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가 하루 만에 일주일치 일을 해도 시니어가 더 바쁜 이유
ChatGPT가 등장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우리의 일하는 방식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많은 조직에서는 여전히 과거의 기준으로 성과를 평가하고, 과거의 방식으로 업무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급격한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을까요?
최근 직장에서 이런 경험을 해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마케팅팀에서 올라온 브랜드 스토리는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구조도 탄탄합니다. 하지만 읽어보니 우리 브랜드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획팀이 제출한 사업계획서는 100페이지가 넘고 모든 항목이 빠짐없이 채워져 있었지만, 시장 현실과는 동떨어진 가정들로 가득했고 실제 실행 방안은 추상적이기만 했습니다.
분석팀의 보고서에는 화려한 차트와 방대한 데이터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정작 "그래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영업팀이 작성한 제안서는 클라이언트가 요구한 모든 항목을 완벽하게 채웠지만, 고객이 정말 해결하고 싶어 하는 핵심 문제는 놓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결과물들의 공통점은 겉보기에는 완성도가 높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그럴싸함의 함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마치 숙련된 전문가가 작성한 것처럼 보이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마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 명품처럼, 겉모습은 진짜와 구분하기 어렵지만 품질과 내구성에서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과거에는 이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애초에 "그럴싸해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주니어들은 기본적인 작성 능력부터 차근차근 길러야 했고, 따라서 미완성된 상태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통적인 업무 지도 방식은 이런 현실을 전제로 설계되었습니다. 주니어가 빈 페이지나 엉성한 초안을 가져오면, 시니어는 그 불완전함을 통해 주니어의 사고 과정과 이해 수준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논리가 부족하네, 이 부분에 대한 근거를 더 찾아봐", "이 분석이 표면적이야, 고객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봐", "여기 데이터 해석이 잘못됐어, 이렇게 접근해보면 어떨까" 같은 구체적인 지도가 가능했습니다. 몇 번의 피드백을 거쳐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과정에서, 주니어는 단순히 결과물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는 방법 자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요리를 배울 때 처음에는 재료 써는 것부터 시작해서 조미료 맞추는 법, 불 조절하는 법을 하나씩 익혀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각 단계마다 명확한 피드백 포인트가 있었고, 개선 방향도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주니어들이 이미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결과물을 가져오기 때문에, 문제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근본적인 사고의 오류에 숨어있게 됩니다. 마치 요리 초보자가 갑자기 미슐랭 레스토랑 수준의 플레이팅을 들고 와서 "제가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겉보기에는 완벽해 보이지만, 맛을 보면 기본기가 전혀 없다는 것이 드러나죠.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결과물에 대해 기존의 "점진적 개선" 방식을 적용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과거라면 "이 문장이 어색하니까 이렇게 바꿔봐", "이 차트에 단위를 추가해봐" 같은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피드백을 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전체 접근법이 잘못됐어", "이 분석의 전제 자체가 틀렸어"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건물의 벽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초부터 다시 쌓아야 하는 상황과 같습니다.
실제로 많은 시니어들이 "차라리 내가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이 더 빠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겉보기에 완성도가 높은 결과물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것보다는, 백지에서 시작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입니다. 이는 전통적인 멘토링 시스템이 가정했던 "점진적 개선을 통한 학습"이라는 기본 원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한 시니어 개발자의 경험담이 이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인턴들이 하루 만에 과거 일주일치 분량의 코드를 쏟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하지만 제 업무는 오히려 더 어려워졌어요. 단순한 문법 오류나 명백한 버그는 없어졌지만, 남은 문제들은 훨씬 더 미묘하고 복잡해졌거든요. 겉보기엔 멀쩡한 코드가 실제로는 전혀 동작하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이렇게 AI 시대의 저성과는 과거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과거의 저성과가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저성과는 "많이 하지만 틀리게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양적 착각입니다. 하루에 과거 일주일치 분량을 생산하면서 스스로 매우 생산적이라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사용할 수 없거나 품질이 떨어지는 결과물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둘째는 깊이 부재입니다.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대한 깊은 고민이 부족하며, "내가 정말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걸 더 효과적으로 단순화할 방법이 있는지" 같은 자기 성찰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셋째는 피드백 회피 경향입니다. 기존 결과물을 개선하기보다는 "또 다른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하는 패턴을 보이며, 이는 종종 새로운 문제를 야기합니다
