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길 1구간 55년은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남 4녀의 장녀, 아내, 두 아이의 엄마, 초등학교 교사라는 역할이 부여되고, 의무와 책임에 애쓰며 열심히 더 열심히 살았다.
우리 집은 가난해서 초등학교 때까지 교과서 외에는 책이 없었다. 나의 주변에는 하루 살기 바쁜 사람들뿐이어서 책을 읽는 사람도 없었다. 초등학교를 마치면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일터로 가는 친구들이 많았던 70년대였으니까.
5학년 때인가 고물이 가득 쌓인 리어카 구석에서 발견한 책이 <김찬삼의 세계여행> 시리즈 (1962년 발간) 중에서 2권이었다.
김찬삼 세계 일주여행
그 책 속에는 구름 위에 솟은 드넓은 고대 도시 마추픽추와 기이한 모양의 피라미드, 사막 절벽 아래 붉은 암벽 도시 페트라가 너무나 신기하여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얼마 후 아버지께 이런 곳은 도대체 세상 어디에 있냐고 여쭈어보았다. 아버지께서는
“지구 정반대 편이어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 곳이야. 비행기도 여러 번 갈아타야 해서 며칠이 걸리고 돈이 많이 드는 곳이지. 그러니 그럴 시간 있으면 집안일이나 도와라. 꿈도 꾸지 마라.”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린 여자아이에게는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불가능한 희망인 것 같아서 늘 꿈에서라도 만나기를 참 많이 바라고 바랐다.
그래서인지 나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뭐든 잘 해내려고 억척스럽게 살았다. 가끔 내가 잘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마추픽추(페루)와 피라미드(이집트), 페트라(요르단)를 떠올렸다. 아니 슬프고 힘들 때, 성취감이 충만할 때이면 마음 안으로 불러와 언젠가는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그리워했던 곳이었다.
나이 50이 넘어 두 아이가 대학에 가면 바쁜 인생 능선도 끝나고 나비처럼 날아다닐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생각과는 아주 달랐다. 기다렸다는 듯 허리와 목 디스크로 몸이 아프고 갱년기로 만사가 힘들고 우울했다. 병원과 한의원을 맴돌아도 나아지지 않았다. 거울 앞에 서니 화가 난 내가 서 있었다.
지나온 세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몸이 아픈 자신에게 화가 나고, 서운하고, 참아온 시간이 억울하기도 했다. 세월을 돌이킬 수 없다는 마음과 남은 미래를 생각해 보니 구체적인 것이 하나도 없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주변에서는 아프면 쉬어야 한다는 사람들과 여자가 대학 졸업하자마자 한 번도 쉬지 않고 33년 넘게 직장 생활한 것이 대단하다며 명예퇴직을 권하였다.
빈 껍데기 같았던 그때, 어릴 적 나의 영웅 김찬삼의 낡은 책이 떠올랐다. 12살에 꾸었던 신기루 같았던 세 가지 여행지(피라미드, 마추픽추, 페트라)가 생각나며 점점 생각이 분명해졌다. 흑백의 일상들에 아름다운 색깔의 지구의 풍경이 펼쳐졌다.
이제 더 늦기 전에 건강에 끌려다니지 말고, 남의 탓을 하지 말고 어릴 적 꿈을 이루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정리하고 구체적인 목표와 실천 계획을 세웠다.
그 이후 인생길 2구간 지금까지 나에게 집중하며 길을 걸어왔다.홀로서기는 쉽지 않았다. 먼저 삶의 방식이 바꿔야 했다.
널브러져 있는 몸과 마음,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나를 붙잡아 준 것은 혼자 걷기였다. 마음을 다잡고 운동화를 신고밖으로 나와 걷고 걸었다. 퇴근 후 야간과 주말, 여름과 겨울 방학의 걷기 목표를 세웠다.
"야, 인생 별거 없어. 좋은 거 먹고, 입고, 즐기고---, 남들처럼 사는 거야!"
"너 정도면 부러울 것 없이 잘 사는 거지. 아래를 보면 살아야지. 감사할 줄 알아야지!"
'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정말!'
지인들의 염려와 만류에 머뭇거렸지만 그래도 혼자 해내고 싶었다. 체력과 의지를 키우기 위해 익숙한 친구들과 동네를 벗어나 인터넷 걷기 동호회에 가입하여 거리를 넓혔다.
퇴근 후 얼른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낯선 사람들과7시 반 전철역에서 모여 야간 한강 걷기를 하고 주말 근교 걷기 도장을 찍어갔다.
“여자가? 아줌마가? 혼자서? "
"왜? 어떻게 하려고? 할 수 있겠어?”
한강 백리(40km) 걷기에 참여하여 3회 완주하고 50km 울트라 걷기와 비박 걷기(12시간)를 완수하여 1년 후에는 그 동호회에서 최우수 회원에 뽑혔다.
걷기 챌린지 기록
서울 둘레길과 북한산 둘레길을 완주하고 제주 올레길 걷기를 도전하였다. 그 길들은 불안대신 도전과 자유라는 선물을 주었다.
걷기 동호회 회원들과의 적극적인 교류로 그들의 여러 도전 활동의 경험과 정보를 알게 되었고 많은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제는 국내 단기가 아닌 해외를 혼자 다녀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가 아닌 해외 장기여행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난생처음 혼자 장기여행 장소로 택한 곳은 미국 동, 서부와 캐나다 23일의 여행이다. 미국이라는 낯선 곳의 이질감과 경이로움은 나의 내면을 풍성하게 해 주었다.
