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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미스트랄은 라팔의 꿈을 꾸는가

프랑스 기술 독립의 두 얼굴 : 전투기에서 AI까지

by 서지삼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미스트랄(Mistral) 바람은 강하고 차갑습니다. 이 바람은 프랑스 남부의 하늘을 맑게 만들어주지만, 때로는 거칠고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흥미롭게도 프랑스는 자신들의 두 가지 야심작에 바람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나는 하늘을 나는 라팔(Rafale, '돌풍') 전투기이고, 다른 하나는 디지털 세상을 누비는 미스트랄AI입니다.

이 두 기술의 운명은 과연 얼마나 닮아있을까요? 라팔이 걸어온 험난한 길을 미스트랄AI도 따라가게 될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써내려갈까요?


라팔의 긴 여정 - 저주에서 축복으로

라팔 전투기의 이야기는 실패로 시작됩니다. 1980년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이 전투기는 프랑스의 기술적 자존심이 담긴 걸작이었습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공동으로 유로파이터를 개발할 때, 프랑스만은 "우리 방식대로 하겠다"며 독자 노선을 고집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2001년 실전 배치 후 무려 14년 동안 단 한 대도 수출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2002년 차세대 전투기를 선정할 때도 미국의 F-15에 밀렸고, 프랑스어를 쓰는 이웃 나라 벨기에마저 미국의 F-35를 선택했을 때는 정말 절망적이었습니다. '저주받은 전투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죠.


전환점이 온 이유

그런데 2015년을 기점으로 상황이 극적으로 바뀝니다. 이집트가 첫 구매자가 된 이후, 인도, 카타르, 그리스, 크로아티아, UAE, 세르비아까지 줄줄이 라팔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냈을까요?

첫 번째는 실전 검증이었습니다. 리비아 내전, 아프가니스탄 작전, ISIS 소탕전에서 라팔은 탁월한 성능을 보여주었습니다. 심지어 ISIS 포로들이 "미군 전투기보다 라팔이 더 무서웠다"고 증언할 정도였습니다.

두 번째는 지정학적 변화였습니다. 미국 일극 체제가 흔들리면서 많은 국가들이 "미국에만 의존하지 않겠다"는 헤징 전략을 택하기 시작했습니다. 라팔의 '100% 프랑스 기술'이라는 특징이 갑자기 매력적인 장점이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전략적 외교였습니다. 마크롱 대통령과 프랑스 정부는 단순히 무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지지와 외교적 협력을 패키지로 제공했습니다. 그리스-터키 갈등에서 그리스를 지원하고, 이집트의 지역 강국 야심을 후원하며 라팔 판매를 성사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스트랄AI의 현재

2023년 4월, 구글 딥마인드와 메타 AI 출신의 젊은 과학자들이 파리에서 미스트랄AI를 창업했습니다. 창업 6개월 만에 메타의 거대한 LLaMA 모델을 73억 개의 파라미터로 뛰어넘는 성과를 보여주며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들의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미국 빅테크들이 수백억, 수천억 개의 파라미터를 가진 거대한 모델로 '크기 경쟁'을 벌일 때, 미스트랄은 '효율성 혁명'을 선택했습니다. 작지만 강한 모델로 차별화하겠다는 것이었죠.

https://www.lemonde.fr/en/economy/article/2025/06/12/at-vivatech-emmanuel-macron-hails-historic-partnership-between-mistral-ai-and-nvidia_6742267_19.html


빠른 성장과 인정

창업 10개월 만에 기업가치 20억 유로(약 2조 8천억 원)를 인정받았고, 최근에는 60억 달러(약 8조 원)까지 평가받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1500만 유로를 투자하며 Azure 클라우드에 미스트랄 모델을 탑재하기로 했고, 엔비디아와도 긴밀한 협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MMLU 테스트에서 81.2%의 정답률을 기록해 GPT-4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한 것도 인상적입니다. 단 34명의 직원으로 이룬 성과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습니다.


두 바람의 공통점 - 패턴을 읽다

라팔과 미스트랄AI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보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프랑스가 기술 독립을 추구하는 고유한 '공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독자 노선의 고집

두 기술 모두 프랑스만의 독창적인 길을 추구했습니다. 라팔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공동 개발을 거부하고 100% 프랑스 기술로 만들어졌습니다. 미스트랄AI 역시 미국 빅테크의 '크기 경쟁'에 동참하지 않고 효율성이라는 독자적인 노선을 택했습니다.

이런 선택은 위험부담이 크지만, 성공할 경우 강력한 차별화 요소가 됩니다. 다른 나라들이 미국 기술에 의존하고 싶지 않을 때, 프랑스 기술은 매력적인 대안이 되는 것입니다.


초기의 고전과 인내

라팔은 14년간 수출 실패를 겪었고, 미스트랄AI도 아직 창업 초기 단계에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단기적 실패에 굴복하지 않고 장기적 비전을 유지하는 인내력을 보여줍니다.

이는 프랑스 문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즉각적인 성과보다는 철학적 일관성과 장기적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적 배경이 이런 인내를 가능하게 합니다.


지정학적 기회 포착

라팔은 미국 일극 체제의 변화라는 지정학적 전환점을 정확히 포착했습니다. 미스트랄AI 역시 AI 분야에서 미국 독점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시점에 등장했습니다.

프랑스는 이런 지정학적 변화를 읽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단순히 기술적 우수성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정치적·외교적 맥락을 전략적으로 활용합니다.


