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가 이끄는 AI르네상스
"문송합니다."
문과 출신이라 죄송하다는 뜻의 이 신조어가 등장한 지 벌써 몇 년이 흘렀습니다. 취업 시장에서 이공계가 각광받고, 개발자와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시대의 총아로 떠오르면서 문과생들은 스스로를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로 여기게 되었죠.
저 역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며 이런 시선을 무수히 받았습니다. "요즘 시대에 국어국문학과를 왜 나왔느냐"는 질문부터, "공무원밖에 할 게 없겠네"라는 편견까지. 공무원이 된 후에도 "역시 문과는 안정적인 길만 택하네"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AI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확신합니다. "문송"의 시대는 정말로 끝났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요.
AI 기술의 발전 방향을 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발견됩니다. 초기 AI는 소수의 전문가들이 복잡한 알고리즘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수학과 프로그래밍에 능통한 사람들만이 AI를 다룰 수 있었죠.
그런데 ChatGPT가 등장하면서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자연어로 AI와 대화할 수 있게 되었고, 코딩을 몰라도 AI를 활용해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이브코딩(Vibe-based Coding)이라는 용어도 등장했습니다. 정확한 문법보다는 '감'과 '맥락'으로 코드를 작성하는 방식인데, 이게 실제로 잘 작동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노코드/로우코드 플랫폼이 확산되면서 비개발자도 웹사이트나 앱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는 새로운 직업까지 생겨났습니다.
이 모든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기술의 보편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AI를 '만드는' 사람보다 AI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더 가치 있는 시대가 온 거예요.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결국 기술을 모르면 뒤떨어지는 거 아니야?" "코딩도 못하는데 어떻게 AI 시대를 주도한다는 거야?"
하지만 제가 직장에서 일하며 직접 목격한 현실은 이런 편견과 달랐습니다.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해결할 것인가'를 정의하는 능력이었거든요.
직장에서 정말 가장 자주 마주쳤던 상황이 이거였어요. IT 전문가들이 기술적으로는 완벽한 시스템을 만들어놓았는데, 정작 현장에서는 아무도 쓰지 않는 것. 왜일까요? 해결하려는 문제 자체를 잘못 정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업무 효율성 향상"이라는 목표로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정작 현장 공무원들이 겪는 진짜 어려움은 '복잡한 민원인과의 소통'이었다면? 아무리 훌륭한 기술도 소용없죠.
AI 시대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기술 장벽이 낮아지면서 누구나 AI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명확히 정의하는 능력은 더욱 중요해졌어요. 그리고 이 능력이야말로 문과생들이 오랫동안 훈련받아온 핵심 역량입니다.
과거에는 AI를 직접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최고였습니다. 복잡한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데이터를 처리하고, 모델을 구축하는 능력이 핵심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릅니다.
노코드/로우코드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코딩을 몰라도 AI 솔루션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부상했습니다. 이제는 AI에게 자연어로 명확하고 효과적인 지시를 내리는 능력이 복잡한 코딩 실력보다 더 중요해진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텍스트를 분석하고,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며, 언어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과, 코딩은 잘하지만 언어 감각이 부족한 사람 중 누가 AI와 더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요?
제가 직장에서 일할 때 가장 뼈저리게 느꼈던 건, 현장을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설계해도, 현장의 구체적인 상황과 사람들의 실제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AI 모델이라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의료 AI는 의학 지식이, 교육 AI는 교육 현장에 대한 이해가, 법률 AI는 법학적 사고가 있어야 제대로 작동하죠.
여기서 중요한 건, 지금 현재 이런 도메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문과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사회과학, 인문학, 예술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AI를 활용할 때, 그 시너지는 상상 이상일 거예요.
결국 핵심은 이겁니다. AI 시대에는 기술을 만드는 사람보다 기술을 통해 올바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더 중요해졌다는 것. 그리고 그 '올바른 문제'를 정의하고, 맥락을 이해하며,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은 바로 우리 문과생들이 가진 강점이라는 것.
이제는 기술을 만들 줄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 기술을 잘 활용할 줄 알면 됩니다. ChatGPT에게 좋은 질문을 던질 줄 아는 능력, 클로드와 효과적으로 협업하는 방법, AI 도구들을 조합해서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센스 - 이런 것들이야말로 문과생들이 가진 언어 능력과 사고 체계에 잘 맞는 영역들입니다.
다양한 AI 도구들을 직접 써보면서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ChatGPT에게 복잡한 정책 문서를 요약해달라고 할 때, 클로드와 함께 글의 논리 구조를 다듬을 때, 미드저니로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 때... 이 모든 과정에서 필요한 건 코딩 실력이 아니라 명확한 의사소통 능력과 창의적 사고였거든요.
국문학을 공부하며 기른 문해력, 정책학을 통해 익힌 체계적 사고, 직장에서 일하며 경험한 소통과 조정 능력이 AI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을 몸소 느꼈습니다.
물론 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부족한 건 기술력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에요.
이제 "문송합니다"라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문과라서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기술을 만드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기술과 인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들, 기술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