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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U GDPR의 승리공식, AI에도 통하나?

메타의 EU AI 규제 거부로 본 글로벌 기술 거버넌스의 새로운 갈림길

by 서지삼

두 번의 규제 혁명 사이에서

2025년 7월, 메타 플랫폼스가 유럽연합의 AI 실천강령 서명을 거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글로벌 정책 책임자 조엘 캐플란은 링크드인에 "유럽이 AI와 관련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 뉴스를 접하는 순간, 많은 사람들에게 묘한 기시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6년 전, 2018년 GDPR(일반 데이터 보호 규정) 도입을 앞두고 벌어졌던 상황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당시에도 글로벌 기업들은 "과도한 규제"라며 강하게 반발했고, 유럽의 정책이 글로벌 혁신을 저해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최전선에는 역시 메타(당시 페이스북)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GDPR은 유럽의 완승으로 끝났습니다. 전 세계가 유럽의 개인정보보호 기준을 따르게 되었고, 디지털 경제의 게임 룰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이른바 '브뤼셀 효과'의 대표적 사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나올까요? 유럽이 다시 한번 AI라는 새로운 영역에서 글로벌 룰메이커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번에는 다른 변수들이 작용해서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GDPR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그 승리의 공식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공식이 AI라는 완전히 다른 게임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지 면밀히 검토해봐야 합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50719011900091


GDPR 이해하기 - 유럽이 세계를 바꾼 방법

많은 사람들에게 GDPR은 '그 귀찮은 쿠키 팝업을 만든 법' 정도로 기억됩니다. 웹사이트를 방문할 때마다 나타나는 "쿠키 허용" 팝업 때문에 GDPR에 대한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GDPR의 진짜 의미와 파워를 완전히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GDPR, 즉 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일반 데이터 보호 규정)은 2018년 5월 25일부터 시행된 유럽연합의 개인정보보호 법률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유럽의 법"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는 전 세계 디지털 경제의 게임 룰을 근본적으로 바꾼 혁명적 사건이었습니다.

GDPR의 핵심 원칙들을 이해하기 위해 일상의 비유로 생각해보겠습니다. 개인정보를 당신의 소중한 개인 물건으로 상상해보세요. 누군가 당신의 물건을 가져가려면 명확한 허락을 받아야 하고, 무엇에 쓸 건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하며, 언제든지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물건을 안전하게 보관할 책임도 져야 하죠. GDPR은 바로 이런 상식적인 원칙들을 디지털 세상의 개인정보에 적용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GDPR이 도입한 주요 권리들을 살펴보면, 먼저 '동의권'이 있습니다. 기업이 개인정보를 수집할 때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마치 누군가 당신 집에 들어올 때 구체적으로 무슨 일로 왔는지 말하고 허락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으로 '열람권'이 있습니다. 개인은 자신의 정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삭제권', 일명 '잊힐 권리'도 있습니다. 더 이상 개인정보 처리가 필요하지 않으면 삭제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동권'이 있어서, 자신의 데이터를 다른 서비스로 옮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GDPR의 진짜 혁신은 이런 개별 권리들이 아니라 '글로벌 적용 원칙'에 있었습니다. GDPR은 유럽 시민의 데이터를 다루는 모든 기업은 전 세계 어디에 있든 GDPR을 준수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는 마치 한 나라의 환경 기준이 전 세계 공장들의 생산 방식을 바꾸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유럽 시장이 그만큼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4억 5천만 명의 유럽 시민들은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거대한 시장이었습니다. 유럽 시장에서 사업하려면 GDPR을 따라야 했고, 유럽 사용자와 다른 지역 사용자를 위해 완전히 다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비용과 복잡성 면에서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글로벌 기업들은 모든 사용자에게 GDPR 수준의 개인정보보호를 제공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애플이 iOS 14.5에서 도입한 '앱 추적 투명성' 기능, 구글이 크롬에서 서드파티 쿠키를 단계적으로 폐지하는 계획 등은 모두 GDPR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유럽의 법이 전 세계의 표준이 된 것입니다.


GDPR의 승리 해부학 - 어떻게 불가능이 가능해졌는가

GDPR의 성공은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2018년 시행 직전까지도 많은 전문가들은 GDPR이 "유럽만의 법"으로 남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글로벌 기업들의 강력한 반발, 복잡한 기술적 구현 과제, 그리고 국제적 협력의 부재 등을 고려할 때 회의적인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GDPR은 전 세계 디지털 경제의 새로운 표준이 되었습니다. 이런 '불가능한' 성공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핵심 요인들을 하나씩 분석해보겠습니다. 마치 성공한 스포츠 팀의 전략을 해부하듯이, 각 요소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이해해야 향후 AI 규제와의 비교가 의미 있어집니다.

