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길 31, 호주

시드니 6 - 대자연

by 지구 소풍 이정희

혼자 떠나는 은퇴 여행 ― 시드니, 마지막 여정 블루마운틴즈


시드니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블루마운틴즈 투어에 올랐다.
아침 6시 반, 호주 교포 2세 안내인의 작은 밴에 8명의 몸을 싣고 인적이 드문 블루마운틴즈의 암벽과 계곡, 숲길을 향해 달렸다.

호주 국립공원 투어 전문자격증을 가진 유일한 한국인 가이드로, 자신이 직접 개발한 트레킹 코스를 자랑스럽게 안내했다. 그는 병원 임상병리사로 일주일에 한 번 소수정예로 트래킹을 운영하고 몇 개월전에 마감된다.


블루마운틴즈는 시드니 근교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 규모는 서울의 네 배나 될 만큼 광활하다. 봉우리가 여러 갈래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블루마운틴’이 아닌 ‘블루마운틴즈’라 부른다.

이곳은 캐나다 밴쿠버와 함께 광활한 세계 2대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국립공원이다. 놀랍게도 국립공원 안에도 ‘블루마운틴즈 시티’라는 도시가 있어 8만 명의 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


첫 목적지는 옐로 락이다.
아침의 블루마운틴은 이름 그대로 푸른 숨결로 가득했다. 유칼립투스 숲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안개가 계곡을 감싸고, 그 안을 천천히 걸어가는 발소리만이 고요를 흔든다.

길 위에는 이끼 낀 바위와 떨어진 잎들이 부드러운 이불처럼 깔려 있다. 햇살이 가지 사이로 떨어지면, 그 빛은 물결처럼 흔들리며 나를 따라온다.
바람은 짙은 나무 향을 품고, 어제보다 한층 느리게, 더 깊게 숨을 쉬게 만든다.

비가 갠 뒤 남은 안갯속으로, 아찔한 협곡과 가는 줄처럼 휘돌아 흐르는 니피안 강이 보였다. 저 멀리 시드니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구름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들른 곳은 링컨즈 락이다.
호주의 전설적인 산악인 링컨즈의 이름을 딴 곳으로, 절벽 끝에 앉아 제이슨 계곡을 내려다보는 인생 사진 명소다. 사진 속으로 보면 아찔하지만, 실제로는 안전하다. 가이드는 우리가 새벽에 출발한 이유를 귀띔했다.


“9시부터는 사진찍는 줄이 너무 길어요. 지금 이 시간자연이 부지런하게 서두른 우리만의 무대죠.”


안개가 걷히는 풍광 속에서 우리는 마운틴이 아닌 마운틴즈의 호젓함을 온전히 즐겼다. 뒤돌아보니 벌써 다른 단체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계획하고 준비한 만큼 많은 기회가 찾아온다.’

링컨즈 락
세 자매봉 전망대 방향표시

아침을 거른 우리를 가이드는 작은 마을 루나로 데려갔다. 그는 토박이 맛집들을 소개하며 커피와 빵을 권했다. 날씨에 따라 음식의 맛과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진다는 그의 말이 인상 깊었다.

‘직업을 즐길 줄 아는 진짜 프로다.’

갓 구운 캥거루 파이 한 조각(9달러)과 진한 호주식 커피(4.5달러). 그 한 끼가 피로를 잊게 하고, 한 달 동안의 긴 여행 마지막 날을 기대하게 했다. 커피 향을 따라 소품가게와 작은 카페들을 둘러보며 마을을 천천히 걸었다.


블루마운틴즈에 오면 꼭 들러야 하는 세 자매봉 전망대. 하지만 가이드는 우리를 사람들 틈이 아닌 맞은편 협곡 정상으로 안내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같이 단단해 보이지만, 바위의 주름 속엔 수천 년의 비바람과 기다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 오래된 시간의 무게가, 왠지 모르게 나를 다독인다.

“진짜 즐기는 건 줄 서서 사진 찍는 게 아니죠. 멀리서 여유있게 바라보는 게 진짜예요.”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가까이 있어 보지 못하는 것이 많다. 때로는 멀리서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세 자매봉의 이름 유래를 들은 뒤 가이드는 묘한 질문을 던졌다.
“세 형제봉이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요?”

"남들처럼 말고, 어떻게 보이는지 이야기 해볼 사람 있나요?"

국립 공원을 뛰어 다니는 캥거루들
블루마운틴즈 중심 마을 카톰바
철가루 성분이 많아 자석이 달라붙는 바위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북쪽의 그로스 밸리 정상으로 이끌었다. 사암 바위를 오르며 손끝으로 바위를 만졌다. 수많은 세월을 견딘 바위는 결국 모래가 되어 사라져 간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는 우리에게 철분이 많은 돌과 모래를 자석에 붙여보게 하고, 캥거루·왈라비·알파카·개똥의 차이를 직접 손으로 느껴보게 했다.


