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길 33, 호주

시드니 8 - 사람

by 지구 소풍 이정희

호주는 ‘가든의 나라’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공원이 많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시드니 중심에 자리한 하이드 파크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공원답게, 도시의 심장 같은 존재였다.


맑게 트인 하늘 아래 끝이 보이지 않는 초록 잔디가 카펫처럼 펼쳐지고, 그 위에 누워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 나무 그늘 아래에서 묵묵히 운동하는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평화로움이었다.

마치 시간이 조금 더 느리게 흘러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곳곳에 세월을 견뎌온 예술 조각과 분수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몇 백 년은 되어 보이는 나무들은 거대한 우산처럼 공원을 감싸고 있었다. 잘 갖춰진 운동시설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이드 파크는 몇 시간을 걸어도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마치 작은 도시 같은 장소였다.

그 많은 풍경 중에서도 내 마음에 오래 남은 곳은 공원 한쪽에 자리한 작은 철제 계단, 바로 ‘나서서 당신의 말을 해보세요(Speakers’ Corner)’라는 공간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계단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앞에 서자, 설명문 한 줄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누구든 여기 올라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 140여 년 동안 매주 일요일 오후, 이 전통은 이어져 왔다.”


하이드 파크를 걷는 동안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곳 역시 그 계단 앞이었다. 140년. 숫자를 읽는 순간, 이 작은 계단이 갑자기 커 보였다.

수많은 발자국과 목소리가 새겨놓은 자리,

자신의 진심을 걸고 올라섰을 이름 모를 사람들.

누군가는 사회정의를 이야기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시대의 억울함을,

또 누군가는 그저 마음속 응어리를 풀기 위해 이 세 계단 위에 올랐을 것이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 그 낮은 세 계단 위로 올라가 사회정의와 정치, 그리고 자신이 믿는 가치를 이야기했다고 한다.


'누군가는 단호하게, 또 누군가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 자유로운 말하기의 전통이 있었기에, 역사가 짧은 이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리라.


지금도 호주는 정당한 이유 없이 투표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하는 투표 의무제를 실시한다. 그만큼 ‘말하는 자유’와 ‘참여하는 책임’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나라다. 그 계단에 올라섰던 수많은 목소리들이 시대를 조금씩 밀어 움직였을 것이다.


나는 계단 옆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젊었을 때의 나는 ‘말한다’는 것이 늘 쉬웠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은퇴라는 긴 숨을 멈추어 보니, 말의 무게가 정말 다르게 느껴졌다.
이제는 말하기보다 ‘듣는 일’이 더 어렵고, 더 가치 있다는 걸 많이 알게 되었으니까.


하이드파크의 스피커스 코너는 그런 나에게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당신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얼마나 귀 기울여 듣고 있는가?”


웅장한 블루마운틴즈, 반짝이는 본다이 비치, 거대한 자연이 펼쳐진 그레이트오션로드도 인상 깊었다.

정작 가장 다시 보고 싶은 것은 그 작은 철제 계단 위에서 자신만의 진심을 외치던 이름 모를 사람들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가끔 그 계단을 떠올린다. 내게 묻던 질문들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퇴 후의 삶은, 아마 그 답을 천천히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오늘도 마음속의 작은 스피커스 코너를 떠올린다. 나 역시 내 삶의 다음 페이지에서 무엇을 말하며 살아갈 것인지 조용히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사합니다.

호주 이야기는 아쉽지만 마지막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뉴질랜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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