첫 번째 성공 요인은 '시장의 압도적 힘'이었습니다. 유럽연합은 단일 시장으로서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권 중 하나입니다. GDP 기준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인구로는 중국, 인도에 이어 3위의 거대한 시장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 소비자들의 높은 구매력입니다. 4억 5천만 명의 유럽 시민들은 어떤 글로벌 기업도 포기할 수 없는 '골든 마켓'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세계에서 가장 큰 쇼핑몰에서 장사하려면 그 쇼핑몰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 같은 거대 기업들도 유럽 시장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이들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이 광고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구매력 높은 유럽 시장은 더욱 중요했습니다.

두 번째 성공 요인은 '기술적 현실의 압박'이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유럽 사용자와 다른 지역 사용자를 위해 완전히 다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극도로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글로벌 서비스를 운영하는 기업이 지역마다 다른 개인정보보호 정책을 적용한다면 얼마나 복잡해질까요? 사용자 데이터를 지역별로 분리 저장해야 하고, 서로 다른 보안 시스템을 운영해야 하며, 직원들도 지역마다 다른 규칙을 숙지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자동차 회사가 나라마다 완전히 다른 안전 기준에 맞춰 차를 생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모든 사용자에게 가장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 어떨까요? 하나의 시스템으로 모든 시장에서 사업할 수 있고, 운영 비용도 절약되며, 브랜드 이미지도 일관성 있게 관리할 수 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글로벌 기업들이 이 선택을 했습니다. GDPR 수준의 개인정보보호를 모든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합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성공 요인은 '도덕적 권위의 확보'였습니다. 개인정보보호는 누구도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어려운 보편적 가치였습니다. 기업들이 "개인정보보호는 필요 없다"거나 "사용자 프라이버시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는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현재 규제가 너무 엄격하다"거나 "구현이 어렵다" 정도의 이의만 제기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특히 유럽은 개인정보보호 분야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95년 이미 EU 데이터보호지침을 제정했고,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기본권으로 인정하는 문화적 토양이 있었습니다. 이는 유럽이 이 분야에서 도덕적 리더십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네 번째 성공 요인은 '완벽한 타이밍'이었습니다. GDPR이 시행된 2018년은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습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러시아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고, 2018년에는 페이스북의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8천7백만 명의 페이스북 사용자 정보가 정치적 목적으로 무단 활용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 세계적으로 개인정보보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GDPR은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시민을 보호하는 방패'로 인식되었습니다. 기업들이 GDPR에 반대하면 할수록 오히려 "기업들이 왜 개인정보보호를 싫어할까?"라는 의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GDPR에 유리하게 조성된 것입니다.

다섯 번째 성공 요인은 '강력한 제재의 위력'이었습니다. GDPR은 위반 시 전 세계 연간 매출의 최대 4% 또는 2천만 유로 중 높은 금액의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구글 같은 대기업에게는 수십억 달러의 과징금이 될 수 있는 금액입니다. 이는 기업들이 GDPR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였습니다.

이 모든 요인들이 결합되어 GDPR은 '브뤼셀 효과'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브뤼셀 효과란 유럽연합이 자신들의 규제 기준을 사실상의 글로벌 표준으로 만드는 현상을 말합니다. 유럽 시장의 크기와 매력도, 기업들의 경제적 계산, 도덕적 정당성,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이 모두 맞아떨어진 결과였습니다.


현재 진행형 - AI 규제 전쟁의 서막

이제 독자들이 GDPR의 성공 공식을 이해했으니, 현재 벌어지고 있는 AI 규제 상황을 같은 관점에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정말 데자뷰 같습니다. 유럽이 다시 한번 엄격한 규제를 만들었고, 글로벌 기업들이 "과도한 규제", "혁신 저해"라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메타가 주도적으로 반대하고 있다는 점까지 GDPR 때와 똑같습니다.

EU AI Act는 2024년 6월에 발효된 세계 최초의 포괄적 인공지능 규제법입니다. 이 법은 AI 시스템을 위험도에 따라 분류하고, 각각에 맞는 의무사항을 부과합니다. 마치 의료기기나 항공기 부품처럼 AI도 위험도에 따라 차등 규제하겠다는 접근법입니다. 금지되는 AI(허용 불가), 고위험 AI(엄격한 규제), 제한적 위험 AI(투명성 의무), 최소 위험 AI(자율 규제)로 구분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EU AI 실천강령(Code of Practice)입니다. 이는 AI Act의 구체적인 이행 방법을 제시하는 자발적 가이드라인입니다. 기업들이 이 강령에 서명하면 AI Act 준수 방법이 명확해지고, 규제 당국의 감시 부담도 줄어듭니다. 반대로 서명하지 않으면 다른 방식으로 AI Act 준수를 증명해야 하므로 더 큰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됩니다.

