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토니블레어 연구소가 제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전 영국 수상이었던 토니블레어가 운영하는 토니블레어 연구소(Tony Blair Institute for Global Change)가 2025년 5월 흥미로운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AI 시대의 거버넌스: 지방정부 재상상하기(Governing in the Age of AI: Reimagining Local Government)"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현재 영국 지방정부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를 진단하고, 인공지능을 활용한 혁신적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단순히 기술 도입을 넘어서 지방정부의 운영 모델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보고서는 크게 네 개의 핵심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지방정부 재상상의 필요성을 역사적 맥락과 함께 설명하면서, 20세기 초 지방정부가 국가 발전의 엔진 역할을 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AI 기반 혁신을 확산시키기 위한 새로운 통합 플랫폼인 DAIS(Devolved AI Service) 구축 방안을 상세히 제시합니다. 세 번째로는 구체적인 AI 도구들의 활용 방안을 실제 사례와 함께 소개하며, 마지막으로는 지방의회 의원들이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실용적 권고사항들을 제공합니다.
토니블레어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영국 지방정부가 처한 상황은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재정적·행정적으로 위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우선 재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보고서는 2029년까지 영국 지방정부가 현재 제공하는 수준의 공공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2020년 대비 최소 160억 파운드(약 26조 원)에 달하는 추가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15년 동안 영국 중앙정부가 지속적으로 지방정부의 재정을 삭감하면서 대부분의 지방정부는 이미 극도의 재정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재정 압박은 지방정부의 파산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8년 이후 영국 내 7개의 지방정부가 재정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공식적으로 파산을 선언한 상태이며, 더 많은 지방정부가 유사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재정적 한계가 결국 주민들에게 제공하는 공공 서비스의 질적 악화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보고서가 밝히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사회복지 분야, 특히 노인 돌봄 서비스입니다.
2024년 3월 기준으로 영국 내에서 78,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돌봄 서비스 평가를 6개월 넘게 기다리고 있으며, 평가가 지연되면서 적절한 돌봄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점은 2022~2023년 한 해 동안, 돌봄 서비스를 신청한 65세 이상의 노인 28,655명이 돌봄 서비스를 전혀 제공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지방정부의 서비스 대응 능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또 다른 주요 서비스인 건축 및 도시계획 분야 역시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지방정부의 행정력과 인력 부족으로 인해, 2023~2024년 기간 동안 주요 건축 계획 신청의 단 20%만 법이 정한 처리 기한 내에 완료되었습니다. 소규모 신청 건의 경우에도 38%만 제시간에 처리가 이루어졌고, 나머지 60% 이상은 장기 지연되어 계획 승인 시스템 자체가 마비 상태에 가까워졌습니다. 이러한 처리 지연은 결국 지역개발 지연, 경제활동 위축, 주민 불편 등 부정적 연쇄 효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고서는 지방정부의 재정 압박이 장기화되고, 인력과 시스템의 한계가 지속된다면 영국 지방정부의 공공 서비스는 현재의 위기 상황을 넘어서 완전한 붕괴 단계에 이를 수도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토니블레어 연구소는 AI 기반의 혁신적인 지방정부 운영 모델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방정부의 효율성과 대응 능력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토니블레어 연구소는 획기적인 해결책으로 DAIS(Devolved AI Service) 구축을 제안합니다. DAIS는 지방정부들이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통합 AI 서비스 플랫폼으로, 개별 지방정부가 각각 AI 시스템을 구축하는 비효율성을 해소하고 빠른 혁신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 플랫폼은 다섯 가지 핵심 기능을 제공합니다. 첫째, AI 도입을 위한 공유 비전과 표준화된 거버넌스 체계를 제공합니다. 둘째, 시장에서 구하기 어렵거나 개발 비용이 높은 AI 도구들을 직접 개발하여 모든 지방정부가 활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셋째, 혁신이 확산될 수 있는 기술 인프라와 표준을 구축합니다. 넷째, 지방정부 직원들의 AI 활용 역량을 강화하는 교육과 지원을 제공합니다. 다섯째, 개발된 도구와 노하우를 해외에 수출하여 지속 가능한 운영 모델을 구축합니다.