별빛마저 삼킨 뉴욕 맨해튼 거리 당당한 100년의붉은 빌딩들과 메디슨 골목 사이를 걸으며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임을 알았다. 지금 나는 용기를 내어 자신을 위한 선택을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가족을 벗어난 새로운 여행지의 경험과 희열은 인생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하여 즐거운 삶과 은퇴 준비를 할 수 있게 하였다.
미국에 이어서 도전한 남미 5개국(콜롬비아, 칠레,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 28일 배낭여행은 고독을 즐기는 법과 구체적인 도전의 계획, 선택에 대한 책임, 새로운 도전을 실감하게 했다. 나이 50이 넘어도 계속 성장해야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남미 페루, 하늘 아래 제일 높다는 도시 마추픽추에서 지금 그대로의 내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마추픽추는 40여 년 전 나의 꿈이었고 언젠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와이나픽추에서 바라 본 마추픽추
그곳에 드디어 발을 디딘 것이다. 정확히 43년이 지났다. 힘들게 찾아간 그곳에서 새벽안개가 가득하여 뿌연 마추픽추를 보니 그동안 지난 시간이 생각나 눈물이 흘렀다.
흙더미 위 엉성하게 포개져 있는, 아무도 살지 않는 화려했던 잉카제국의 낡은 건물들이제 몸 아낌없이 불태워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눈물에 젖은 채,떨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높은 산봉우리에서 몇 천 년을 버티며 눈부신 황혼의 빛깔이 되기까지, 날마다 태양과 달, 별과 비바람에 달아오르고 갈라지고 보듬어진 세월의 흔적들이 확연했다.
낡고 초라한 것이 아니라연륜이 스며들어 뿜어내는 저 찬란한 마추픽추의 건재함이 앞으로의 나를 보는 듯했다.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에서 숨을 멈춘 듯 한참을 울다 웃다 그렇게 오래 서있으며 소금에 젖었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거울 같았던 데칼코마니의 수평선호수. 붉은 석양이 내리면 모래알처럼 수없이 많은 별이 경쟁하듯 쏟아지는 놀라는 광경들.
어둠이 와야 달도, 별들도, 외로움도, 사랑도 보인다. 나도 누군가의 인생에 쏘아진 빛이 될 수 있다면 하는 간절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아프리카 나미비아 사막 텐트
그다음 여행지였던 아프리카 8개국(에티오피아, 잠비아, 탄자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 모로코,) 25일에서는 전염병인 에볼라의 대유행을 맞아 불안에 떨며 긴장 속에 여행을 마쳐야 했다.
가난하고 허름하지만 따뜻했던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눈빛과 미소에서 부끄러움 느끼고 긍정적인 미래를 볼 수 있게 있었다. 극한의 여행을 체험하면서도 어린아이처럼 마냥 즐거웠다.
러시아 20일(시베리아 횡단 열차), 독일과일본맥주축제 즐기기, 인도 등 세계 50개국 여러 형태의 여행으로 진정한 용기와 자유를 즐기는 법을 알게 하였다.
2019년 12월 왼쪽 발목 깁스를 한채 중미 6개국(멕시코,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벨리즈, 쿠바) 27일 여행을 떠난 적도 있다. 지팡이를 집고도 다시 못 올 것 같아서할 수 있는 체험은 모두 즐겁게 해냈다. 결국 벨리즈 블루홀에서 수영을 하며 반기브스를 풀었다.
20년 1월 말, 멕시코에서무사히귀국하고 나자마자세계적인 코로나 대유행을 맞았다.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게 운이 좋았다.
유래 없이 급변하는 불확실한 팬데믹 세상에서 유연하게 살아내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격리된 생활에서 풍성했던 여행의 추억을 기억하며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20년 2월 5일부터 평생의 친구가 된 매일 글쓰기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하고 있다.
지금까지 글모음
2023년 코로나로 몇 년 동안 막혔던 여행길이 풀리자 중동 3개국(아랍에미리트, 이집트, 요르단) 18일을 여행했다. 딸과 함께 자동차를 운전하며 요르단 사막을 즐겼다.
드디어 어릴 적부터 품었던 세 가지 꿈(마추픽추와 피라미드, 페트라)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욕심과 체면을 내려놓으니,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직장 생활을 하며 글쓰기, 낭독극, 연극, 걷기 챌린지, 독서모임, 노래 등 하고 싶은 새로운 인생길에 도전하며 내가 모르던 나를 계속 만나고 있다.
흔들리던 내가 다시 좋아지고 삶이 즐거워지며 은퇴를 폭넓게 준비할 수 있었다.
인생 2구간은 새로운 도전으로 즐겁고 행복했다.
선택과 용기, 신나는 도전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늙어가는 나를 바로 세웠다. 아직 걷지 않은 인생길에 희망이 되어 주었다.
2024년 8월 31일, 41년 교사로 근무한 소중한 학교를정년퇴직을 하게 된다.
'정말 감사하고 축복받은 일이다!'
이제 2024년 9월 1일,62세인생 3구간이 시작된다.
제일 먼저 9월 2일부터 10월 31일까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것이다. 50일 동안 나 혼자 천천히 800km를 걸으며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을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인생 길었던 언덕길을 걸어 낸 나를 도닥이며 바르셀로나와 파리의 미술관과 박물관 거리를 찾아다닐 것이다.
아직 가보지 않은은퇴 이후 노년의 새로운 길을 즐기며 다양하게도전하는 인생 이야기를 즐겁게 글로 쓰고 싶다.
그러면 나의 블로그와 브런치 글방의 간판도 이렇게 바뀔 것이다.
'지구소풍, 인생 3구간 재미있게 걷고 즐겁게 쓰다'
" 감사합니다. 지구 소풍의 이야기는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펼쳐집니다. 다음 이야기를 꼭 기다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