메타의 조엘 캐플란은 링크드인 포스트에서 "이 강령이 AI Act의 범위를 넘어서는 과도한 조치를 도입하고 있다"며 "모델 개발자에게 법적 불확실성을 초래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GDPR 시절 기업들의 반응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당시에도 "혁신 저해", "과도한 규제", "법적 불확실성" 같은 용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요한 차이점들이 보입니다. 먼저, 이번에는 유럽 기업들도 저항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업체 ASML과 프랑스의 항공기 제조업체 에어버스 등이 AI 규제 시행 2년 연기를 요청하는 서한에 서명했습니다. 이는 GDPR 때와는 다른 양상입니다. 당시에는 주로 미국 기업들만 반발했는데, 이번에는 자국 기업들까지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규제의 부담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ASML은 전 세계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장비를 만드는 회사이고, 에어버스는 유럽의 대표적 제조업체입니다. 이들이 AI 규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는 것은 AI가 이미 전 산업에 걸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차이점은 업계 반응이 더 분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메타가 반대하는 반면, OpenAI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OpenAI는 "유럽의 AI 실천강령 참여를 통해 AI 기술의 안전하고 유익한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규제 준수를 경쟁 우위로 활용하려는 전략으로 보입니다.

이런 분화된 대응은 AI 산업의 복잡성을 반영합니다. GDPR 시절의 인터넷 기업들은 대부분 비슷한 비즈니스 모델과 기술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AI 기업들은 훨씬 다양합니다. 대규모 언어모델을 개발하는 회사, AI 칩을 만드는 회사, AI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들이 각각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오픈소스 AI 모델들의 등장입니다. 메타의 Llama, 허깅페이스의 다양한 모델들처럼, 누구나 다운로드해서 사용할 수 있는 AI 모델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GDPR 시절에는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변수입니다. 중앙화된 플랫폼은 규제할 수 있지만, 오픈소스로 배포된 AI 모델들은 어떻게 규제할 수 있을까요?

EU AI 실천강령의 구체적 요구사항들을 살펴보면 왜 기업들이 반발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투명성 요구사항은 AI 모델의 훈련 데이터, 설계 명세, 테스트 방법 등을 상세히 문서화하고 공개하도록 합니다. 저작권 준수 정책은 훈련 데이터에 저작권 보호 콘텐츠가 포함되지 않도록 보장하고, 모델이 저작권 침해 콘텐츠를 생성하지 않도록 기술적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합니다. 위험 관리 체계는 AI 모델이 사이버 범죄, 대규모 조작, 차별 등에 악용될 위험을 지속적으로 평가하고 대응하도록 합니다.

이런 요구사항들은 분명히 상당한 비용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저작권 관련 요구사항은 현재 많은 AI 모델들의 훈련 방식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수집한 대량의 텍스트와 이미지로 훈련된 모델들이 대부분인데, 이들 데이터의 저작권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요구사항들의 필요성도 인정해야 합니다. AI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질수록 투명성과 책임성의 중요성도 함께 커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균형을 맞출 것인가입니다.


게임의 룰이 바뀌었다 - AI가 만드는 근본적 차이점들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AI 규제는 GDPR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게임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체스와 3차원 체스의 차이를 생각해보세요. 기본 룰은 비슷해 보이지만, 게임의 복잡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AI 규제가 직면한 근본적 차이점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근본적 차이는 국가 안보 차원의 중요성입니다. 개인정보는 분명히 중요했지만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정보보호 규제가 강화된다고 해서 한 나라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치명적으로 약화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AI는 완전히 다릅니다.

AI는 현대의 핵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자율무기 시스템, 사이버전, 정보전의 핵심 도구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생산성 혁신의 엔진이자 새로운 산업의 기반입니다. 사회적으로는 교육, 의료, 미디어 등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심지어 문화적 영향력까지 결정합니다. ChatGPT나 Claude 같은 AI 모델들이 전 세계 사람들의 정보 습득과 사고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AI 규제는 단순한 산업 정책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핵심이 됩니다. 각국 정부가 AI 규제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입니다. 미국이 중국의 AI 기술 발전을 견제하기 위해 반도체 수출 통제를 강화하고, 중국이 AI 굴기를 국가 전략으로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두 번째 근본적 차이는 기술 발전 속도입니다. 웹 기술은 상대적으로 예측 가능한 발전 궤도를 보였습니다. HTML, CSS, JavaScript 등의 기본 기술들이 점진적으로 발전했고, 브라우저 기술도 몇 년에 걸쳐 서서히 개선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규제가 기술을 따라잡기가 그나마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AI는 완전히 다릅니다. ChatGPT가 출시된 지 불과 2년 만에 전 세계가 AI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GPT-3에서 GPT-4로의 도약, 이미지 생성 AI의 급속한 발전, 멀티모달 AI의 등장 등 몇 달 만에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브레이크스루가 연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속도에서는 전통적인 규제 방식이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규제를 만들기 위해 몇 년이 걸리는 동안 기술은 이미 몇 세대 앞서 나가버립니다. 마치 시속 200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를 시속 20킬로미터의 자전거로 쫓아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세 번째 근본적 차이는 경쟁 구도의 변화입니다. GDPR 시절에는 주로 미국 기업들과 유럽의 갈등이었습니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미국 기업들이 유럽 시장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은 규제를 통해 이들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비교적 단순한 이원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미국과 중국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고, 유럽은 상대적으로 뒤처진 상황입니다. OpenAI,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기업들이 AI 기술을 주도하고 있고, 중국도 바이두, 알리바바, 바이트댄스 등을 통해 빠르게 추격하고 있습니다. 반면 유럽에는 글로벌 AI 리더로 인정받는 기업이 거의 없습니다.