이러한 DAIS 플랫폼을 통해 제공될 세 가지 핵심 AI 서비스가 제안됩니다. 첫째는 대용량, 고비용 서비스 분야에서의 AI 동료 시스템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복지사의 평가 업무를 지원하여 대기 시간을 단축하고, 사회복지사들이 행정업무보다 실제 돌봄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분석에 따르면 현재 227,000건의 돌봄 평가 적체를 한 달 내에 해소할 수 있다고 추정됩니다. 둘째는 시민들의 서비스 이용을 효율적으로 안내하는 지역 내비게이션 어시스턴트(LNA) 시스템입니다. 이는 서비스 정보 제공, 자격 요건 확인, 신청 진행 상황 조회 등을 통합적으로 처리하여 불필요한 문의를 줄이고 서비스 접근성을 높입니다. 셋째는 지역 계획 수립을 위한 데이터 분석 및 의사결정 지원 시스템과 AI 계획 어시스턴트입니다. 이를 통해 양질의 동적 지역 계획을 수립하고 계획 신청 과정을 간소화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통합 AI 서비스 플랫폼의 경제적 효과도 상당합니다. 보고서는 한 지방정부 사례 분석을 통해 AI 도입 시 전체 업무의 26% 이상을 자동화하거나 개선할 수 있으며, 이는 연간 100만 시간의 업무 시간 절약과 3천만 파운드의 생산성 향상 효과를 가져온다고 추정했습니다. 이를 전국 단위로 확대하면 연간 80억 파운드, 3억 8천만 시간의 절약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모든 가구당 연간 325파운드의 혜택에 해당합니다.
흥미롭게도 대한민국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고, 실제로 유사한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국 지자체들은 각각 AI 도입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충남 계룡시는 충청남도 지자체 최초로 Chat GPT를 활용한 업무간소화 서비스를 개발하여 단순, 반복적인 업무처리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있습니다. 경북도는 전국 지자체 최초로 공개한 거대언어모델(LLM) 기반 AI 챗봇 서비스 '챗경북'을 통해 보도자료 작성, 사업 건의 조서 작성 등을 지원하여 1시간 걸리던 초안 작성 시간을 3분으로 단축시켰습니다. 전남 순천시는 식비·초과근무수당 지급, 교육훈련 실적 등록 등 정형화된 업무를 소프트웨어 로봇이 자동 처리하는 업무 자동화(RPA)를 도입했습니다. 강원 양구군은 공무원 17명으로 구성된 'AI 마스터즈 1기'를 운영하며 AI 기술의 실무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전북도, 제주도, 세종시, 경기 과천시, 경북 경산시, 대구 달서구 등이 AI 기술을 업무 수행에 활용하기 위한 관련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별적 접근 방식은 중복 투자와 비효율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국 정부는 토니블레어 연구소의 DAIS 제안과 매우 유사한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바로 차세대 지방행정공통시스템 구축 사업이 그것입니다. 한국지역정보개발원이 주도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현재 17개 광역자치단체에서 사용하는 '시도행정시스템'과 228개 기초지자체에서 사용하는 '새올행정시스템'을 통합하고 현대화하는 대규모 사업입니다. 총 6,800억원이 투입되는 이 사업은 2026년부터 2028년까지 3년간 단계적으로 추진될 예정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차세대 시스템이 단순한 기존 시스템의 업그레이드를 넘어서 AI 기반의 혁신적 기능들을 통합적으로 제공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정보시스템 마스터플랜(ISMP) 단계에서는 클라우드 기반 인프라 구축, AI 도구 통합, 표준화된 데이터 관리 체계 등이 핵심 과제로 검토되고 있습니다. 이는 토니블레어 연구소가 제안한 DAIS의 핵심 기능들과 거의 일치하는 방향입니다. 이는 개별 지자체가 각각 AI 시스템을 구축하는 대신, 공통 플랫폼을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혁신 속도를 가속화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됩니다. https://zdnet.co.kr/view/?no=20250508222556
만약 이 차세대 지방행정공통시스템이 성공적으로 구축된다면, 한국은 토니블레어 연구소가 제안한 DAIS 모델을 실제로 구현하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자체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통합 AI 플랫폼을 통해 행정 효율성을 혁신적으로 개선하고, 시민 서비스 품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 진출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토니블레어 연구소의 이러한 제안은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서 지방정부의 역할과 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자는 것입니다. 개별 지방정부가 각각 AI 시스템을 구축하는 대신,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통합 플랫폼을 구축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혁신 속도를 가속화하자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차세대 지방행정공통시스템 구축 사업이 바로 이러한 비전을 현실화하는 선도적 사례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위기에 대응하는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장기적 우선순위에 집중하고, 활기차고 회복력 있는 지역 경제를 구축하며, 시민 삶의 의미 있는 개선을 이루어내는 스마트한 거버넌스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