정부의 전략적 지원

라팔 수출에는 마크롱 대통령의 직접적인 외교 노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미스트랄AI 역시 프랑스 정부의 'AI 주권' 정책 하에서 전략적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부가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지원한다는 점입니다. 프렌치테크 비자, 비바테크 플랫폼, 연구개발 인프라 등을 통해 간접적이지만 효과적인 지원을 제공합니다.


차이점과 시대적 맥락 - 다른 세상, 다른 도전

하지만 라팔과 미스트랄AI는 완전히 다른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차이점들을 이해하는 것이 미스트랄AI의 미래를 예측하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개발 속도의 차이

라팔은 1980년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해 2001년 실전 배치까지 20년이 걸렸습니다. 반면 미스트랄AI는 창업 6개월 만에 세계적 수준의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AI 분야의 특성을 반영합니다. 물리적 제품인 전투기는 긴 개발 기간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지만, 소프트웨어 기반의 AI는 상대적으로 빠른 개발과 검증이 가능합니다.


시장 진입 장벽의 차이

전투기 시장은 극도로 폐쇄적입니다. 정부 간 협상, 복잡한 안보 고려사항, 막대한 자본 등으로 인해 신규 진입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반면 AI 시장은 상대적으로 열려있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만 있으면 단기간에 시장을 뒤흔들 수 있습니다.

이는 미스트랄AI에게 기회이자 위험입니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지만, 경쟁자들도 빠르게 따라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로벌화의 영향

라팔이 개발되던 시대에는 각국이 자국 방산업체를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국경을 초월한 협력과 경쟁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미스트랄AI가 마이크로소프트와 협력하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것은 이런 복잡한 글로벌 환경을 반영합니다. 완전한 고립은 불가능하지만, 완전한 종속도 피해야 하는 미묘한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기회의 창과 시간적 압박감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시간입니다. 라팔은 20년의 개발 기간과 14년의 수출 실패 기간, 총 34년에 걸친 긴 여정 끝에 성공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방산업계의 특성상 기술 변화가 상대적으로 느리고, 교체 주기가 수십 년에 걸치기 때문에 이런 '인내의 시간'이 가능했습니다.

반면 AI 분야는 완전히 다른 시간축에서 움직입니다. 기술 발전 속도가 기하급수적이고, 시장 선점의 중요성이 극대화되어 있습니다. ChatGPT가 2022년 11월 출시 후 단 2개월 만에 1억 사용자를 돌파한 것처럼, AI 시장에서는 '승자독식' 현상이 매우 빠르게 나타납니다.

미스트랄AI에게는 '14년의 실패'를 견딜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OpenAI는 GPT-5를 준비하고 있고, 구글은 Gemini를 발전시키고 있으며, 중국의 바이두와 바이트댄스도 맹렬히 추격하고 있습니다. 2-3년 내에 기술적 격차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질 수 있습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AI 분야의 '임계점(tipping point)' 효과입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사용자와 데이터를 확보한 플랫폼은 더 나은 모델을 만들고, 이는 다시 더 많은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선순환을 만듭니다. 한번 이 선순환에서 밀려나면 따라잡기가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라팔이 '저주받은 전투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지정학적 변화라는 외부 요인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AI 시장에서는 외부 요인을 기다릴 여유가 없습니다. 미스트랄AI는 스스로 게임의 규칙을 바꿔야 하고, 그것도 빠른 시간 내에 해내야 합니다.

이런 시간적 압박감은 미스트랄AI뿐만 아니라 AI 주권을 추구하는 모든 국가들이 직면한 현실입니다. 중국이 AI 굴기를 국가 최우선 과제로 삼고, 유럽연합이 'AI 법안'을 서둘러 통과시키며, 각국이 AI 전략을 속속 발표하는 것도 이런 시간적 압박감 때문입니다.

기회의 창은 빠르게 닫히고 있습니다. 미스트랄AI가 라팔의 꿈을 실현하려면, 라팔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합니다.


바람의 방향과 시간의 흐름

미스트랄이 라팔의 꿈을 꾸고 있는지는 곧 답이 나올 것입니다. 라팔이 34년에 걸친 긴 여정 끝에 성공을 맛볼 수 있었다면, 미스트랄AI는 향후 2-3년 내에 운명이 결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분명한 것은 프랑스가 기술 독립에 대한 철학과 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간과의 경쟁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라팔 전투기가 지중해 상공을 가르며 프랑스의 기술적 자존심을 세워주고 있듯이, 미스트랄AI도 디지털 세상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두 바람 모두 프랑스 남부에서 시작되어 세계로 퍼져나가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도와 방식은 완전히 다릅니다.

어쩌면 미스트랄AI는 라팔의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라팔이 이루지 못한 더 큰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리적 하늘에서 디지털 클라우드로, 프랑스의 기술 독립 정신은 새로운 무대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모든 중간 강국들에게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닙니다. 이는 자신만의 길을 찾는 방법에 대한 살아있는 교과서입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산맥 사이에서 자신만의 봉우리를 세우려는 모든 나라들이 참고할 수 있는 실전 매뉴얼인 것입니다.

바람은 예측하기 어렵고, AI 시대의 바람은 더욱 빠르게 방향을 바꿉니다. 하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불어온다면, 그 바람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스트랄의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어갈지, 그리고 얼마나 빨리 그 방향이 결정될지, 우리 모두 주목해서 지켜볼 일입니다.

시계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행동의 이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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