이는 유럽의 도덕적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는 요소입니다. GDPR 시절에는 "개인정보보호의 선진국 유럽이 후진적인 미국 기업들을 교육시킨다"는 프레이밍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AI 분야에서는 "기술적으로 뒤처진 유럽이 선진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다"는 반박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근본적 차이는 오픈소스의 등장입니다. GDPR 시절의 웹 서비스는 대부분 기업이 통제하는 중앙화된 플랫폼이었습니다.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 등의 서비스는 모두 해당 기업의 서버에서 운영되고, 기업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따라서 기업을 규제하면 서비스도 함께 규제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AI는 오픈소스 모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메타의 Llama, 허깅페이스의 다양한 모델들, 스타빌리티 AI의 Stable Diffusion 등이 오픈소스로 공개되어 누구나 다운로드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델들은 한번 공개되면 규제 당국이 통제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마치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한번 인터넷에 퍼진 오픈소스 AI 모델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규제를 피해 다른 나라 서버에서 호스팅할 수도 있고, 개인이 자신의 컴퓨터에 설치해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규제 방식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냅니다.


다섯 번째 근본적 차이는 창작과 지적재산권의 재정의입니다. GDPR은 기존의 개인정보 개념을 디지털 시대에 맞게 확장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정보보호라는 기본 원칙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단지 적용 범위와 방법을 현대화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AI는 창작과 지적재산권에 대한 근본적 재정의를 요구합니다. AI가 인간의 창작물을 학습해서 새로운 콘텐츠를 생성할 때, 이것이 원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습니다. 기존의 저작권법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완전히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AI가 수백만 개의 이미지를 학습해서 새로운 그림을 그렸을 때, 그 그림이 특정 작가의 스타일과 유사하다면 이것이 저작권 침해일까요? 아니면 인간 화가가 다른 화가의 스타일을 배우는 것과 같은 합법적 학습일까요? 이런 질문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규제를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섯 번째 근본적 차이는 규제의 대상과 범위입니다. GDPR은 개인정보 처리라는 비교적 명확한 활동을 규제 대상으로 했습니다. 누가 어떤 개인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AI 규제는 훨씬 모호한 개념들을 다뤄야 합니다. "AI 모델의 위험성"이나 "편향성", "공정성" 같은 개념들은 명확한 기준을 정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AI 모델이라도 사용 방법에 따라 위험할 수도 있고 안전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불확실성은 규제의 예측가능성을 떨어뜨리고, 기업들의 저항을 키우는 요인이 됩니다.

이 모든 차이점들이 결합되어 AI 규제는 GDPR와는 질적으로 다른 게임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규제 강도의 차이가 아니라, 게임 자체의 성격이 바뀐 것입니다. 따라서 GDPR의 성공 공식을 AI 규제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저항의 해부학 - 왜 이번엔 다를 수 있는가

메타의 저항을 GDPR 시절과 비교해보면 전략의 진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6년 전 페이스북(현 메타)은 GDPR에 대해 비공개적으로 로비하고 법적 대응을 준비하는 등 비교적 수동적인 저항을 했습니다. 당시 마크 저커버그 CEO조차 "GDPR의 정신에는 동의한다"고 공개 발언하며 정면 대결을 피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다릅니다. 조엘 캐플란의 링크드인 포스트는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반대 의사 표명입니다. 이는 단순한 불만 표출이 아니라 치밀한 전략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여론 형성, 동맹 구축, 그리고 규제 당국에 대한 압박을 모두 포함하는 종합적 대응입니다.


이런 전략 변화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습니다. 첫째, 메타는 GDPR 경험을 통해 초기 저항의 중요성을 학습했을 수 있습니다. GDPR 시절에는 법안이 거의 확정된 후에야 본격적인 반대에 나섰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번에는 더 이른 시점에서 더 강력한 저항을 통해 규제의 방향을 바꿔보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AI의 전략적 중요성이 개인정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GDPR은 메타의 비즈니스 모델에 일정한 제약을 가했지만, 존재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AI 규제는 메타의 미래 성장 동력을 근본적으로 제약할 수 있습니다. 메타는 메타버스와 AI를 차세대 성장 엔진으로 보고 있는데, EU AI 규제가 이를 심각하게 제약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 글로벌 환경이 변했습니다. GDPR 시절에는 유럽의 도덕적 권위가 상당했고, 개인정보보호에 반대하는 것이 여론상 불리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AI 혁신"이라는 강력한 반박 논리가 있습니다. "유럽의 과도한 규제가 AI 혁신을 저해해서 결국 인류의 발전을 막는다"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메타의 저항이 이전과 다른 또 다른 점은 유럽 기업들과의 연대입니다. ASML, 에어버스 등 유럽의 대표적 기업들이 AI 규제 시행 연기를 요청한 서한에 참여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변화입니다. 이는 "외국 기업 vs 유럽 규제"라는 구도를 "글로벌 산업계 vs 유럽 규제"로 바꿀 수 있는 게임 체인저입니다.

