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크루거 국립공원
추석연휴에 개천절, 한글날까지 연이어진 전대미문의 황금연휴를 맞이하여 무조건 먼 곳으로 떠나야겠다고 마음먹고 정한 곳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평일 4일 연차를 덧붙여 9박 12일의 남아공 여행을 다녀왔다.
아프리카 여행의 백미는 단연 사파리. 사파리하면 대부분은 세렝게티를 먼저 떠올리는데 남아공의 크루거는 아프리카 최대 국립공원이자 정해진 루트를 따라 가이드를 쫓아다니는 것이 아닌 개인적으로 운전을 하며 자유롭게 초원을 누비는 셀프 드라이브 사파리로 인기 있는 곳이다.
크루거를 가려면 우선 요하네스버그로 이동해야 한다.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홍콩 경유 케세이퍼시픽 항공을 이용하는 것이다. 일찍 예매할수록 케세이퍼시픽 공식 홈페이지에서 저렴한 가격대에 구할 수 있으니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면 티켓팅을 서두르자(나는 가기로 마음 먹고도 괜히 간 보다가 월이 바뀌니 특가표가 그냥 사라져버려 30만원 정도 더 비싼 눈물의 티켓팅을 했다).
공항 안에서도 안심할 수 없다는 악명의 요하네스버그라 잔뜩 긴장했으니 생각보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조심은 하되 너무 불안해하며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요하네스버그에서 크루거 국립공원까지 차량으로 약 6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운전이 부담스럽다면 항공편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크루거가 위치한 스쿠쿠자까지는 에어링크 항공에서 단독 운항하며 4~50분 정도 소요된다. 소형 항공기에 짧은 비행 시간임에도 음료와 간식 서비스가 제공된다.
여기가 공항이야? 카페야? 스쿠쿠자 공항은 카페라고 해도 믿길 만큼 작고 예쁘고 감각적이었다. 목조 인테리어의 따뜻하고 친환경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이 작은 공간에는 진짜 카페뿐만 아니라 고급스런 기념품 점과 렌터카 사무소 등 필요한 건 다 갖춰져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수하물 찾는 곳.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이 직접 운반해주는 완벽한 수동 시스템이다.
크루거 국립공원 안에는 여러 개의 캠프 사이트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이 스쿠쿠자 캠프이다. 캠프 내에는 코타지, 캠핑장 등 다양한 형태의 숙소들이 있고 가격도 제각각 이다. 크루거 국립공원 공식 홈페이지에서 쉽게 예약할 수 있으나 인기가 많으니 역시 마음을 먹었으면 재빠르게 움직일 것. 나는 평범한 수준의 벙갈로를 예약했다.
스쿠쿠자캠프에서는 별도의 공항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공항 AVIS 렌터카에서 트랜스퍼 서비스를 제공하긴 하나 가격이 비싸 나는 차량을 렌트했다(일일 렌트비가 트랜스퍼 비용보다 저렴하다). 공항에서 스쿠쿠자 캠프까지는 차로 20분 정도 밖에 안 걸리고 운전석이 우리나라와 반대이긴 하지만 길에 차가 워낙 드물어 부담 없이 운전할 수 있다. 다만 도로 주변에 건물 하나 없이 오직 수풀뿐이라 네비게이션 작동이라도 멈추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당황스러운 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네비만 잘 작동되도록 준비하자. 이 곳에서는 구글맵보다 Sygic 앱을 선호한다. 참고로 구글맵과 Sygic이 알려준 경로가 달라서 갈팡질팡 했을 때가 있었는데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Sygic이 안내한 경로로 알려주었다.
캠프 안에는 주유소, 마트, ATM, 레스토랑 등 웬만한 편의시설들이 다 갖춰져 있다. 캠프 안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따로 없다. 푸른 잔디밭과 대비되는 강렬한 붉은 색의 이국적인 식물들과 오렌지색 눈동자에 오묘한 청록 깃털을 지닌 새들, 방심한 방문객들의 음식을 훔쳐먹는 짓궂은 원숭이들, 강가에 목을 축이러 나온 코끼리들이 보인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일명 게임 드라이브라고 하는 사파리에서의 미션이 있으니 바로 빅 파이브 찾기. 빅 파이브는 버팔로, 코끼리, 사자, 표범, 코뿔소 이 다섯 동물들을 가리킨다. 셀프 드라이빙도 가능하고 스쿠쿠자 캠프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에 참여해도 좋다. 동물들이 이른 새벽이나 해질녘 밤에 많이 등장한다고 해서 나는 오후 4시 반부터 약 3시간 가량 진행되는 선셋 드라이브를 신청했다. 프로그램들이 인기가 많으므로 숙소 예약 시 프로그램도 함께 예약하길 권한다.
창문 없이 뻥뚫린 사파리 전용 차를 타고 가이드와 함께 출발하는데 해가 지면 바람도 차고 추우니 꼭 두꺼운 겉옷을 준비하도록 하자. 사실 동물들이 여기저기 초원을 누비며 뛰어 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수풀 속에 숨어 머리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경우가 많아 매의 눈으로 찾아야 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운이 나쁘면 한 마리도 못 볼 수 있다고. 단, 임팔라만 빼고. 똘망돌망하니 사슴같이 생긴 임팔라는 정말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동물들이 발견될 때마다 가이드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데 흔하디 흔한 임팔라는 패스. 귀여운 아기 코끼리가 동행한 코끼리 가족, 외모 평가해서 미안하나 음침한 하이에나, 품바…… 아니, 멧돼지(디즈니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함께 탑승한 세계 각 국에서 온 사람들이 멧돼지를 보자마자 전부 “품바!”라고 외쳤다) 등 아프리카 대륙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눈 앞에서 볼 수 있었다. 가장 멋있었던 것이 멀리서 지켜 본 기린 무리인데 석양을 배경으로 기다란 실루엣이 초원을 유유자적 가로지르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아침에는 차를 몰고 스쿠쿠자 캠프 근처의 Lake Panic Bird Hide라는 곳에 가보았다. 게임 드라이브에서는 동물들을 찾으러 돌아다니지만 이 곳에서는 조용히 숨어서 동물들이 찾아오길 기다려야 한다. 패닉 호수 한 편에 작은 은신처가 마련되어 있는데 여기에 앉아서 호수를 찾아오는 새와 동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 숨 죽이고 호숫가를 바라보니 이름모를 새들과, 잠수를 시도하는 하마, 물 마시러 나온 워터벅 등이 나타났다.
자기 가족들은 내버려두고 굳이 나한테 계속 말을 걸던 내 옆에 앉은 소녀는 크루거 국립공원에서 볼 수 있는 동물 가이드북을 준비해와서 열심히 비교 관찰하며 공부하더라. 제대로 이 곳을 즐길 줄 아는 아이다.
크루거의 수풀길을 운전하면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이 바로 속도다. 4~50km의 속도제한 규정도 있지만 천천히 달려야 더 많은 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뜬금없이 정차한 차들이 몰려 있다면 그 주변에 동물이 나타났다는 신호니 잠시 차를 멈추고 주위를 관찰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동물이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것이 바로 게임 드라이브의 묘미이다.
계절에 따라 동물들도 이동하다 보니 크루거의 최적 방문시기는 4~9월이고 내가 갔던 10월은 생각보다 많은 동물들을 만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빅 5 중 버팔로, 코끼리, 코뿔소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