 열차가 출발한다. 이번에는 무난히 열차를 타고 끝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보통 산의 형상이라 하면 뾰족하게 우뚝 솟은 봉우리가 강조된 삼각형을 떠올리는데 막상 이렇게 딱 떨어지는 세모 모양의 산은 별로 없지 않은가? 그런데 마테호른은 이 '세모'가 그대로 살아있는 모습이라 신기하고 재미있다.
고르너그라트가 가장 높은 전망대이지만 그 전 역인 로텐보덴에서 바라보는 마테호른이 더 예술이다. 리펠제 호수가 산 아래에 있어 산봉우리의 모습이 호수 위에 거울처럼 비치기 때문이다. 내가 갔을 때는 호수가 얼어 마테호른이 물 위에 투영되지는 않았지만 산과 호수 그 자체로도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른다. 새파란 하늘 아래 하얗게 빛나는 산, 그 아래 파란 호수와 붓 자국이 스쳐 지나가듯 쌓인 만년설은 자연의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어 총체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마테호른과 리펠제 호수
마테호른과 고르너그라트 전망대
그랜드캐년이나 마테호른이 완전히 고립된 자연까지는 아니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이긴 하지만 도시 생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자연이라는 형상 안에 둘러싸여 있으니 범접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되었던 것 같다. 당분간 이런 경이로운 자연을 보러 떠나기가 어렵게 되었다.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그 자연을 지키려는 일상생활 속의 작은 실천들을 하며 떠날 날을 기다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