ASML의 참여는 특히 상징적입니다. ASML은 네덜란드 기업으로 전 세계 최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EUV(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를 독점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업이 자국 정부의 AI 정책에 우려를 표명한다는 것은 규제의 부담이 상당하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에어버스의 참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어버스는 유럽의 대표적 제조업체이자 미국 보잉의 라이벌로, 유럽 산업 정책의 성공 사례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기업이 AI 규제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는 것은 AI가 이미 전통 제조업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픈소스 AI의 등장은 저항의 성격 자체를 바꾸고 있습니다. GDPR 시절에는 모든 서비스가 중앙화된 플랫폼이었기 때문에 기업을 압박하면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메타가 Llama 모델을 오픈소스로 공개해버린 상황입니다. 한번 공개된 오픈소스 모델은 유럽 당국이 통제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메타에게 강력한 협상 카드가 됩니다. "우리의 최신 AI 모델을 유럽에서 서비스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 있고, 동시에 "하지만 오픈소스 모델은 이미 공개되었으니 개인들이 알아서 사용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규제 당국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기업은 처벌할 수 있지만 기술 자체는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업계 반응이 분화된 것도 흥미로운 변화입니다. OpenAI가 EU AI 실천강령에 참여한다고 발표한 것은 규제 준수를 경쟁 우위로 활용하려는 전략으로 보입니다. 이는 "우리는 책임감 있는 AI 기업이고, 메타는 그렇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화된 대응은 유럽 당국에게는 기회이자 위기입니다. 일부 기업들이 협력적으로 나온다는 것은 규제가 완전히 불합리하지는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업계가 분열되면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이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기업들의 공개적 의사 표명이 더 전략적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메타의 조엘 캐플란은 링크드인 포스트에서 "유럽 기업들의 우려를 공유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저항을 유럽 산업계 전체의 우려로 포장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공개적 저항은 위험 요소도 있습니다. 너무 강하게 반발하면 "무책임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고, 이는 브랜드 이미지와 주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또한 규제 당국의 강경 대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결국 메타의 저항이 성공할지는 여러 변수에 달려 있습니다. 유럽 기업들과의 연대가 얼마나 공고해질지, 여론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 그리고 규제 당국이 어떻게 대응할지가 관건입니다. GDPR 때와는 분명히 다른 게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정학적 체스게임 - 글로벌 AI 패권 경쟁 속의 유럽

GDPR 성공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정학적 환경이었습니다. 2018년 당시에는 미국과 중국 간 본격적인 기술 패권 경쟁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AI도 지금처럼 국가 전략의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유럽이 개인정보보호라는 도덕적 고지에서 글로벌 룰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AI를 둘러싼 미중 경쟁이 치열해졌고, 유럽은 기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뒤처진 상황입니다. 이런 변화된 환경에서 유럽의 규제 외교가 어떤 도전에 직면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미국의 상황을 보겠습니다. 미국은 OpenAI,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 세계 최고 수준의 AI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들 기업들의 AI 기술은 현재 글로벌 표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ChatGPT, Gemini, Copilot, Llama 등의 모델들이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고, 이를 통해 미국은 AI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는 AI 굴기를 국가 전략으로 설정하고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2030년까지 AI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미중 간 AI 기술 경쟁이 제로섬 게임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중국의 AI 발전을 견제하기 위해 첨단 반도체와 AI 칩의 대중 수출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엔비디아의 최신 GPU, ASML의 EUV 장비 등 AI 개발에 핵심적인 장비들의 중국 수출이 금지되었습니다. 중국도 이에 맞서 자체 AI 생태계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은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유럽은 AI 기술 개발에서 미국과 중국에 크게 뒤처져 있습니다. 구글의 딥마인드가 런던에 있고, 프랑스의 미스트랄 AI가 주목받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유럽의 존재감은 미미합니다.