넷째는 우리가 "노력 역전 현상(Effort Inversion)"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결과적으로 시니어가 주니어보다 한 건의 업무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게 되어, 원래 시니어를 돕기 위한 업무가 오히려 시니어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여전히 과거의 기준으로 성과를 평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과거 기준의 합격점"을 목표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AI가 보편화된 시대에는 평가 기준 자체가 상향 조정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오타 없는 기획서"가 합격점이었다면 현재는 "시장에서 실제로 검증된 실행 계획"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문법적으로 완성된 보고서"가 아니라 "실행 가능한 구체적 인사이트가 담긴 보고서", "요구사항을 모두 반영한 제안서"가 아니라 "고객에게 실질적 가치를 창출하는 솔루션", "버그 없는 코드"가 아니라 "비즈니스 목적에 부합하고 장기적으로 유지보수 가능한 시스템"이 새로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1970년대 빌 게이츠가 16살에 고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코딩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희소 자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무엇을 개발하고, 그것이 어떻게 비즈니스적 가치를 창출하는가?"가 훨씬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AI 시대의 주니어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역량이 요구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AI 결과물에 대한 비판적 검증 능력입니다. AI가 만든 결과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동작하는지, 원래 목적에 부합하는지, 개선점은 없는지 끊임없이 검증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 성찰 능력도 중요합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명확히 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AI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지시에만 정확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애매한 요구사항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실행 검증 습관도 필수적입니다. 결과물이 실제로 동작하는지, 현실에 적용 가능한지 직접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한 개발자의 표현을 빌리면, "동작하지 않고, 직접 테스트나 검증도 하지 않고, 간결하게 정제하지도 않은 거대한 코드 뭉치를 넘기는 것"은 "LLM이 인간에게 탑재된 버전"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으로 피드백 수용 능력이 중요합니다. 근본적인 사고의 개선을 위해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새로운 접근법을 찾기보다는 기존 접근법의 심화와 개선에 집중해야 합니다.
시니어들도 기존 방식을 고수해서는 안 됩니다.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멘토링 방식이 필요합니다. 우선 요구사항의 정확도를 높여야 합니다. "대충 이런 느낌으로"라는 애매한 지시는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AI 프롬프트를 작성하듯 명확하고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제시해야 합니다. 품질 기준도 재정의해야 합니다. 양적 완성도를 넘어선 질적 깊이의 구체적 기준을 제시해야 합니다. "문서를 잘 썼는가?"가 아니라 "비즈니스에 실질적 임팩트가 있는가?", "실제로 실행 가능한가?", "고객에게 진정한 가치를 창출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검증 방식도 변화해야 합니다. 결과물 자체보다는 사고 과정과 논리 구조를 점검해야 합니다. "왜 이렇게 생각했는지", "어떤 가정을 전제로 했는지", "다른 대안은 충분히 고려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피드백 스킬도 필요합니다. 과정 중심의 코칭이 중요하며, 단순히 "이건 틀렸다"가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라는 방식으로 사고 방법 자체를 개선시켜야 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주니어나 시니어 중 한쪽만의 노력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주니어는 LLM을 활용한 생산성 향상과 동시에 인간만의 고유한 판단력과 책임감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고, 시니어는 전통적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지도 방식을 개발해야 합니다. 조직 차원에서도 새로운 기준과 프로세스로 전환하여 AI 시대에 적합한 업무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한 개발자가 지적했듯이, "실제로 제품 품질에 신경 쓰는 소수의 사람들이 엄청난 부담을 떠안게 되는" 상황을 방지하려면, 조직 전체가 새로운 기준에 맞춰 함께 변화해야 합니다.
AI가 모든 것을 바꾸는 시대입니다. 단순히 도구만 바뀐 것이 아니라 일 자체의 기준과 방식이 근본적으로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만들 수 있는 능력"이 희소 자원이었다면, 지금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이 진짜 희소 자원이 되었습니다. 주니어든 시니어든 과거의 성공 공식에 안주할 수 없는 전환점에 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입니다. AI가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작업을 대신해주는 만큼, 우리는 더 창의적이고 전략적인 사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거대한 변화를 겸허히 인정하고, 새로운 기준에 맞춰 함께 진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AI와 협력하는 시대에서 진정한 가치를 창출하고,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