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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길46, 세월아 네월아 산티아고 순례길 46.

멜리데에서 아르수아까지(14km)

by 지구 소풍 이정희

아침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스페인 알베르게는 보통 저녁 10시 이전에 소등하고 퇴실은 아침 8시이다.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자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부분 6시 반 정도가 되면 한두 명 빼고는 모두 일어나고 방의 전등을 켜는 경우가 많다.


어제는 큰 방에서 16명 잤는데 한국인 친구가 7시 20분에 일어나 방의 전등을 켰다. 벌써 출발한 사람 3명도 있었고, 자고 있던 2명을 제외하고 이미 일어났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배낭 배달 서비스 자동차가 8시에 알베르게에 오니까 빨리 가방을 챙겨야 했다. 자고 있던 외국인 두 명 중 한 명이 일어나더니 방의 전등을 꺼버렸다. 바쁘게 떠날 준비를 하던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어둠 속에서 가방을 챙겼다.

다시 방에 들어온 한국인은 7시 40분이라며 전등을 다시 밝혔다. 그러자 자고 있던 외국인이 전등을 다시 컨 것을 항의했다.


"우리가 아직 자고 있고 조용히 전등을 안 켜고 가방을 챙기잖아. 네가 우리를 무시하는 거야"

"7시 20분 너희 두 명만 빼고 모두 일어나 준비하는데 어두워서 불편하잖아. 그러니 전등을 커는 게 당연한 거야"

"여기는 한 명이라도 잠을 자고 있으면 전등을 안 켜요."

"그럼 한 두 명을 위해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야 하나요? 민주주의는 다수결이에요"


외국인과 한국인의 대화가 나중에는 여기는 외국이니까 여기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한국인과 다수결이 합리적이라는 한국인의 언쟁이 되었다. 늦잠에 가벼운 언쟁으로 우리 한국인들은 8시가 넘어 제일 늦게 알베르게를 나왔다.


'스페인 알베르게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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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도시 같은 멜리데를 뒤로하고 공동묘지 언덕을 오르고 개울을 지나는 징검다리를 넘어 울창한 숲길을 지나면 오 라이도와 보엔테가 나온다. 멜리데에서 보엔테까지는 한 시간 반을 걸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은 계속 순례자들의 숨을 몰아쉬게 하지만 그래도 참 즐거운 길이다. 제주 한라산 둘레길처럼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그 그늘에 연둣빛 이끼들과 고사리들이 무성하다.


'울긋불긋한 순례자들까지 어우러지는 정말 아름다운 그림이다!'


주변을 둘러보며 발걸음이 느려진다. 늦게 출발하여 14km만 걸으니 12시까지 알베르게 도착 예정이라 참 여유롭다. 안 보이던 버섯들도 이제야 여기저기 보이고 앙증맞은 야생화들도 많이 피어있다.


'나는 빨리 걸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이런 것들을 여유있게 즐기려고 온 거야'


계속해서 아름답게 펼쳐진 계곡을 지나 사진에서 보던 화분으로 장식된 유럽 주택과 목장 사이를 걷는다. 갈라시아지방의 초원은 밀 농사를 짓기보다 목축을 위한 초원을 조성하는 것 같다. 썩힌 퇴비를 초원에 뿌리는 작업을 하였는지 축사가 없어도 벌판에서 똥 냄새가 구수하다. 이제는 생명의 냄새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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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두 길을 선택하는 지점이 두 번이나 있었다. 순례자들은 지도를 보며 거리가 짧지만 높은 길과 거리가 길지만 완만한 길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대체로 젊은이들과 남자그룹은 짧은 길을, 여자들 그룹이나 중장년들은 완만한 길을 선택한다.

인생을 사는 데 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마음이 급해 빨리 가면 안전보다는 난이도를 감수해야 하고 생각과 달리 변수가 발생한다. 결국 두 길은 비슷한 시간에 만나는 게 되는 경우가 많다.


숲속 갈림길에 '순례자들의 오아시스'라는 예쁜 트럭이 보여 빨리 걸었다. 푸드트럭인 줄 알았는데 과일과 기념품을 팔고 세요를 찍어주고 있었다. 사리아부터 사람이 모이는 곳마다 '세요 세요' 소리가 들린다. 800km를 걷는 사람을 위해 만든 긴 순례 여권에 100km 걷는 사람들이 모두 채워 완주증을 갖고 싶은 욕심을 이용하는 상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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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올레 완주증처럼 100km 완주 인증과 전 구간 완주증을 분리하면 될 터인데 산티아고 순례길 지나는 마을들 경제 때문에 그런 건 아닌지. 아르수아까지 가장 힘든 오르막이 3km에 걸쳐 계속된다. 작은 마을에는 알베르게 몇 채와 세요를 판매하듯 찍고 가라는 카페 주인의 큰 목소리를 지나친다.

요즘 순례자들은 언덕길이 힘든 게 아니라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지친다. 비가 오다 햇빛이 반짝거리며 더워지다 다시 비가 오며 추워진다. 힘든 오르막길을 돌아서니 오늘의 숙소가 있는 아르수아가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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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수아는 마을의 입구에 순례자 벽화로 지친 순례자들을 환하게 맞이한다. 작은 도시가 1km 정도 큰 도로를 중심으로 현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아르수아에는 떼띠야(작은 젖가슴)라고 불리는 전통 치즈로 유명한 마을이 있다. 아르수아 치즈는 팔레스 데 레이의 우요아 치즈와 같이 철저하게 원산지 표기를 해서 보호한다고 한다.


'단백한 치즈는 과자보다 고소하다. 예전에 먹었던 독일 수제 치즈가 정말 먹고 싶다!'


이제 비가 완전히 그치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환하게 웃고 있다. 오늘도 수고했다며 안아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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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알베르게 데 셀모 - 인덕션에 끓고있는 솥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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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늘의 저녁 ㅡ 라면.흰밥, 피클, 샐러드

오늘의 알베르게는 산뜻한 한글 간판으로 환대해 준다. 여주인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안내하며 커튼으로 분리된 침대를 고르라고 한다. 비에 젖은 몸을 씻고 세탁을 하여 햇볕에 널어놓고 글을 쓰고 있는데 함께 여럿 날 걷다 열흘 전 헤어졌던 제주도 아가씨가 알베르게에 들어온다. 착한 아가씨라 마음에 남아 오늘 아침에도 다른 한국인에게 근황을 물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너무나 반가웠다.


지난번 크게 다친 호주 할아버지를 자기의 수건으로 지혈을 해주었던 모습에 나는 어른으로 한 일이 없어 정말 미안했다. 다시 만나면 뭐라도 해주어야지 생각했는데 만난 것이다.


'맛있는 저녁이라도 사주어야지, 아니면 수건을 사주던지'


함께 마트에 가서 장을 보아 한국 스프와 계란, 새우를 넣어 라면을 끓였다. 냄비에 하얀 쌀밥을 하여 라면국물에 말아먹고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남은 밥으로 숭늉을 끓이고 누룽지를 만들어 내일 간식으로 포장했다. 제주도 아가씨가 스페인와서 처음으로 쌀밥을 짓고 누룽지와 숭늉을 먹는다며 너무 좋아해서 참 기쁘다.


'오늘은 제가 스페인와서 처음 맞는 행운의 날인가봐요!'


지금까지 761km 무사히 걸은 것은 감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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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알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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