이는 유럽의 규제 외교에 중대한 제약이 됩니다. GDPR 시절에는 "선진적인 유럽이 후진적인 미국 기업들을 교육시킨다"는 프레이밍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AI 분야에서는 "기술적으로 뒤처진 유럽이 선진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다"는 반박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메타의 조엘 캐플란은 "이런 과도한 규제가 유럽 내 프론티어 AI 모델 개발과 배포를 저해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유럽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는 논리입니다. 유럽이 엄격한 규제로 AI 발전을 제약하면 결국 미국과 중국에 더욱 뒤처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AI 규제가 글로벌 표준이 되기는 훨씬 어려워졌습니다. 미국 기업들은 "우리가 중국과 경쟁하는 마당에 유럽의 규제까지 따를 수는 없다"고 주장할 수 있고, 중국 기업들은 애초에 유럽 규제에 별로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더욱 복잡한 것은 AI 기술의 특성상 '네트워크 효과'가 강하다는 점입니다. 더 많은 사용자 데이터를 가진 AI 모델이 더 좋아지고, 더 좋은 모델이 더 많은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선순환 구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규제로 인해 유럽 시장에서 일부 AI 서비스가 제한되면, 해당 서비스들은 다른 지역에서 더 빠르게 발전할 수 있고, 결국 유럽 사용자들이 더 뒤떨어진 서비스를 사용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오픈소스 AI의 확산은 지정학적 역학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메타의 Llama, 허깅페이스의 다양한 모델들이 오픈소스로 공개되면서, 국가나 지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AI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규제 방식으로는 통제하기 어려운 새로운 도전입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특정 AI 모델의 상업적 사용을 금지한다고 해도, 해당 모델이 오픈소스로 공개되어 있다면 개인이나 소규모 기업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규제의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AI 기술의 군사적 활용 가능성은 지정학적 긴장을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자율무기 시스템, 사이버전 도구, 정보전 플랫폼 등으로 활용될 수 있는 AI 기술에 대해서는 각국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유럽의 AI 규제가 이런 민감한 영역까지 다루려 할 때, 다른 국가들의 저항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복잡한 지정학적 환경에서 유럽이 AI 규제의 글로벌 표준을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자신들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요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공통 기준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G7, G20 등 다자간 협력체에서 AI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히로시마 AI 프로세스, 글로벌 파트너십 온 AI(GPAI) 등의 이니셔티브를 통해 국제적 공조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협력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불확실합니다.

결국 유럽의 AI 규제가 성공하려면 기술적 역량 강화와 함께 가야 합니다. 규제만으로는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유럽 자체의 AI 기술 발전을 통해 규제의 정당성과 실효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브뤼셀 효과 2.0의 가능성과 한계

그렇다면 유럽이 다시 한번 승리할 수 있을까요? GDPR의 성공 공식을 AI 규제에 적용해보며 가능성과 한계를 균형 있게 분석해보겠습니다.

먼저 유럽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강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시장 규모의 힘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4억 5천만 명의 유럽 시민들과 20조 달러가 넘는 GDP 규모는 여전히 글로벌 기업들이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시장입니다. 특히 구매력이 높은 유럽 소비자들은 AI 서비스와 제품의 중요한 고객층입니다.

AI 서비스의 특성상 네트워크 효과가 중요하지만, 동시에 지역별 특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언어, 문화, 법제도의 차이 때문에 글로벌 AI 서비스도 지역화가 필요합니다. 유럽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유럽의 규제를 따르는 것이 여전히 경제적으로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둘째, 규제 전문성과 제도적 역량은 유럽의 확실한 강점입니다. GDPR을 통해 축적된 경험, 체계적인 법제도, 그리고 규제 당국의 전문성은 다른 지역이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유럽만의 자산입니다. EU AI Office 같은 전문 기관의 설립도 이런 역량을 보여줍니다.

특히 복잡한 AI 기술을 규제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이해와 법적 전문성이 모두 필요한데, 유럽은 이 두 분야에서 상당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많은 다른 국가들이 AI 규제를 만들 때 유럽의 경험과 전문성을 참조하고 있는 것도 이런 강점을 반영합니다.

셋째, AI 위험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높아지고 있어 유럽의 신중한 접근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딥페이크, 편향성, 일자리 대체, 자율무기 등 AI의 부정적 영향에 대한 우려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전하고 책임감 있는 AI 개발"을 강조하는 유럽의 접근법은 도덕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AI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AI 행정명령, 캘리포니아주의 SB 1001법안 등은 모두 AI 위험 관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럽의 접근법과 어느 정도 방향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넷째, 기업들 사이의 분화된 대응은 오히려 유럽에게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OpenAI가 EU AI 실천강령에 참여한다고 발표한 것은 일부 기업들이 규제 준수를 경쟁 우위로 활용하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기업들과의 협력을 통해 모범 사례를 만들고, 다른 기업들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상당한 한계와 장애 요인들도 존재합니다. 첫째, AI 기술 개발에서의 열세는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규제의 정당성은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오는데, 유럽이 AI 기술 개발에서 뒤처져 있다는 것은 규제의 현실성과 효과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요소입니다.

"AI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AI를 규제하려 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기술 전문가들이 현재의 AI 규제 논의에서 기술적 현실과 규제 내용 사이의 괴리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둘째, 기술 발전 속도와 규제 속도의 불일치는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AI 기술이 몇 달 만에 혁신적으로 발전하는데, 규제는 몇 년에 걸쳐 만들어집니다. 규제가 완성될 때쯤이면 이미 기술은 몇 세대 앞서 나가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규제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되거나, 아니면 너무 포괄적이고 모호한 것이 되는 딜레마를 만듭니다. 구체적으로 만들면 금세 구식이 되고, 포괄적으로 만들면 기업들이 어떻게 준수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셋째, 오픈소스 AI의 확산은 전통적인 규제 방식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중앙화된 플랫폼은 규제할 수 있지만, 오픈소스로 배포된 AI 모델들은 통제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는 규제의 실효성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요소입니다.

