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찢어진 지갑을 장롱에 숨겨둔 이유

by 최강정

내 장롱 속에는 15년 된 유물이 하나 살고 있다.

이제는 중학생이 된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 그러니까 15년도 더 된 유물 같은 지갑이다. 끝까지 그냥 쓰겠다는 고집을 꺾기 위해, 나는 먼저 새 지갑을 사 들고 와 남편 앞에 내밀었다. 막상 새 지갑을 챙겨 들고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본 뒤, 덩그러니 남겨진 낡은 지갑을 마주하니 정작 버리지 못하는 건 나였다.


지갑의 해진 구석을 가만히 바라보니 닳도록 출근하며 우리 가족을 위해 애썼구나 싶어서. 찢어진 지갑 틈으로 남편의 지난한 수고로움이 가슴에 박혀 있는 것만 같아서. 결국 나는 그것을 버리는 대신 장롱 깊숙한 곳에 넣어두기로 했다. 남편이 미워질 때마다 꺼내 볼, 우리 가족을 지켜낸 '부적' 같은 것이라 여기기로 하며 모셔뒀다.


남편은 지갑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물건을 쉽게 버리는 법이 없다. 오래되어 켜지지도 않는 노트북과 구형 핸드폰은 물론이고, 이십 년이 넘은 옷들도 옷장 한구석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소맷단과 목덜미가 해져서 도저히 입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야만 겨우 '퇴출 허가'가 떨어진다. 덕분에 우리 부부의 시간이 흐를수록 옷장은 비좁아졌고,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옷 정리를 할 수 있었다.


그 지갑은 신혼 때 내 용돈을 꼬박 모아 깜짝 선물했던 MCM 지갑이었다. 내 취향대로 골라 일방적으로 안겨준 선물이었음에도, 그는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불평 없이 그 지갑과 동행했다.

"형, 지갑 하나 사야겠는데?" "언니, 형부 지갑 찢어질 것 같아." 주변의 걱정 어린 참견을 넘어 시어머니까지 "아들이 왜 저러냐"며 혀를 내두르실 정도였다. 회사 팀장이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그는 타인의 시선보다 제 손에 익은 물건을 지키는 데 더 진심이었다.


회색 로고는 빛이 바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모서리의 가죽은 박음질이 터져 실밥이 제멋대로 삐져나와 있었다. 지갑의 몸체는 수만 번 오갔을 손길을 증명하듯 가죽이 벗겨져 속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꼴을 보는 내 속도 함께 타들어 갔다.


기념일마다 지갑을 바꿔주겠노라 제안했지만 그의 대답은 늘 "No"였다. "고야드 아니면 안 바꿔." 평소 명품에 관심도 없던 사람이 내건 조건은 분명 '바꾸기 싫다'는 핑계였다. 가끔 백화점에 들러 구경을 시켜줘도 그는 늘 "다음에"를 연발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게다가 그의 취향은 시대의 흐름을 역행했다. 무조건 '장지갑'이어야 한다는 것.


"요즘은 다들 카드지갑이나 반지갑 쓰세요. 장지갑은 잘 안 나오거든요."

매장 직원의 설명에도 남편은 무뚝뚝하게 자기만의 철학을 툭 던졌다.

"난 돈을 접는 게 싫더라고."

말수도 적고 감정 표현도 드문, 일밖에 모르는 워커홀릭. 가끔 살아있나 건드려 봐야 생사가 확인될 것 같은 이 돌부처 같은 남자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빳빳하게 펴진 지폐만큼이나 곧은 자신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장지갑 같은 빳빳한 남편과 살며 당신은 왜 나에게 한 번을 안 굽히냐고 수없이 싸웠다. 수고로움에 대한 감정 표현을 일부러 극도로 자제한다고 의심이 들 정도였다. '마음을 들키면 안 된다.'라는 비밀요원의 특명을 수행하듯이 남편은 나에게 항상 장지갑 비밀요원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마음을 먹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닌데, 찢어지게 낡은 지갑을 쓰는 남편이 안쓰러우니까. 이름난 명품관의 장지갑 가격에 '헉' 소리가 절로 났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장지갑 사냥'을 이어갔다.

비싼 브랜드 네임보다는 그가 좋아하는 '장지갑'의 실용성을 갖춘, 적당히 견고하고 정갈한 가죽 지갑. 그가 15년 전 내 선물을 묵묵히 받아들였듯, 이번에도 나의 마음이 담긴 이 새 지갑이 그의 주머니 속에서 새로운 세월을 견뎌주길 바란다.

장롱 속 낡은 지갑은 이제 쉬게 해 주어야지. 그 지갑이 품고 있던 남편의 고단했던 30대와 40대의 조각들은 이제 내가 소중히 간직할 테니. 이것이 화려하거나 빛나지는 않지만 찢어지도록 내 곁에 머물며 나를 지켜준 비밀요원에 대한 나의 사랑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