처음엔 모두 망설였지만, 어느새 우리는 웃으며 참여하고 있었다. 가파른 숲가에는 사막의 선인장처럼 빨간 꽃이 피어 있었다. 꽃봉오리를 눌러 떨어지는 진액을 맛보니 달콤했다.

‘마운틴 데블’.
가이드는 블루마운틴즈에만 자라는 식물과 새들을 마치 친구처럼 이야기했다. 그의 눈빛에는 사랑과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우리, 지금 블루마운틴즈의 고급 생태학습 중이에요.”
투어비가 비싼 이유가 있었네.’


점심은 블루마운틴즈 중심 마을, 카톰바에서 먹었다. 옛 광산 마을의 시간은 멈춘 듯했고, 늙어지만 밝은 노인들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들은 관광객을 위한 각국의 냄새로 거리를 채웠다.


풀밭에서 여러 가지 덩어리를 집어 들고는 캥거루, 왈라비, 알파카, 개똥의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며 만지게 하였다.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모두 만져보았다. 부드러운 진흙 덩어리 같고 냄새도 없다.


경사가 급한 숲가에 사막에서 볼 것 같은 선인장 종류의 빨간 꽃들이 보였다.

꽃봉이를 살짝 눌러 진액을 떨어뜨려 먹어보게 한다. 달콤한 것이 과일 맛이다. 꽃 이름이 '마운틴 데블' 이란다.

그는 블루마운틴에만 산다는 나무와 꽃, 풀과 새들을 제 집처럼 찾아 신나게 이야기해주고 싶어 했다.

우리들은 그의 진심과 열정을 알기에 뾰족한 나뭇잎이 몸에 스치고, 벌레에 놀라도 웃으며 좋아했다.


"우리 지금 블루마운틴즈의 고급 생태학습을 하고 있는 거지."

"이 투어가 일찍 마감되고, 비싼 이유가 있었네"

"호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우리보다 더 말을 정확히 하고 예의가 바르네"


마운틴즈의 중심 마을인 카톰바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각자 흩어져 얼른 식사를 하고 마을 구경을 즐겼다.

70-80년대까지 광산의 중심지였던 마을은 폐광이 되어 시간이 멈춘 채 이제는 관광객들을 맞고 있었다.

명랑한 노인들이 운영하는 여러 나라 음식점들이 문을 활짝 열고 냄새로 유혹하고 있었다.

블랙히스 산 전망대

블랙히스 산 전망대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 이용되는 장소라 넓은 잔디가 있고 쉴 수 있었다. 협곡을 배경으로 낙하산을 타는 것처럼, 하늘을 나는 것처럼 온몸을 파닥거렸다.

"정희 님은 여행을 참 즐기시네요. 호기심도 많고 뭐든 열심히 참여하시네요!"

가이드의 말에 나는 웃었다.

‘그래, 나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구나.’

산불과 번개에도 살아 남은 나무들 길 가운데 도마뱀

광활한 초원에는 캥거루들이 뛰어놀고, 숲 속에서는 앵두새들이 사랑을 속삭였다. 산불로 검게 그을린 나무들이 아직도 서 있었다. 2020년의 불길 속에서도 살아남은 생명들, 그 의연함이 마음을 울렸다.

“이곳은 번개가 많아요. 그래서 집은 나무보다 높게 지을 수 없답니다.”
가이드의 말처럼, 탄 나무들 사이에 거미줄이 얽혀 있고, 말벌통이 매달려 있었다. 도마뱀은 자동차 길 한가운데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경적을 울려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보니, 보이는 게 많다. 생명은 참 대단하다.’


이글 락에 도착하자 광활한 숲이 한눈에 펼쳐졌다. 저 멀리 시드니의 외곽과 우리가 건너온 다리가 보였다.
‘와, 이 넓음을 어떻게 다 담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터널 락이다.

확 트인 시야 속에서 오늘의 여행, 그리고 시드니의 시간을 정리했다.

오후 3시, 뜨거운 햇살이 지쳐 물러나고, 달궈진 암벽은 석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인생도 이쯤인가.’

바위에 걸터앉아 한 달간의 여정을 되돌아보았다. 무엇을 담아갈 것인가, 남은 인생은 어떤 빛으로 채워질 것인가.


블루마운틴즈의 바람은 나무향을 품고 고독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그것이 여행의 선물이었다. 가이드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쉬워하는 우리를 묵묵히 오랫동안 기다리며,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그는 내가 만난 최고의 안내인이다.’

그리고 그렇게, 길고도 짧은 호주여행은 끝이 났다.


소중한 사람들,
다시 시작될 시간들,

그리고
조금은 달라진
나의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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