메타가 Llama 모델을 오픈소스로 공개한 것은 이런 한계를 노린 전략적 선택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럽에서 상업 서비스를 안 하겠지만, 오픈소스 모델은 이미 공개되었으니 개인들이 알아서 사용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글로벌 경쟁 환경의 변화는 유럽의 규제 외교를 어렵게 만듭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두 강대국 모두 유럽의 규제를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우위를 유지하는 데 집중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중국은 유럽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자체 내수 시장이 충분히 크기 때문에 유럽 규제의 압박을 덜 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 기업들도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유럽의 규제를 따르는 것보다 혁신 속도를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산업계 내부의 분열은 양날의 검입니다. 일부 기업들이 협력하는 것은 좋지만, 동시에 메타 같은 주요 기업이 강하게 저항하면 규제의 일관성과 효과성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오픈소스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메타의 비협조는 상당한 타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능성과 한계를 종합해보면, 유럽의 AI 규제가 GDPR 수준의 성공을 거두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완전한 실패도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분적 성공, 즉 일부 영역이나 일부 기업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만 전면적인 글로벌 표준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성공 여부는 유럽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유연한 접근법을 취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 같습니다. 기술적 현실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규제를 강요하려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기술 발전과 안전성 확보 사이의 균형을 찾고, 주요 이해관계자들과 협력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래 시나리오 - 세 가지 가능한 결말

GDPR의 경험과 현재 AI 규제를 둘러싼 복잡한 상황을 종합해보면, 앞으로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각 시나리오는 서로 다른 가정과 변수들에 기반하고 있으며, 실제로는 이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시나리오 1 : 제2의 GDPR 승리 - "역사는 반복된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초기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유럽의 AI 규제가 글로벌 표준이 됩니다. GDPR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기업들이 강하게 반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결과가 나오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먼저 AI 사고나 오남용 사례가 증가해서 안전성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더욱 높아져야 합니다. 딥페이크를 이용한 선거 조작, AI 편향으로 인한 대규모 차별, 자율무기로 인한 인명 피해 등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유럽이 미리 경고했는데 우리가 안 들었다"는 여론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또한 유럽 내에서 혁신적인 AI 기업들이 등장해서 "규제와 혁신의 양립"을 보여줘야 합니다. 프랑스의 미스트랄 AI 같은 기업들이 유럽의 규제 하에서도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AI 모델을 개발한다면, "유럽 규제가 혁신을 저해한다"는 비판을 반박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주요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규제 움직임이 나타나야 합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영국, 캐나다, 일본 등에서 유럽과 유사한 AI 규제를 도입한다면 글로벌 수렴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 시나리오가 실현되면 유럽은 다시 한번 글로벌 기술 거버넌스의 선도자 지위를 확보하게 됩니다. 다른 국가들이 유럽의 AI 규제를 벤치마킹하고, 글로벌 AI 기업들이 유럽 기준에 맞춰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게 될 것입니다.


시나리오 2 : 규제 블록화 - "세계는 분열된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유럽, 미국, 중국이 각각 다른 AI 규제 체계를 유지하며 글로벌 AI 생태계가 분절됩니다. 마치 냉전 시대의 경제 블록처럼, AI 분야에서도 지역별로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상황입니다.

유럽은 안전성과 투명성을 강조하는 엄격한 규제 체계를 유지합니다. 미국은 혁신과 경쟁력을 우선시하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접근법을 취합니다. 중국은 국가 통제와 사회 안정을 중시하는 독특한 모델을 발전시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글로벌 AI 기업들이 지역별로 다른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유럽에서는 투명성과 설명가능성이 보장된 AI 모델을, 미국에서는 성능에 최적화된 모델을, 중국에서는 정부 정책에 부합하는 모델을 각각 제공하게 됩니다.

이는 기업들에게는 큰 부담이지만, 동시에 지역별 특성에 맞는 AI 발전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AI가, 미국에서는 강력한 AI가, 중국에서는 사회에 안정적으로 통합된 AI가 각각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절화는 AI 기술의 전체적인 발전 속도를 늦출 수도 있습니다. 지식과 경험의 공유가 제한되고, 글로벌 협력이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개발도상국들은 어떤 모델을 따를지 선택해야 하는 어려운 결정에 직면하게 됩니다.


시나리오 3 : 유럽의 고립 - "혼자서는 바꿀 수 없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유럽의 AI 규제가 다른 주요 지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유럽만 고립되는 상황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자신들의 AI 발전 경로를 고수하는 가운데, 유럽만 엄격한 규제를 유지하다가 오히려 AI 경쟁에서 더욱 뒤처지게 됩니다.

이런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AI 기술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규제가 따라잡지 못하거나, 미중 간 기술 패권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안전성보다 경쟁력이 우선시되거나, 오픈소스 AI의 확산으로 규제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메타 같은 주요 기업들이 계속 저항하고, 동시에 오픈소스 모델들을 통해 유럽 규제를 우회하는 방법을 제공한다면, 유럽의 규제는 실효성을 잃을 수 있습니다. 유럽 기업들조차 해외에서 AI 모델을 개발하고 서비스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나리오에서 유럽은 "AI의 갈라파고스"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강력하고 혁신적인 AI 서비스들이 등장하는데, 유럽에서만 제한적이고 뒤떨어진 AI 서비스들이 제공되는 상황입니다. 결국 유럽 시민들과 기업들이 피해를 보게 되고, 규제 정책에 대한 불만이 높아질 것입니다.


복합 시나리오 : 영역별 차별화

실제로는 이 세 시나리오가 영역별로 다르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를 들어, 의료 AI나 금융 AI처럼 안전성이 중요한 영역에서는 유럽의 엄격한 규제가 글로벌 표준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엔터테인먼트나 창작 도구 같은 영역에서는 미국식의 자유로운 접근법이 우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업 규모에 따라서도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습니다. 글로벌 대기업들은 지역별로 다른 전략을 취하겠지만, 중소기업들이나 스타트업들은 유럽 규제를 준수하는 것이 글로벌 시장 진출에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시나리오 선택의 변수들

어떤 시나리오가 실현될지는 몇 가지 핵심 변수에 달려 있습니다. 첫째, AI 사고나 오남용 사례의 발생 빈도와 심각성입니다. 큰 사고가 일어날수록 안전성을 강조하는 유럽의 접근법이 설득력을 얻을 것입니다.

둘째, 유럽 내 AI 기술 발전 수준입니다. 유럽이 독자적인 AI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규제의 정당성과 실효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셋째, 미중 간 기술 패권 경쟁의 강도입니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두 국가 모두 유럽 규제보다는 자국의 경쟁력 확보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넷째, 오픈소스 AI의 발전 정도입니다. 오픈소스 모델들이 상용 모델들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면 전통적인 규제 방식의 한계가 더욱 명확해질 것입니다.

결국 미래는 이 모든 변수들의 복합적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GDPR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새로 쓰여지는가

메타의 EU AI 실천강령 거부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단순한 기업과 규제 당국 간의 갈등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인류가 가장 강력한 기술 중 하나인 인공지능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합니다.

GDPR의 성공을 통해 우리는 유럽이 어떻게 글로벌 기술 거버넌스의 룰메이커가 될 수 있는지 보았습니다. 시장의 힘, 기술적 현실, 도덕적 권위, 완벽한 타이밍, 그리고 강력한 제재가 결합되어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전 세계가 유럽의 개인정보보호 기준을 따르게 되었고, 디지털 경제의 게임 룰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AI는 개인정보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기술입니다. 국가 안보와 직결되고, 기하급수적 속도로 발전하며, 복잡한 지정학적 경쟁 구도 속에 있고, 오픈소스라는 새로운 변수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GDPR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유럽의 AI 규제는 실패할 운명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비록 GDPR 수준의 완전한 성공은 어려울지라도,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성과는 가능할 것입니다. 의료 AI, 금융 AI처럼 안전성이 중요한 영역에서는 유럽의 접근법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고, 일부 기업들은 규제 준수를 경쟁 우위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논의와 실험 자체입니다. 인공지능이라는 강력한 기술을 어떻게 인간의 가치와 조화시킬 것인가는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유럽의 시도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접근법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메타의 저항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업의 이기심이 아니라 혁신과 규제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기업들의 우려에도 일리가 있고, 규제 당국의 우려에도 근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서로 다른 관점들이 건설적인 대화를 통해 더 나은 해결책으로 수렴해가는 것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비슷한 논쟁이 반복되었습니다. 산업혁명 시대의 공장법, 자동차 시대의 교통법규, 인터넷 시대의 개인정보보호법 등은 모두 기술 발전과 사회적 가치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탄생했습니다. AI 규제도 그런 역사적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다만 AI는 이전의 기술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포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더욱 신중하고 지혜로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기술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위험은 최소화하고, 혁신을 장려하면서도 공정성과 안전성을 보장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메타의 AI 규제 거부는 하나의 시작점일 뿐입니다. 앞으로 몇 년간 벌어질 복잡한 협상과 조정 과정을 통해 인류는 AI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룰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유럽의 신중한 접근법과 미국의 혁신 중심 접근법, 그리고 다른 지역들의 다양한 시각들이 모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입니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미래가 아니라 인간을 보완하고 증강하는 미래, 소수의 기업이 독점하는 AI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AI, 국가 간 패권 경쟁의 도구가 아니라 인류 공동의 자산이 되는 AI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역사가 반복될지 새로 쓰여질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GDPR의 교훈을 배우되 AI 시대의 새로운 현실에 맞는 창조적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이자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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